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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72화 (72/120)

〈 72화 〉 용서

* * *

환각인가.

요즈음 육체적으로 무리하기는 했다.

소니아와 노엘이 온 후에 몸 상태는 나아졌지만, 두통 자체는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 잠깐은 호전되는 건가 싶었지만, 오히려 나빠지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가 계속해서 아파왔으니 환각 같은 것을 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법을 쓰는 세계에서 환각을 보는 건 이상한 축에도 끼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뇌 창의 출력을 조금 줄일 걸 그랬나. 아니, 그랬으면 죽었으려나.

뇌 창의 출력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불만이었던 것은 하필이면 환각에 나온 인물이 카밀라였던 것이다. 저번에 나를 덮치려다가 실패하고 도망갔던 사람이 왜 내 환각에 나온단 말인가.

그녀에 대해서는 털 그은 만큼의 그리움도 가지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리움은 무슨. 다시 만나면 욕이나 퍼부어줄 심산이었다.

“........? 꼬마 아가씨. 나 보는 거 맞지?”

이제는 환각이 말도 거나 보다.

하긴. 판타지 세계인데 안될 게 뭐가 있겠어. 뇌 창을 쏘아낸 시점부터 나는 이 세계의 모든 가능성을 열었다.

“하아……….”

카밀라는 한숨을 푹 쉬더니 내 이마 위에 손을 올렸다. 그녀가 무언가 주문을 외우는 것 같아 보였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닫고 머리에서 손을 떼자 전보다는 훨씬 머리가 상쾌해진 것이 느껴졌다. 목캔디 3개를 한 번에 씹는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니 아까 카밀라가 내 이마 위에 손을 올렸을 때 그녀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한번 내 몸에 닿았던 손길이기에 기억해내는 것은 훨씬 쉬웠다.

“카밀라………?”

“....이제야 정신이 드나 보네.”

놀랍게도 내 옆에 서 있는 것은 진짜 카밀라였다. 카밀라는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 보였던 카밀라가 환각이 아니었나?

나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동안은 환각이라고 편하게 생각했던 것이 실재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니 생각이 꼬였다.

왜 여기에 왔지? 어떻게 여기에 온 거지? 분명 엘리사가 다신 못 들어오게 만든다고 하지 않았나? 하필이면 지금 내 곁에 나타난 이유가 뭐지?

여러 의문이 내 머릿속에서 충돌했다. 하나의 의문도 풀기 바쁜데 여러 개의 의문이 겹치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쩐 일이에요?”

내 첫 물음은 순수한 의문이었다. 갑자기 내 곁에 그녀가 나타난 이유를 듣고 싶었다.

“한번 들러봤는데 우리 아가씨께서 누워있더라고.”

“.....거짓말.”

거짓말이다. 이유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냥 내 감이었다. 카밀라는 내가 다쳤다는 것을 알고 있어 보였다.

정확한 추론은 할 수 없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 왠지 그런 것 같았다.

“눈치 하나는 빠르네.”

내 추측은 정답이었는지 카밀라는 어깨를 들썩이며 유감을 표했다. 표정은 하나도 안타까워 보이지 않았지만.

“그냥 병문안 온 거야. 우리 아가씨가 다쳤다는데 내가 안 와볼 수가 없잖아.”

“...............”

누가 ‘우리 아가씨’야. 팔을 휘저으면서 항의를 표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나아졌다고 해도 무리하게 팔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병문안이 목적이라는 카밀라의 말 자체는 사실 같아 보였다. 카밀라가 지금 나에게 온 이유를 생각해 보아도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고. 설마 환자를 강간하겠어?

설마……

“............여긴 어떻게 왔어요? 엘리사가 다신 못 들어오게 한다고 별의별 조처를 했는데.”

나는 몸을 카밀라 쪽으로 살짝 틀은 채로 질문했다. 전보다는 나아져서 살짝 몸을 뒤트는 것 자체는 문제 될 게 없었다.

“한번 왔는데 두 번을 못 오겠니?”

뭔가 괴도가 할만한 대답이 돌아왔다…….

뭔가 그녀만의 방법이 있는 것 같았지만 내가 물어본다고 알려줄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카밀라는 엘리사의 방비를 무시하고 이 옥탑방에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남의 도움 없이도 그럭저럭 등받이에 등을 기댈 수 있었다.

아직 오른팔은 움직이지를 못했지만, 왼팔은 웬만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조금만 지나면 왼팔의 깁스는 풀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우리 아가씨 많이 아파 보이네”

“.....누가 우리 아가씨예요.”

