〈 82화 〉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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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을 투입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레오나드의 발걸음을 쫓으며 이리나가 말했다.
화려한 왕궁의 복도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오나드는 그녀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계속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지하 감옥이 습격당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뚫린 적이 없었던 감옥이 말입니다.”
그녀는 말하는 와중에도 분노를 참지 못했다. 점점 사나워지는 발걸음은 성난 야생동물을 떠올리게 했다.
이리나는 테오도르의 최연소 기사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칭호를 부러워했지만, 그녀에게 최연소라는 칭호는 짐일 뿐이었다.
최연소 기사기에 그녀에게 기대하는 눈빛은 거대하게 다가왔다. 겉으로는 그들의 말과 행동에 에너지를 얻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수많은 세월 동안 그들의 열망을 업었던 테오도르지만, 그것은 준비한다고 괜찮아 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걸 나에게 말을 하는 이유가 뭔가.” 레오나드 페트릭은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말 한마디면 당장이라도 수백의 경비병들이 도심으로 투입될 겁니다. 저는 그 한마디를 원합니다.”
“지금 나는 아카데미의 교수에 지나지 않네.” 레오나드는 이리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런 분이 왕궁을 자유롭게 거닐고 계십니까?” 이리나는 그의 눈을 뚜렷하게 쳐다보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레오나드의 말에도 이리나는 물러설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강하게 그를 밀어붙였다.
“이번 사건에 사상자가 있었나?”
“..............아뇨.” 그녀는 그의 물음에 담긴 뜻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는 일 아닙니까!”
“아니, 알고 있다네.”
레오나드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의 말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이번 소동을 일으킨 범인들은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네. 만약 시민 하나라도 건드렸다가는 많은 활동에 제약이 생기겠지.”
“그러면 이 모든 일이 검은 존재 하나를 탈옥시키기 위해 벌어졌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리나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딱히 그렇지는 않네만……….” 레오나드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잘 알겠습니다.” 이리나는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회귀자들의 논리는 항상 똑같았다. 진실에 닿을 것 처럼 말을 하고는 절대로 결정적인 말은 하지 않는다.
“너무 분해하지 말게, 나라고 알려주고 싶은 것이 아니니.” 레오나드는 미안한지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잘나신 회귀자분들의 결정일 텐데 제가 어찌 딴지를 걸겠습니까.” 이리나는 뒤로 돌아 걸었다.
그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거닐던 복도를 보면서 이 왕국의 미래를 걱정하였다.
“참……. 자네는 변한게 없군.”
레오나드는 귀족의 자제였다. 검술에 상당한 재능을 타고 태어났기에 그는 대부분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사랑과 관심을 되돌려 주기 위해 테오도르의 기사가 되었다. 기사라는 존재가 그가 생각한 것 만큼 빛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레오나드는 자신이 생각하는 기사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단체와 충돌이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과정 중에 자기 행동 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 있었다.
자신의 앞에서 따지고 있는 이리나였다. 그 당시에는 귀찮다는 이유로 그녀의 말을 모두 무시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의 말을 모두 일리가 있었다.
평민 출신에서 여기까지 기어 올라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말은 더더욱 가치가 있었다.
그녀의 말은 평민을 대변했고, 국민을 대변했다. 그렇기에 테오도르의 국왕 또한 그녀를 가깝게 두었었다.
레오나드는 이제 그녀의 말을 들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죽은 사람 아닌가. 그녀의 죽음에 장대비같은 눈물을 흘렀지만, 이제는 지나간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리나는 바뀌지 않았다. 레오나드는 그녀의 올곧음을 알지 못했다. 지금 그 안일함의 결과를 체험하는 것 같았다.
문.
테오도르의 국왕에 다가가게 위한 관문 중 하나였다. 웬만한 이들은 이 문을 보지도 못 한 체 사라졌겠지만, 그는 예외였다.
쿠웅—
문이 열리는 소리는 듣자 레오나드는 고개를 숙였다. 이 왕국의 지배자에게 합당한 경의를 표하는 중이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면서 몸을 고정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나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폭발음을 듣고 달려갔었던 그녀였다. 카밀라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녀는 무사해 보였다. 너무나도 말이다.
