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76화 (76/120)

〈 76화 〉 과제

* * *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꽤나 많은 것이 변했다.

가장 큰 것 하나를 말하자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중간고사까지만 해도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비웃음과 혐오로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의문과 경애, 그리고 질투가 섞여 있었다.

나는 그들의 그런 눈빛이 오히려 적응되지 않았다.

차라리 나를 혐오해 주는 게 더 마음이 편할 정도였다.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에게 이런 시선을 받는 것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소니아와 노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시선들을 아무렇지 않게 즐겼지만, 나는 눈을 깔고 그들의 팔을 잡을 뿐이었다.

“친구야. 왜 이리 고개를 숙여.”

노엘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었다.

“너를 깔봤던 이들인데 뭐라고 한마디 해주지 그래.”

노엘의 말에는 작은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녀의 말뜻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다른 학생들을 향한 것이었다.

벌레처럼 깔보던 것은 언제고 이제 와서 그런 눈빛으로 보고 있냐. 라는 그녀의 불만이 섞여 있는 말이었다.

노엘의 그런 마음을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기 싫었다.

“아니야……. 이미 충분한걸.”

나는 노엘의 품에 고개를 묻으며 말했다.

사실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따지듯이 묻고 싶었다. 하지만 구태여 묻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들이 나에게 향하는 감정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지금 나에게 중요한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그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내 정신에 그렇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어차피 남 아닌가. 그동안 남에게 끌려왔던 내가 말한 것이 좀 그렇기는 했지만, 나는 중요한 인물이 아닌 다른 인물들에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나에게는 딱히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동안과 같이 노엘과 소니아와만 같이 다녔다.

그러나 요즈음 내 주위에 맴도는 다른 인물이 있었다.

칼 엘. 그리고 그녀의 옆에 존재하는 다니아였다.

처음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금방 떨어지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 엘은 정말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다행히도 아카데미와 그 근처 뿐이기는 했지만, 그 정도도 나에게는 충분히 위협이 되기는 충분했다.

“.......너무 따라다니는 거 아니야?”

“뭐, 네가 너무 좋나 보지.”

소니아와 노엘에게 상담했지만 그럴듯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들은 이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노엘은 칼 엘이 나를 바라볼 때마다 웃긴 것을 본 것처럼 행동했다.

나를 보면서 웃어대거나 갑자기 등을 두드려 대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눈빛으로 노엘에게 항의를 보내보았지만 쉽게 접수되지는 않았다. (물론 항의라는 것은 눈빛과 그녀의 팔에 작은 진동을 일으키는 것뿐이었다.)

그녀에게는 이런 내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웃긴 모양이었다.

“친구야, 걱정하지 마. 네 생각처럼 나쁜 놈은 아니니까.”

노엘은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내 어깨를 두드릴 뿐이었다.

처음에는 그녀들의 눈빛이 너무나 거슬렸지만, 이 것 또한 시간이 지나니 적당히 익숙해 질 수 있게 되었다.

남의 시선 같은 것은 무시하는 것에는 이미 도가 텄기에 나는 나름대로 훌륭하게 무시할 수 있었다.

내 몸은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아직도 오른팔은 움직이는 데 불편함을 겪었지만, 다른 부분은 평소와 다를 것 없어졌다.

물론 엘리사의 말에 의하면 몸 안은 아직 많이 망가져 있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내가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봤자 가끔씩 어지러움이 몰려와 중심을 못 잡는 것뿐이었다.

“.......괜찮아?”

“괜찮다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소니아의 걱정에 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별거 아닌 듯이 대답했다. 실제로 별거 아니란 듯이 대답하기도 했고 말이다.

마르셀린과의 관계는 놀랍게도 별 변화가 없었다. 중간고사의 그 사건이 없었다는 것처럼 그녀는 나를 대했다.

나도 그편이 편했기에 나도 그동안과 다르지 않게 그녀를 대했다.

마르셀린이 중간고사의 흑막이 다 어쩐다고 아무리 말해도 나에게는 증거가 없었다. 설마 그녀가 진심으로 나를 죽일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말이다.

