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52화 (52/120)

〈 52화 〉 도서관

* * *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딘가로 걷고 있었다. 그녀의 산뜻한 발걸음을 보아하니 그녀가 꽤나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요즈음 소니아는 죄책감에 얼굴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으나 소니아에게는 카밀라를 놓친 게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저번에는 술을 먹으면서 밤을 새운 적도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때 노엘의 옷에 토를 해 버려서 노엘과 내가 꽤나 고생했었다.

그 뒤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대로 잠들어 버려서 내가 그녀를 어떻게든 끌고 가서 수업을 듣게 했다.

소니아에게 아카데미의 출석 같은 건 의미가 있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것은 내 욕심이기도 했다.

솔직히 소니아가 아니면 나와 수업을 같이 들을 사람은 없었기에 나는 소니아를 힘겹게 끌고 오더라도 수업을 듣게 했다.

지금은 그런 모습은 볼 수 없을 정도로 정상적인 모양이었기에 나 또한 같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소니아의 기분 좋은 모습을 볼 수 있다니, 그동안 고생한 나에게는 그녀의 그런 모습만으로도 행복이라 할 수 있었다.

“소니아.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가보면 알아.”

소니아에게 우리가 향하는 목적지에 관해 물어도 그녀는 정확한 대답을 해 주지는 않았다.

곧 알게 될 거라는 말만 할 뿐 그녀는 그 어떤 힌트도 내게 주지를 않았다.

소니아가 내게 해가 되는 곳으로 데려갈 리가 없지.

나는 그렇게 믿으며 그녀의 뒤를 졸졸 따랐다. 소니아의 발걸음에 맞춰 걸으며 그녀와 같은 눈높이를 맞추려고 애를 썼다.

그녀가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고 있는 세계는 내가 보고 있는 그 이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은 정확하다고 할 수 있었다.

소니아는 내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소니아…… 여기 궁전 아니야?”

“맞아. 제대로 봤네.”

소니아가 나를 데려간 장소는 궁전이었다.

궁전.

군주나 왕족이 일을 보고 생활하는 건축물을 말한다.

고개를 위로 들어야 볼 수 있는 곳인 궁전은 내가 그동안 봐왔던 그 어떤 건물보다 큰 규모를 자랑했다.

궁전이라는 곳의 뜻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규모를 실감하게 되니 할 말이 없어지는 수준이었다.

테오도르라는 작은 도시에서 이렇게 커다란 건물을 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동안 멀리서 봐왔을 때부터 크다고 느꼈지만, 눈앞에서 보게 되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궁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경비병이 있었다.

근엄하고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지만 소니아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걷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바짝 따르며 소니아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다.

소니아는 그 왕국의 경비병도 쉽게 돌파했다. 허무할 정도로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수고해라.”

경비병들은 소니아를 알아보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길을 터주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나라는 인물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너무 쉽게 들어가네.”

“한두 번 온 게 아니라서.”

소니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내 물음에 답했다.

실제로 그녀는 궁전을 제집 드나드는 것 같이 거닐고 있었다.

“내가 여기 와도 되는 거 맞아?”

“걱정하지 마. 내 옆에만 있으면 여기서 너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믿음직한 말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내가 믿을만한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기에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커다란 도서관이었다.

“여기가 혹시……”

“맞아, 아슈르 도서관.”

아슈르 도서관은 이 대륙에서 유명한 도서관 중 하나인 곳이다.

테오도르의 초창기에 지어져 지금까지 건재한 이곳은 가장 오래된 도서관이기도 했다.

아슈르라는 이름은 아이리스의 동료 중 하나의 이름이라고 한다.

전부터 한 번쯤 와보고 싶었지만 올 수가 없었다. 이곳은 한 해에 일정 기간만 개방한다고 한다.

분명 소설에서는 이런 제한이 없었던 것 같았기에 나로서는 아리송한 부분이었다.

소설과 지금 내가 있는 세계는 많이 달라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도서관의 제한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우리가 들어온 통로는 내가 알던 통로가 아니었다. 내가 알던 정문이 아닌 궁전과 이어져 있는 또 다른 통로였다.

이런 통로가 있었구나. 도서관이 궁전하고 가깝게 붙어있는 게 신기한 것 같았다.

아슈르 도서관은 내가 그동안 보았던 그 어떤 도서관보다 넓고 웅장했다.

4~5층의 높이의 천장은 까마득해 보였다. 천장뿐만이 아니라 도서관 자체의 넓이도 상당했다.

