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77화 (77/120)

〈 77화 〉 어려움

* * *

‘미치겠네………….”

칼 엘은 현재 자스민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었다.

칼 가문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딱딱하고 표현이 서툰 사람들 뿐이다. 그 속에서 자란 엘도 그들과 같아지는 것은 어찌 보면 숙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 스스로는 칼 가문의 사람들과는 달랐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는 그리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녀가 처음 자스민을 봤을 때 느낀 감정은 호기심이었다. 입학식이 끝나고 소니아라는 사람과 대치를 했을 때 그녀는 호기심을 느꼈다.

대체 어떤 사정이 있기에 저렇게 뚜렷한 적의를 마주하고도 아무 잘못이 없는 것처럼 깨끗할 수 있을까.

그 후에 칼 엘이 자스민이라는 사람에게 내린 판단은 간단했다.

약자.

그것도 강자에게 빌붙어 먹으려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간단했다.

강자와 친하게 지내면서도 자신의 실력은 덜 떨어졌다는 것. 어느새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스민이라는 존재는 간신 같은 것으로 바뀌었다.

다른 이들이 보면 그녀의 논리 회로에 딴지를 걸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칼 가문이었다.

칼 가문에서는 강자에게 빌붙는 약자를 극도로 혐오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스민을 무시했다.

아카데미에 다닐 자격도 없는 약자가 자신과 같은 조라는 사실 자체가 그녀에게는 혐오를 유발했다.

그렇기에 자스민을 조별 과제에서 배제했다.

자신의 과제에 무임승차를 하는 것을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스민에게 심한 말을 하면서 그녀를 가만히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자스민은 그녀가 생각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과제를 완료하고 돌아가는 그녀의 눈에 비친 광경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온몸에 피를 흘리며 나무 밑에 쓰러져있는 자스민, 저 멀리 무언가에 관통된 듯 구멍이 뚫려 있는 괴물, 물과 함께 쓰려져 있는 자벨리나까지.

그 상황을 본 엘은 누군가 자기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믿고 있었던 것에 흠이 가고 있었다.

금이 가고 있는 돌에 물을 부은 것은 그녀의 뒤에서 나타난 마르셀린이었다.

“멍하니 서서 뭐 하니?”

“아……. 교수님.”

마르셀린의 옷깃에는 아까는 볼 수 없었던 흠집이 나 있었다. 그런 것에 비해 그녀의 몸은 너무나 멀쩡해 보였기에 그녀는 아무런 물음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뒤가 없는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

“짐승 하나 죽이겠다고 모든 마나를 때려 박아 전격 마법을 시전하다니. 멍청한 건지 삶에 미련이 없는 건지.”

마르셀린은 그녀의 근처에 떨어져 있던 끊어져 있던 목걸이를 집었다.

그녀는 엘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업으렴.”

“네….?”

“조원이잖니.”

자스민의 상태는 딱 봐도 정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오른쪽 팔은 핏줄이 터져 피로 뒤덮여 있었고, 입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엘은 바로 그녀를 업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생각할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르셀린의 말대로 서둘러 자스민을 업고 마차를 향해 달려가고 싶어질 뿐이었다.

“엘……!”

그녀의 뒤에서 말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많이 들었던 목소리 다니아의 목소리였다.

“흠…… 너는 얘 따라서 가렴.”

마르세린은 다니아에게 자신이 주웠던 끊어진 목걸이를 건네주었다.

다니아는 아직 무슨 상황인지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마르셀린은 그녀에게 설명도 하지 않고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엘은 자스민을 업고 자신이 걸었던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떡해야 하지.’

그 후로 엘은 수많은 생각의 홍수 속에서 지냈다.

주된 고민은 자스민에 관한 것이었다. 엘은 자스민을 볼 면목이 없었다.

약자라고 깎아내리면서 그녀를 깔보았던 과거가 그녀를 괴롭혔다. 자스민의 병문안을 가고 싶었지만, 가는 것 자체가 자스민에게 폐가 될 것만 같아 가지 않았다.

엘은 베개에 얼굴 묻고 한동안 조용히 지냈다.

그녀에게 주어진 죄책감을 짊어진 채로 사과의 말을 내뱉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자스민이라면 별 생각 없이 사과받아 주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나는 도서관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은 내게 매력적인 장소이기 충분했다.

소음이 없는 장소만을 원하는 것이라면 옥탑방만으로 충분했지만, 도서관이라는 장소가 주는 느낌은 대체할 수가 없었기에 자주 올 수밖에 없었다.

“자스민씨 전격 마법을 썼다고 들었는데 한번 보여주시면 안 돼요?”

“자스민씨 몸 상태는 괜찮으세요?”