그래도 선의 편이 아닌가. 확실하지도 않은 적을 죽여버리는 인물이 아니라고 믿었다. 다른 이도 아니라 아카데미의 교수니 말이다.

항상 내 곁에 있어 주는 그들도 마르셀린과의 관계가 변한 것 같지는 않았다. 평소에는 어쩐다 저쩐다 흉을 보고 중요할 때는 믿는 그런 관계 말이다.

그들의 그런 믿음이 내가 마르셀린을 믿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내 수준에서는 시전하기도 힘든 전격 마법을 시전한 탓일까, 내 마법 실력은 한 단계 위로 진보해 있었다.

물론 마법진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이제는 마법진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었기에 그다지 상관없었다.

공용 마법진을 사용하는 것이 저번보다 힘과 마나가 덜 들어갔다.

처음에는 그저 기분 탓인 줄 알았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는 존재가 마나를 다루는 것에 전보다 훨씬 더 진보한 것이다.

지금이라면 같은 마법을 시전 해도 훨씬 더 크고 효율이 좋은 마법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목적도 알 수 없는 현상에 말려든 보상이라고 생각하지 꽤나 그럴듯했다.

내 목에 걸려있었던 목걸이는 내가 의식을 잃었을 때 내 품 안에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엘리사가 다시 회수한 상태였다.

엘리사의 기세로 보아하니 거의 유물을 만들 기세였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만들겠다고 했는데…….

그녀의 불타는 눈빛이 어찌나 부담스러웠는지…

나는 말로는 그녀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었지만, 엘리가사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 좋은 걸로 만들어 주면 좋은 거겠지.

나는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사의 목걸이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내게 말을 하겠지.

엘리사가 이번 사건에 내 예상보다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나는 엘리사에게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내가 사건 이후 눈을 떴을 때 엘리사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듯 슬퍼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 정도로 많은 관심을 둘 줄이야.

그 관심은 행복했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내가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가 말이다.

지금은 그다지 상관하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꽤 고민했었던 주제였다. 지금은 알아서 되겠지 하고 던져버렸지만 말이다.

중간고사는 어느새 학생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제 학생들의 관심사는 중간고사 때 있었던 사건 보다는 곧 있을 과제에 눈이 가고 있었다.

이번 학기에는 점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들 그것이 공부를 대충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학생들처럼 과제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이번 과제는 조별로 이루어질 겁니다.”

시발.

나는 책상에 머리를 처박았다. 조별 과제라니. 다시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두려움에 떨던 나를 더욱 궁지로 내몬 것은 교수님의 다음 말이었다.

“조는 중간고사 때 짜였던 조로 구성하겠습니다.”

나는 책상에 머리를 처박은 채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엘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죽겠는데, 이런 이벤트까지 주어지다니. 마음 같았으면 노엘과 소니아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그럴 수 없는 현실에 나는 엎드린 채로 가만히 슬픔을 만끽할 뿐이었다.

“이번 주제는 마법의 역사입니다.”

“여러분은 마법의 발전에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되는 사건을 조사해서 발표해 주시면 됩니다. 각 조의 발표와 각자의 보고서로 개인 점수를 채점하겠습니다.”

와 과제다.

나는 힘없이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이 주제라면은 나 혼자서도 가능할 것 같았다. 역사학을 교양과목으로 듣고 있었기에 이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었다.

단지 조별로 이루어지는 과제라는 것이 너무나 슬플 뿐이었다.

교수님의 말이 끝나고 다시 자리한 조원과의 분위기는 가히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 안녕.”

“......오랜만이네.”

다니아와 엘의 안부에 나는 눈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어……. 그러게.”

어색해 죽을 것 같다.

마치 물속에서 끝없는 심해로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미 충분히 괴로운데 앞으로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이 닥칠지 알 수가 없달까.

차라리 전처럼 나를 벌레처럼 여겨주면 참 좋을 텐데. 내 생각과는 달리 회의는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나를 신경을 쓰면서 말이다.

나는 이 회의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싶었지만, 엘과 다니아가 자꾸만 내 얼굴을 쳐다보는 바람에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제발…….

이 과제가 아무런 문제 없이 굴러갈 수 있게 해주세요.

나는 허공을 바라보면서 경건하게 기도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