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시험(3)
* * *
몸이 굳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버려서 그 가만히 있는 것 조차 힘들었다.
어서 몸을 움직여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내 등을 지탱하고 있는 벽을 보니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벨리나를 아직은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울음소리를 내면서 흙바닥을 긁고 있었다.
아직 나에 대한 탐색을 하는 것 같았다. 지금은 서로 탐색하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저들은 나를 향해 달려올 것이 뻔했다.
내 앞에는 내가 땅에 내려놓은 가방이 있었다.
가방까지의 거리는 가깝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멀다고 할 수도 없었다.
저 가방만 있다면 저 자벨리나 정도는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되면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가 없었다.
긴장감.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나는 그 감각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누군가와 이런 신경전을 벌여야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부담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부담을 투덜거려봐도 내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나와 가방의 거리는 적지도 많지도 않았다. 전력으로 뛰어가면 저들이 나에게 닿기 전에 가방 안의 내용물을 꺼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여러 상황을 상상해보면서 나는 여러모로 상상해보았지만, 이대로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 지는 것은 내 쪽이었다.
이 상황을 만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내 추측으로는 몇 명의 용의자가 있었지만,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지금 나는 이 사건의 범인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일단은 이곳에서 살아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은 누군가가 나를 해하려고 만든 함정이었다. 갑자기 닫혀버린 길과 너무 알맞게 나타난 자벨리나. 남을 의심하려고 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의 함정이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 상황이 그저 우연일 뿐이라면 나는 자벨리나가 나를 짓밟으려고 해도 가만히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누군가가 조작된 광경이라면…….
나는 이대로 죽어줄 수는 없었다.
그냥 죽어주기에는 이 시험을 위해 나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 많았다. 엘리사, 소니아, 노엘……
나는 그들이 내게 배풀었던 것들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녔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의 걱정과 기대를 배신할 수 없었다. 이 시험이 끝나면 상관없지만, 최소한 이 시험이 진행되는 동안은 나는 죽을 수가 없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앞에 있는 가방을 향해 달렸다.
내 움직임을 보고 그들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땅이 살짝 울릴 정도로 매섭게 달려오는 그들은 철갑을 두른 기사와도 같아 보였다.
하지만, 내가 더 빨랐다.
나는 가방의 지퍼를 열고 공용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꺼냈다. 그동안 많이 써 왔던 탓인지 종이의 끝에는 내 손때가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최소한 죽지는 않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직 확실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나에게는 이것만 한 든든한 아군은 없었다.
나는 종이를 펼치고 마법진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종이를 잡는 손은 무척이나 떨렸지만 지금 그것을 신경을 쓸 상태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내 앞에 나를 해치려는 적이 있고, 나는 그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순식간에 얼음결정을 만들어 내었다.
아직 동시에 여러 개를 만들 수는 없었다. 여러 개를 만들면 위력이 약해졌다. 그나마 한 개를 제대로 만들 수 있는 게 나에게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만들어 낸 얼음결정은 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갔다.
나에게 다가오는 세 마리중 중앙에 있는 녀석의 머리에 정확하게 꽂혔다. 나는 그 순간 얼음 결정에 대한 조작을 풀었고, 그와 동시에 중앙에 얼음이 꽃인 자벨리나는 얼어버리고 말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그마한 얼음조각이 박힌 것 뿐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 얼어버렸을 것이다.
얼음결정은 내가 마나로 압축해 놓았기에 그 모양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가둬두던 원소를 풀면, 얼음결정은 순식간에 퍼진다.
움직이지 않는 자벨리나를 보아하니 속이 전부 얼어버린 게 아닐까.
자기 친구가 죽자 화가 난 건지 나머지 두 마리는 더욱 빠른 속도로 내게 다가왔다.
내가 그 둘 모두를 잡을 수는 없었다. 둘 중 한 마리만 잡는 것도 내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나는 오른쪽에 있는 자벨리나에게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겨눴다. 아까보다는 시간이 부족했지만 부족하지는 않았다.
퍽—
얼음덩어리가 자벨리나의 머리에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와 똑같이 나는 얼음결정을 제어하지 않았고, 자벨리나는 박제된 것 마냥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세 마리중 두 마리는 막을 수 있었지만, 마지막 한 마리는 막을 수 없었다.
“................!”
마지막 한 마리는 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나를 정통으로 치고 지나갔다. 나는 이를 악물고 자벨리나의 움직임을 끝까지 보려고 애썼다.
딱히 효과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래도 뒤로 몇 바퀴나 굴러버리고 말았다. 겨우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자벨리나는 다시 나를 향해 달려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재빠르게 나는 내 몸 상태를 파악했다. 엉망이 되어있을 것 같다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큰 부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생각하던 와중 내가 목에 매고 있는 목걸이가 생각났다.
엘리사가 나에게 선물해준 목걸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했었는데 이런 뜻이었나. 나는 새삼스럽게도 엘리사의 정성에 놀라고 있었다.
