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협박(어설픈)
* * *
“여신님의 세 번째 심복 칼튼 타이렌 이라고 합니다.”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인물이 서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소설에는 그런 이름이 나온 적도 없었다.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인 인물은 내가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푸른색의 머리칼을 한 사내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가 청년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세월을 겪은 노인에 가깝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그의 말투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그의 말투는 늙은 할아버지 같은 말투였다.
그는 말끝 하나하나에도 말끝을 늘어트렸다.
마치 내가 친할아버지를 뵈었을 때 느꼈던 감각이었다. 무언가 말투 하나하나를 잡아끄는 말투.
도저히 20대의 청년이라고는 볼 수 없는 말투라고 할까.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원작 소설에 있는 인물 중 그와 묘사가 비슷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1부에 나오는 모든 인물을 그와 대조해 보아도 비슷한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연재를 중단한 작가가 미워졌다. 군대에 갔다는 핑계로 1부 완결 내고 튀면 단가. 나는 3년을 기다렸는데.
내가 이렇게 신세를 한탄해 봤자 이득이 되는 것은 없겠지.
자스민에게 이렇게 깍듯이 인사를 하는 것을 보아하니 자스민이 거느렸던 한 단체의 간부 같았다.
벨리타 자스민이 평범한 악역 영애인 줄 알았다. 최소한 자벨리나에게 치이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사건들을 생각해 보니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벨리타 자스민은 이 대륙의 중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정도였다.
벨리타 자스민은 그저 별 능력이 없는 악역 영애일 뿐인데도, 나를 보는 모두가 나를 과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대체 회귀 전의 자스민이 어떤 일들을 했길래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나는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들 자스민에 대한 정보는 차단하면서 나에게 알려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최대한 오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쳐다보는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자리에서 최대한 버텨서 다른 이들이 와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엘리사, 소니아, 노엘 아니면 카밀라라도 말이다.
다들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간 것 같은데 서둘러 나에게 와주었으면 좋겠다.
지금 안타깝게도 나는 공용 마법진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엘리사가 몸에 무리가 간다는 이유로 공용 마법진을 모조리 싹 치워 버렸기 때문이다.
엘리사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녀의 판단으로 나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회복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엘리사를 향해 조금의 원망도 하지 않았다.
단지 마법진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나 자신을 책망할 뿐이었다.
최소한 마법진을 만들 줄 알았다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여신님, 저희와 같이 가시죠.”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바라보면서 별의별 생각을 했다. 내 앞에 있는 손을 잡는 것은 싫었다.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에게 끌려다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의 손길을 내친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갑작스러운 사건의 진행에 머리가 어지러울 뿐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자스민이 무언가 이 세계에 위협이 되는 단체를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를 여신님이라 부르는 것 같았고, 지금 나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것이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나는 모호한 말을 하면서 말을 흩트렸다. 지금 내가 그를 향해 도망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순식간에 내 뒤에 나타난 사람이었다. 내가 여기서 문을 열고 들어가서 문을 닫는다고 해도 어느새 방 안에 들어와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옥탑방의 바깥에서 그와 대화를 시도했다. 지금 이렇게 시간을 끌면은 누군가 와주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엘리사는 어디 간 거지.
분명히 이 시간대에는 집에 있을 텐데 말이다. 사실 나는 문을 열었을 때 엘리사가 방안에서 대답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엘리사는 현재 어디로 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로 간 모양이었다. 이럴 거라면 미리 말을 해 주지 그랬어.
나는 맘속으로 괜히 엘리사를 향한 질타를 쏟아냈다. 반쯤은 진심이 아니기는 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반은 진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직 개화되지 않았군요. 그의 말을 듣고 혹시나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일 줄은 몰랐습니다. 저에게는 모든 것을 알려 주시지 않으셨다는 것이군요.”
그는 혼자서 무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빛은 차가웠지만 그만큼 열정적이었다.
“후………… 어쩔 수 없죠.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그 말과 동시에 그의 주위에는 검은 존재들이 나타났다.
나는 검은 존재는 마르셀린이 잡은 것이 끝인 줄 알았는데, 내 앞에 나타나는 검은 존재는 내 상상을 조각도 남겨두지 않고 부숴 버리고 말았다.
