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53화 (53/120)

〈 53화 〉 결정

* * *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역시나 나는 마법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종이에 마나가 스며든다는 것까지는 느껴졌지만, 그 이외의 현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예상했던 결과였기에 나는 종이에서 손을 놓았다.

내리깔고 있었던 눈을 들어 이사벨라를 봤다. 그녀는 흥미로운 것을 본 것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아무리 해도 마법진이 만들어지지 않아서요.”

“헤에……. 잠시만요.”

이사벨라는 씩 웃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어딘가로 향했다. 소리가 울릴 정도로 그녀는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

옆에 있는 소니아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어깨만 들썩일 뿐이었다.

어째 소니아가 아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괴짜 같은 면모가 있는 것 같았다. 아직 많이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소니아의 맘고생이 심했을 것만 같았다.

“...........”

“왜 그래.”

이사벨라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자 나는 소니아의 어깨에 기댔다.

이사벨라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계속해서 정자세로 있는 것도 힘들었다. 의자에 기대는 것보다는 소니아에게 기대는 것이 훨씬 편했다.

“.......그냥.”

나는 그냥이라고 둘러대며 소니아의 어깨를 빌렸다. 소니아 또한 별말을 하지 않고 묵묵하게 있어 주었다.

“소니아.”

“왜.”

“내가 할 수 있을까. 아까부터 그런 생각이 들어. 이 정도 온 것만 해도 나에게는 과분한 것이라는 생각 같은 거 말이야.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평생 꿈만 꿔왔던 마법을 실제로 써보기까지 했다. 이 정도까지만 해도 내 삶에는 과분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이사벨라가 오지는 않았지만 벌써 마음이 꺾이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

“............”

“넌 마법진을 찾을 수 있어. 내가 장담할게.”

소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편히 기댈 수 있도록 어깨의 위치를 맞춰주었다.

소니아의 이런 행동은 내 마음을 편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누군가가 나를 신경을 써 준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기에 이럴 때마다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왜 그녀가 소설의 주인공이었는지를 단번에 알 수가 있는 대목이었다.

이 정도로 스윗하면 누구라도 다 넘어오겠지.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네요.”

이사벨라는 자리에서 박차고 나선 뒤 30분 정도 지난 뒤에 돌아왔다.

그녀의 미묘하게 가쁜 숨소리를 보아하니 바쁘게 뛰어다닌 것 같았다.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형식적인 말이었지만 말이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마도.

“마음씨가 고우시네요. 감사합니다.”

이사벨라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이 가져온 것들을 책상 위에 펼쳐놓았다.

그녀가 펼친 것은 여러 종류의 마법진이 적힌 종이었다. 공용 마법진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부터 처음 보는 기상천외한 모양까지, 다양한 마법진들이 각각의 종이에 그려져 있었다.

“일단 이 마법진을 이용해서 마법을 사용해 보실래요?”

그녀가 전해준 마법진은 공용 마법진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마법진이었다.

“....어떤 마법이요?”

“아무거나요. 어떤 마법이든지 상관은 없어요.”

어떤 마법을 쓸지 고민하고 있을 때 소니아는 옆에서 충고해 주었다.

“그래도 원소 마법을 쓰는 게 좋을 거야.”

간단한 말이었지만 내게는 더 없이 힘이 되어 주었다.

원소 마법이란 4원소설처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한다. 흙, 풀, 불, 물 같은 것들 말이다.

원소 마법은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흔히 접하던 것이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도 습득하기 쉽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의 기본적인 마법의 실력을 평가할 때는 대체로 원소 마법을 쓰는 편이었다.

나는 마법진이 새겨진 종이에 손을 대고 마나를 흘려보냈다.

아까와는 다르게 마법진에 내 마나가 채워진다는 것이 느껴졌다. 마나가 제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마음 한구석에서는 뿌듯함이 채워졌다.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으면 작은 원소 덩어리를 만드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치징—

나는 가장 자신이 있는 얼음 원소를 만들었다.

여러 원소 덩어리들을 만들어 보았지만 내게 가장 잘 맞는 것은 얼음 원소였다. 나도 여름보단 겨울을 좋아했기에 내가 만든 얼음 원소들을 좋아했다.

“헤에……”

이사벨라는 내가 만든 얼음 원소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는 내가 만든 원소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인가 걱정했지만, 그녀의 미소를 보아하니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자스민씨. 혹시 얼음 결정은 몇 개까지 만들 수 있으신가요?”

“......아직 끝까지 해보지는 않아서 모르겠어요.”

“그러면 여기서 한계까지 만들어 보시겠어요?”

“여기서요?”

“네. 여기서요.”