아카데미의 건물 하나를 상회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다른 건물에 가려져 있어 몰랐었는데 이런 식으로 알게 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책들의 수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이곳에 평생을 바쳐도 다 읽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을 정도니 말이다.

“멍하니 뭐 하고 있어.”

내가 도서관을 망하니 보고 있으니 소니아가 웃으면서 머리를 만졌다.

“ㅇ, 아. 처음 와본 거라 신기해서.”

“처음이야?”

“어.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어.”

“흐응.”

소니아는 계속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고 싶으면 말해. 언제든 데려다줄게.”

“진짜?”

그녀의 말에 나는 바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진짜.”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지만 한 가지가 걸렸다.

소니아에게도 이 도서관에도 민폐인 것 같아 꺼려졌다. 소니아를 내 욕심 때문에 힘들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 도서관에도 내가 너무 자주 드나들면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에 내가 막 드나들어도 괜찮을까?

“괜찮아.”

“어?”

“어차피 여기에 드나드는 사람은 별로 없어서 신경 안 써도 돼.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내 고민을 알아차렸는지 소니아는 그렇게 말해주었다.

괜찮은 걸까.

계속해서 생각해 보았지만 그럴듯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답을 내뱉었다.

“...고마워.”

“그래.”

내 감사 인사에 소니아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도서관의 중앙 쪽으로 가니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아마 사서 같아 보였다.

책상에 엎어진 채로 자고 있었기에 정확한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하얀색 베레모를 쓰고 있었기에 더더욱.

소니아는 망설임 없이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대로 팔을 들어—

“흐에엑!”

일어났다.

일어난 모습을 보니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양 갈래로 땋은 밝은 갈색의 머리는 귀엽다고 느끼게 하였다.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그녀의 옷차림을 더욱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어깨의 걸친 새하얀 레이스 케이프와 화려한 장식이 되어있는 케이프는 그녀를 비범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진한 남색의 옷은 밤하늘 같았다.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지만 그렇기에 그녀의 신비로움이 부각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사실 그녀가 신비로워 보이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귀 때문이었다.

그녀의 귀는 일반 사람들과 달랐다. 마치 엘프처럼 길고 뾰족한 귀를 하고 있었다.

내 생에 엘프를 보게 되는 날이 오다니. 나는 그대로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니아를 노려본 다음 안경을 찾아 썼다.

“소니아씨. 왜 때려요!”

“자고 있지를 말던가.”

소니아는 그녀의 투정을 가볍게 맞받아쳤다.

“무슨 일이에요? 평소에는 오라 해도 보이지를 않더니.”

“얘 좀 봐달라고 하려고.”

“어, 어?”

소니아는 뒤에 있던 나를 끌고 와 그녀의 앞에 놓았다. 나는 놀라 움직이지도 못했다.

“이 사람은……”

“마법진을 찾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거든. 네 눈으로 한번 보면 문제가 보일 수도 있으니까.”

소니아의 설명을 들은 그녀는 씩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헤에……. 아무리 들었어도 신기하네요.”

그녀는 내 손을 만지거나 볼을 꼬집으면서 나를 이리저리 만졌다.

나는 그녀의 행동에 당황해 뻣뻣하게 서 있었다.

“이상한 짓 좀 하지 마라.”

그녀의 이런 이상한 행동은 소니아의 제지가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녀는 심통 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틀어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임시로 아슈르 도서관의 사서를 맡은 이사벨라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자스민이라고 합니다….”

이사벨라는 친절한 태도로 나를 대해주었다.

“마법진을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고 하셨죠?”

“네….”

“일단은 앉아서 얘기할까요?”

아사벨라는 나를 비어있는 책상으로 안내했다. 의자를 빼고 나와 이사벨라는 마주 보며 앉았다. 소니아는 내 옆에 자리했다.

“제 귀를 보고 아셨겠지만 저는 엘프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펼쳤다. 펼친 손안에는 얼음 결정이 펼쳐져 있었다. 마법진이 없음에도 말이다.

신기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이사벨라는 내 시선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엘프는 인간과는 다르게 마법진이 없어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요. 애초에 마법을 ‘사용한다’는 개념이 틀리긴 하지만요.”

“인간과 엘프가 다른 점은 여럿 있지만 그중 하나가 눈이에요.”

“......눈이요?”

“네. 엘프의 눈은 여러 가지 것을 볼 수 있거든요. 마나, 시간 등등의 것들 말이에요.”

옆에 있었던 소니아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여기로 널 데려온 거야.”

“그럼 제 앞에서 한번 마법진을 만들어 보시겠어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곳에서 수업 때 받았던 머크나무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그동안 시도한 것처럼 종이에 마나를 집어넣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