분명히 이 목걸이는 마법을 방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아티팩트 였다. 하지만 물리적인 충격에도 놀라울 만큼 충격을 흡수해 주었다.
지끈거리는 갈비뼈를 보아하니 완벽한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정도로도 이미 합격점이었다.
이제 자벨리나의 공격은 그렇게 무섭게 다가오지 않았다.
원래도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으나, 한번 공격을 받아보고 나니 이 정도는 충분히 받아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내가 꼭 쥐고 있었던 공용 마법진이 찢어져 버렸다.
이 마법진이 없으면 나는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일반인과 똑같아진다. 찢어진 종이에 마나를 불어넣어 보았지만, 마나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내 손에 쥔 종이를 땅바닥에 버렸다. 이 종이를 가지고 있어봤자 내게 이득이 될 것은 없었다.
내 근처에 있는 가방에 다가갔다. 내가 들고 왔던 가방에는 단순히 공용 마법진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것이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포션이었다.
그것도 길가에 널린 싸구려 포션이 아니라 노엘이 밤을 새우면서 만들어 준 포션이었다.
가방에는 여러 포션들이 들어 있었는데 그중 대다수는 내가 아는 포션이었지만, 몇몇 개의 포션은 처음 보는 포선이었다.
노엘이 내게 해가 되는 물약을 넣어 놨을 리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어느 한 포션을 집었다.
내가 집은 포션은 다른 포션보다 작아 한 손에 쏙 들어올 정도였다. 이 포션은 큰 충격을 받으면 큰 폭발을 일으킨다.
포션이라기보다는 액체 폭탄이었지만, 노엘은 어째서인지 똑같은 폭탄이라고 불렀다.
마치 수류탄 같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수류탄과는 원리부터 달랐지만, 폭발하는 작은 공 모양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수류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포션을 자벨리나를 향해 겨눴다.
“.....이건 뭐야?”
시험을 치기 하루 전날, 노엘은 가방을 내밀었다. 그녀가 준 가방은 내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별거 아냐.”
별거 아닌 거 치고는 지나치게 무거운데……
나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지퍼를 열어 살펴보았다.
가방 안에는 처음 보는 포션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물건들에 나는 노엘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 뿐만이 아니라 내 뒤에 있었던 소니아도 마찬가지였다. 소니아또한 어이가 없는 눈빛으로 노엘을 바라보았다.
“.......포션?”
“너무 많은 거 아니냐?”
소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한번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가방을 내려놓았을 때 쿵 하는 소리를 들어보았을 때 만만찮은 무게가 아님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그런가?”
노엘은 그렇게 말하더니 가방 안에서 몇몇 개의 포션을 빼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서 여러 개 준비했는데……. 생각해 보니 들고 가는 것도 힘들겠네.”
“싸구려는 빨리 빼라. 수준 떨어진다.”
“이거 하나하나가 부르는 게 값이거든?”
노엘과 소니아가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이렇게 많은 포션이 모여있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렇게 귀하디귀한 포션이 지금 내 눈앞에는 수산시장의 고등어처럼 흔해 보였다.
나는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내 머리가 진정되기를 바랐다.
“친구야. 이리 와봐.”
“어, 어……”
그때, 노엘이 나를 불렀다. 나는 바로 대답하고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가방에 담긴 포션은 전보다는 확연하게 줄었다.
그날 나는 노엘에게 가방에 있는 포션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시간상 전부 알려주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포션은 전부 알 수 있었다.
나는 자벨리나를 향해 포션을 던졌다.
자벨리나는 동시에 나를 향해 뛰어왔지만, 도중에 내가 던진 포션에 맞아 폭발에 휘말렸다.
콰앙—
내 예상을 뛰어넘는 폭발음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순식간에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연기는 나를 한참 동안 가만히 있게 만들었다.
눈을 떠 앞을 보니 포션을 던진 곳은 상당히 큰 크레이터가 생겨 버리고 말았다.
이 정도일 줄 알았으면 처음에 마법진 말고 포션이나 던질걸……
살짝 후회되었지만 개의치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남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날 때 가슴 쪽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아직도 내가 지나왔던 길은 열리지 않았다. 살짝 기대했었지만 역시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다니아하고 엘을 찾으러 가야 하나.
몸 상태를 체크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일단은 다른 조원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이 나에게만 일어난 것인지, 모두 겪은 일인지 알아야 했다.
나는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그들이 걸었던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발걸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숲 안쪽을 향해 3분 정도 걸었을 때 내 눈앞에 나타난 어떠한 존재 때문이었다.
외형은 자벨리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크기에 있어서 엄청나게 차이가 났다. 자벨리나는 멧돼지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눈앞에 있는 존재는 내 키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그 존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가방의 포션과 목걸이를 살폈다.
가방 안의 포션은 그대로 있었다.
“어……?”
하지만 내 목에 걸려있어야 할 목걸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내 목에 걸려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그 존재가 내게 달려왔다.
이번에는 피할 틈도 없이 그대로 모든 충격을 받아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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