“우리 아가씨가 걱정되서 와 본 거지.”
그녀는 가볍게 내 말에 대꾸하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왼손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있었지만, 그녀에게 굳이 항의하지는 않았다.
내가 항의해 봤자 바뀔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일은 다 끝났어요?”
“어. 지금은 다 끝났어.”
그녀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녀는 이보다 더 없을 수 없을 만큼 환한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기분은 좋아 보이네.
앞을 바라보니 아직도 엘리사와 타이렌은 싸우고 있었다.
전투의 양상만을 보면 엘리사가 압도하고 있었다. 타이렌은 내가 보기에도 방어하기에만 급급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방벽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엘리사가 그렇게 두들겼는데도 말이다.
“카밀라.”
나는 내 옆에 있는 카밀라를 향해 말했다.
“엘리사를 도와서 타이렌을 제압해 줄 수 없나요?”
사실 엘리사 혼자라고 해도 타이렌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끌리는 것이 내게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이대로 더 시간을 끄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카밀라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그녀라면은 타이렌을 잡아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뭐, 상관은 없는데…….”
카밀라는 목을 긁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면 나한테는 뭘 해줄 거야?”
“.....네?”
“아니, 맨입으로 내가 해주는 건 너무 손해잖아. 우리 아가씨 입으로 뭐라도 확답을 듣고 싶어서 말이야.”
그래. 이럴 줄 알았지.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물음이었다. 사실 내가 그녀에게 대가로 줄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돈? 이미 그녀는 넘치도록 많아 보였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였지만, 그럴듯한 것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럼. 소원권 어때요.”
“소원권?”
“당신이 원할 때 언제는 소원 하나를 들어 줄게요.”
내가 택할 수 있는 가장 큰 가치의 대가는 이것뿐이었다. 그녀는 딱히 물질적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소원권이라는 두루뭉술한 것으로 그녀를 설득했다.
“물론……. 제가 할 수 있는 것에 한에서요.”
이런 제한을 붙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 조건은 나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가 그날 밤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래. 우리 아가씨 부탁인데 어쩔 수 없지.”
카밀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양팔을 풀었다. 처음으로 그녀가 멋져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내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뒤에 타이렌의 뒤에서 나타났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그는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의 등을 시작으로 왼쪽 어깨까지 카밀라의 단검으로 그어졌다.
“카밀라……!”
“오랜만이네 영감.”
타이렌은 분노에 찬 얼굴로 카밀라를 노려보았다.
카밀라는 그 표정이 보기 좋다는 듯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왜 이렇게 울상이야. 보기 역겹게.”
“이……….! 네까짓 게 어째서 여기에…….”
타이렌은 카밀라를 몹시 업신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천민을 대하는 귀족의 말투 같달까.
“너희 여신님께서 같이 싸우라 명하셨거든.”
카밀라는 그 말을 하는 동시에 팔을 휘둘렀다. 그는 이번에는 막아내었지만, 그 뒤에서 닥쳐오는 엘리사의 주먹은 피할 수가 없었다.
쾅—!
타이렌은 물수제비같이 땅 위에서 몇 번이나 튕겨줘 나갔다.
그에게 딱히 악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그에게 호감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처절하게 날아갈 줄은 몰랐지.”
괜히 나는 마음이 아파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꺼져.”
“하, 아까 내가 한 말은 못 들었나 봐?”
“뭐?”
“우리 아가씨가 나에게 부탁했지 뭐야. 저 지랄 맡은 늙은이 좀 잡아 달라고 말이야. 네가 어지간히 불안했나 봐.”
엘리사의 고개는 180도 꺾여 나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리 차이가 없을 텐데도 그녀의 눈빛은 얼음보다 서늘하다고 느꼈다.
“아가씨………”
아 존나 무서워.
제발 그런 무서운 눈빛으로 안봤으면 좋겠는데.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건데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건 조금 그렇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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