“자스민씨 오른팔에 감각은 있으신가요?”

“자스민씨 마법 실력이 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정확히 어떻게 느셨는지 대답해 주실래요?”

내 옆에서 알짱거리는 엘프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원체 남의 말을 무시하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야, 좀 닥쳐라.”

보다 못한 소니아가 이사벨라의 머리를 때리면서 말렸다.

“.....소니아씨는 상관없잖아요.”

“시끄러워서 책을 읽을 수도 없는데 무슨 상관이 없어 이 새끼야.”

소니아는 이사벨라의 머리채를 잡고 책으로 머리를 내리쳤다.

빡—

“악! 당신 너무 심한ㄱ, 아악!”

일정한 리듬으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백색소음 ASMR 같달까. 아까와는 다르게 책에 훨씬 집중이 잘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자스민씨……… 심심해요….”

…..분명 처음 만났을 때는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세간에 퍼져있는 엘프의 명성답게 냉철하고 인자한 면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내 옆에 있는 존재는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처음에는 말로만 징징거렸지만, 이제는 내 왼쪽 팔에 정수리를 문지르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소니아는 이미 그녀를 포기한 건지 돌아보지도 않고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은 평범한 로맨스 소설 같았다.

소니아가 로맨스 소설이라니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제는 별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가끔은 저런 소설이 읽고 싶어질 때가 있는 거겠지.

“자스민씨……. 궁금한 게 있으면 저한테 물어보시는 게 어때요? 저 엘프라서 오래 살았고 아는 것도 많은데…….”

뭘 잘못 먹은 건가. 이 도서관에 다시 발을 들이기 전 까지만 해도 그녀의 존재가 두려웠었기에 쉽사리 오지 못했었다.

그러나 막상 다시 와 보니 날카롭고 신성하기까지 했던 엘프는 어딘가고 잉여 한 마리만 남아 있었다.

나는 슬며시 책을 덮어 책상 위에 놔두었다. 책을 덮자 그녀는 기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원래 이런 성격이신가요…?”

“넹?”

“아니, 처음 만났을 때는 지금보다는 진중한 모습이셨던 것 같아서요……”

“첫 만남인데 잘 보여야죠!”

그게 이미지 관리였구나……

뭔가 허탈한 결론에 나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쩐지 소니아와의 첫 만남 때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기는 했지.

“....그러면 질문 몇 개를 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이사벨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자리로 이동했다. 옆자리여도 문제가 없는데 왜 앞자리도 이동한 건지 궁금증이 일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이유를 들어봤자 내 머리만 어지러워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나는 과거 사건들에 관해 물어보았다.

저번에 있었던 끔찍한 조별 과제 결과 우리 조가 발표하게 될 주제는 공용 마법진의 발전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사벨라에게 공용 마법진에 관해 물어 보았고 다행히도 그녀는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가끔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하기는 했지만, 할아버지가 옛날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니 따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원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편 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내 앞에 있는 것은 오랜 세월 살아온 엘프였기에 웬만한 인간보다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뭘요. 저도 오랜만에 이런 이야기를 해서 즐거웠는걸요.”

이사벨라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옆을 쳐다보았다.

소니아는 어느새 책을 다 읽고 멍한 표정을 한 채로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담배를 피지 말라는 이사벨라의 말이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담배를 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사벨라씨는 원래 이 도서관의 사서가 아니신 거죠?”

“뭐……. 그렇죠. 거의 반강제로 맡게 된 거라서요…”

그녀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 책상에 엎드렸다. 흐느적거리는 몸짓은 그녀가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

엘프는 조용함을 사랑한다고 들었지만……. 내 앞에 있는 이는 그런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 도서관의 사서직은 특별해서……. 후임이 들어올 때까지 도서관 밖으로 나가지 못해요.”

“정말로요?”

“네. 슬슬 밖에 나가고 싶어서 계속해서 후임을 요청하는데 듣지를 않더라고요.”

이사벨라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소니아를 바라보았다.

아슈르 도서관의 사서에 이런 제한이 있을 줄은 몰랐다. 어째서 사서가 이 도서관을 나가는 것을 막는 것일까.

“왜 그런 제한이 있는 거예요?”

“아……. 그게…….”

이사벨라는 앓는 소리를 내며 무언가 고민하는듯했다.

“이 도서관에는 지킬 것이 많아서 그래요.”

“....그래요?”

“그런 거죠.”

그녀의 대답에도 내 마음은 상쾌해지지 않았다. 아직 중요한 것을 듣지 못한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이것만으로도 노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사람 하나하나에게 다 알려주면 이 도서관이 지키고 있는 것이 위험해 질 수도 있으니까.

나는 이사벨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