그의 옆에 나타나는 검은 존재는 내 양옆으로 와 내 팔을 잡으려고 했다.
“흐…. 으읏.”
나는 열심히 저항해 보았지만, 별로 효과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내 두 팔은 형편없이 쉽게 잡혀 버리고 말았다. 나는 뭐라도 저항해서 시간을 끌고 싶었지만, 지금 나에게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왜 이러시는 거죠.”
“지금의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하지만 곧 저희의 행동을 이해하실 겁니다. 그때가 되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조금만 참아 주시길.”
말이 안 통한다.
아까부터 느낀 것이지만 저 사람은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발이라도 고정시켜 이곳에 가만히 있으려고 했다.
“.......윽!”
물론 별로 의미 있는 저항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콰앙—!
그때, 내 앞에 별똥별처럼 황금빛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떨어졌다. 나는 그 빛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내 옆에서 내 팔을 잡았던 검은 존재들은 그들을 감싸던 검은 붕대 일부분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엘리사?”
“아가씨….”
내 앞에 나타난 존재는 다름 아닌 엘리사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예전에 보았던 것 같이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지금까지 어디 있었느냐,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은 대체 뭐냐, 내 앞에 있는 남자와 아는 사이인 거냐 등등 알고 싶은 것이 산더미만큼 쌓여있었다.
“오랜만이군. 그 모습을 보는 것은 더더욱 오랜만이고.”
“..............”
그는 엘리사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들을수록 그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20대 청년 같았지만 갈수록 내 앞에 있는 남자가 노쇠한 노인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말투나 행동 눈초리까지 20대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이 정도로 친근하게 말을 거는 이는 나를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그의 말투에는 어딘가 뼈가 존재하고 있었다. 반가움 만이 아닌 원망과 혐오, 그리고 질투가 섞여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엘리사는 그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이라면 아직 용서해 주겠네. 어서 여신님을 이쪽으로 넘기게.”
스윽—
“엘리사……?”
엘리사는 왼손에 작은 무언가를 넣어 주었다. 나는 엘리사를 불렀지만, 그녀는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바뀐 것이 없군. 타이렌.”
“칭찬 같지는 않군, 망국의 공주여.”
엘리사와 타이렌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면서 기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둘을 바라보는 동시에 내 왼손에 있는 물체가 무엇인지 탐구하고 있었다.
매우 작은 두루마리 같은 모양이었는데 이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물러나라. 타이렌. 아가씨는 네까짓 것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분이다.”
“오만하군.”
“........자네는 항상 그랬지.”
그 순간, 내 양옆에 남아있던 검은 붕대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폭발하고 말았다. 붕대가 폭발하는 동시에 붕대에서는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퍼진 검은 연기에 나는 엘리사를 찾으려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발견한 사람은 엘리사가 아닌 푸른 머리의 타이렌 이었지만. 그는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어지러우실 겁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어딘가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동하는 느낌은 썩 좋지 않았다. 사실 토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술을 진탕 먹은 상태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이랄까.
하여튼 죽고 싶을 정도였다.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어느새 테오도르 밖에 나와 있었다. 내 곁에 있었던 엘리사는 어디가고 타이렌만 남아있었다.
“......저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죠?”
타이렌은 나를 보더니 슬며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여신님의 쉼터입니다.”
“제가…. 원하지 않더라도 데려갈 생각인가요?”
“네.”
대답에 거침이 없었다. 그는 당연한 것을 물어봤다는 듯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믿을만한 것은 엘리사가 주었던 작은 두루마리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타이렌이 내 팔을 잡았을 때 이 두루마리의 역할을 알 수 있었다.
“타이렌.”
“네. 여신님.”
나는 두루마리에 마나를 집어넣었다.
그녀가 준 것은 작은 모양의 마법진이었다. 엘리사의 마법진 말이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나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마법진의 크기가 매우 작고 내 손안에 말려져 있기 때문에 강력한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나에게는 별 상관이 없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마법은 뇌창 뿐인데, 그것을 쓰면 내 몸이 타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냥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얼음 결정 하나를 만들었다.
그러고 나는 타이렌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손끝 하나라도 움직이지 마요.”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자살할 거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