나는 걱정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결정들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면 벌어질 일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원소 덩어리들은 각각의 원소가 압축되어있는 상태였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아무리 재능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무시할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원소 덩어리들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술사의 부담이 늘어난다. 여러 개의 원소들 중 하나의 원소만 통제에 실패해도 압축되어있는 원소가 터져 나오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 있었다.

이것이 원소 마법이 입문은 쉬우면서도 숙달하기는 어려운 이유였다. 하나의 원소를 생성하는것은 쉬웠지만, 여러 개의 원소를 다루는 것은 꽤나 난이도가 있었다.

지금 내가 얼음 결정을 여러 개를 만들다가 한 번만 삐끗해도 이 주위의 책들이 얼음으로 뒤덮여 버릴 게 뻔했다.

아카데미에서는 이런 문제점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예방책을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공용 마법진이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사용하는 마법진은 원래의 공용 마법진에 비해 출력이 약화된 버전이었다.

아카데미의 마법진은 초심자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2개 이상의 결정을 만들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카데미의 마법진이 아니었기에 나는 선뜻 이사벨라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최상의 마법사인 소니아씨하고 엘프인 제가 있는데요 뭘. 자스민씨의 결정 정도는 통제할 수 있어요.”

“아…….”

그녀의 말에 나는 자신 있게 결정을 더 만들어 보았다.

작은 얼음덩어리를 만든다고 생각하고 마나를 차갑게 만들면……

칭—

만들었다. 전에 한번 해보았던 거지만 두 개까지는 쉽게 만들 수 있었다. 그 이상은 내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영역이었기에 문제였지만.

셋.

넷.

다섯.

결정 다섯 개 까지가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다섯 개마저도 지금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이게 한계에요.”

“그러면 인제 그만 하셔도 돼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나는 흘려보내던 마나를 끊었다. 이렇게 많은 마나를 사용하고, 활용까지 한 적은 처음이었기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스민씨 제 생각보다 훨씬 마법에 재능이 있으시네요.”

“그, 그래요?”

“네. 이 정도면 웬만한 인간 마법사는 제칠 수 있는 재능이네요.”

이사벨라의 말은 의외였다.

나한테 재능이 있다니. 지금까지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녀에게 듣는 칭찬은 낯설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엄청 기분이 좋았다.

마치 소니아가 내 머리를 쓰다듬을 때의 기분 같달까. 아무튼 입가가 계속해서 풀어지는 게 나쁜 기분은 절대 아니었다.

“그럼 다음 걸로 해볼까요.”

이사벨라는 내게 수많은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내밀면서 마법을 사용하게 했다.

어떤 마법진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내가 사용하는 마법의 효율이 달라졌다.

어떤 마법진은 마나가 적게 들었고, 어떤 마법진은 다른 마법진들보다 결정의 크기가 크게 만들어졌다.

마법진에 따라 내가 사용하는 마법의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니. 새로운 정보였다.

“흐음……. 이 정도면 된 것 같아요.”

이사벨라는 마구잡이로 펼쳐놓았던 종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러 번 마나를 소비했기 때문인지 머리가 상당히 어지러웠다. 술을 먹은 것처럼 머리가 무겁고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를 않았다.

“으아…….”

아까 그런 했던 것처럼 나는 소니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나마 소니아에게 기대고 나니 좀 괜찮은 것 같았다.

“아까부터 생각한 거지만 두 분, 사이가 정말 좋으시네요.”

“하하….”

종이를 정리하던 이사벨라는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힘이 빠진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소니아씨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어깨를 내주는 것은 처음 보거든요.”

“그래요?”

“네. 소니아씨는 보통 까탈스러운 게 아니라서 누군가 자기 몸에 닿는 것을 싫어했거든요. 오죽하면 소니아씨가 인간을 혐오한다는 소리까지 나왔을까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문제의 원인이나 말해.”

누군가에게 소니아의 옜날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조금 더 듣고 싶었지만, 소니아의 개입으로 접을 수밖에 없었다.

노엘한테 물어봐야 하나.

“일단 대충 원인은 알아낸 것 같기는 해요.”

이사벨라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소니아를 쳐다보았다.

“소니아씨. 잠시만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내가 왜.”

“잠깐 단둘이 할 얘기가 있어서요.”

“............”

소니아는 그녀의 말을 따르고 싶어 하지는 않았지만, 한숨을 푹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그녀의 어깨가 없어지자 다시 머리가 어지러워 지는 것 같았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이사벨라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 맞다. 마나를 많이 사용해서 어지러우시죠?”

그녀는 내 머리 쪽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아까까지만 해도 어지럽던 머리가 훨씬 나아진 것이 느껴졌다.

“아…. 감사합니다.”

“뭘요. 제가 감사해야 하는걸요.”

이사벨라는 눈을 빛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 은은한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뭐예요?”

“.........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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