듣자 하니 어이가 없어 자동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나를 아가씨라고 불렀던 인물은 엘리사 뿐이었고, 아가씨라고 불러도 되는 인물 또한 엘리사 뿐이었다.

내 말이 뭐가 그렇게 웃기는지 카밀라는 나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그럼 우리 아가씨를 뭐라고 불러줘야 할까.”

“어……….”

막상 그렇게 물어보면 딱히 대답할 말도 없는데…….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카밀라는 살짝 실소하며 내게 말했다.

“우리 아가씨라고 불러도 딱히 상관없잖아. 안 그래?”

분명 기분이 나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외에 딱히 반론할 말을 찾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병문안 보러 온 사람에게 너무 따지는 것도 실례인가.

“그래도…….”

“그러면 소니아처럼 ‘자스민’이라고 불러줄까?”

“그건 좀….”

카밀라는 내 이름을 나긋하게 불렀다. 마치 서큐버스가 유혹하는 것과 같은 고혹적인 목소리였다.

순간적으로 몸이 흠칫할 정도로 그녀의 목소리는 아름다웠다. 금방 정신을 차리고 거절했지만, 카밀라는 흠칫한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나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카밀라에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솔직히 방금 그 말에 흠칫한 나 자신이 너무나도 쪽팔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나 너무 쉬운 거 아닌가.

나에게 그런 짓을 한 사람인데 욕을 하지 못할망정 놀아나고 있다니.

나는 다시 고개를 그녀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녀를 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 너무 뻔뻔한 거 아니에요?”

“뭐가?”

진짜로 모르겠다는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어이없었다. 다 알고 있을 텐데도 시치미를 뚝 떼는 모습은 나로서는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저번에 당신이 저한테 한 짓을 생각해봐요……”

처음에는 자신 있게 말하려고 했지만, 점점 말을 할수록 목소리는 작아져만 갔다. 카밀라의 얼굴을 바라보면 어쩐지 짜증을 내기 쉽지 않았다.

“아~”

카밀라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포즈를 취하고는 의자를 끌고 와 내 옆에 앉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내게 말했다.

“뭐 어때.”

“뭐 어때?”

나는 순간적으로 환청인 줄 알았다. 진짜로 환청이 아니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대답이었으니까.

솔직히 나는 그녀가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물론 그 사과가 진심일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과가 진심이든 아니든 나에게는 사과한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했다.

이렇게 뭐 어떠냐는 식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만 보면 내가 별것도 아닌 거로 사과를 요구하는 진상 같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따졌다.

“아니, 카밀라 당신이 나를 그……….”

“강간.”

“..........네. 강간.”

나는 그 단어를 입에 꺼내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카밀라는 식은 죽을 마시듯 내 앞에 그 단어를 들이밀었다.

“결국엔 안 했잖아.”

“‘못’한 거죠.”

“어쨌든. 결국에 나는 손가락 한번 넣어보지 못했—”

“진짜 미쳤어요??”

카밀라의 말에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와 대화를 하다 보면 내가 정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받았다.

오늘따라 그녀의 말이 거침이 없는 것 같았다. 어디서 술이라도 먹고 왔나.

“아가씨. 하나 물어봐도 돼?”

“네……. 뭐.”

“왜 아가씨 곁에 개새끼가 있는 거야?”

“그야…. 엘리사는 제 메이드니까요.”

“우리 아가씨 잘 모르나 보구나? 보통 술 먹고 주인을 강간하려던 것은 메이드라고 말하지는 않아.”

나는 그 말에 카밀라를 노려보았다. 지금 이 대화에 엘리사가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에요.”

“상관있지 그럼. 제 주인을 문 개도 데리고 다니는 아가씨인데 나는 뭐 어때서.”

“하지만 엘리사는 사과를—”

“용서했어?”

“.......네?”

“그래서 우리 아가씨는 그 메이드가 한 짓을 깔끔히 용서한 거야?”

나는 카밀라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물음에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사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같이 살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완전히 용서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답할 수 없었다.

머리는 ‘네’라고 하지만 가슴은 아직 불편한 감정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감정이 시간에 휩쓸려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땅에 굳게 박힌 돌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잖아.”

“...........”

“우리 아가씨는 사과하면 형식적이더라도 무조건 받아주겠지. 근데 그런 건 재미없잖아.”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카밀라의 말은 다시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무언가 가르침을 받은 것만 같아 신기한 기분이었다.

“물론 한번 하게 해주면 얼마든지 사과해줄게.”

“하………”

저딴 말은 빼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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