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부적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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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아와의 긴 식사 시간을 가진 뒤로 많은 몇 주가 흘렀다.
그 뒤로도 소니아는 카밀라의 흔적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그럴듯한 성과는 거두지 못하는 것 같았다.
노엘은 그때의 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좋은 경험이었다.’라는 말로 퉁쳐버렸다.
소니아는 그 일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다. 노엘은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소니아를 보고 한참을 놀려대었다.
물론 그러다가 소니아에게 한대 세게 맞아버리고 말았지만.
엘리사와의 관계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대로였다.
좋게 말하면 더 악화하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동안 해오던 것처럼 식사를 준비해주고 내 옷들을 세탁해 주었다.
이제는 내 삶에 일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동안은 자취했었기에 혼자 사는 법을 알고 있었지만, 엘리사와 함께 있으니 혼자 어떻게 살았는지 까먹을 정도였다.
나쁜 점은 나와 엘리사 사이에 진전이 없다는 거였다. 엘리사가 카밀라에게서 나를 구해주고 난 뒤, 나와 엘리사의 관계에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엘리사는 대부분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카밀라하고 언제 만났냐, 그때 머리카락이 빛났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 너는 카밀라가 벌이고 있는 일에 대해 알고 있느냐 등등….
엘리사는 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엘리사의 그런 태도는 내 속을 더욱더 타게 했다.
나는 엘리사가 나를 덮쳤던 그때 이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그것을 위한 거라면 엘리사가 나에게 한 짓은 모두 잊어줄수 있었다.
진심이었다. 나와 가까웠던 누군가가 나에게 거리를 둔다는 사실이 내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엘리사에게 아무리 대화를 시도해 본다고 한들 엘리사는 그대로였다. 내 간절함이 그녀에게는 조금도 닿지 않은것 같아 내 속은 점점 타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이런 지지부진한 관계에 지쳐버리고 말았다. 내가 아무리 신경을 써도 엘리사와의 관계가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순서였다.
요즘 나와 엘리사간의 대화는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다녀올게.”
“예. 잘 다녀오십시오.”
“.........그래.”
이런 식으로 말이다. 어찌 보면 이런 게 귀족과 메이드의 보편적인 관계 일수도 있었다.
그동안 내가 엘리사에게 너무나 살갑게 대한걸 수도 있었다. 내가 그녀와 너무 가깝게 지내려고 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어두웠던 밤.
이곳에 온 첫날 밤.
이 세계에 오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 속을 드러내었던 그날 밤.
나는 엘리사의 품에 안겨 그녀의 위로와 격려, 그리고 다짐을 들었었다. 그녀의 따뜻한 심장박동과 함께 말이다.
그날 밤이 내가 이 세계에 와서 가장 푹 잘 수 있었던 밤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엘리사는 딴사람 같았다.
그날 밤 나만을 바라본다고 자신 있게 말하던 사람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다시 한번 그때의 따뜻함을 느껴보고 싶었다. 엘리사가 나를 봐줬으면 좋겠다. 어린아이의 투정 같은 말이지만 그만큼 나는 굶주려 있었다.
그동안 진행되었던 수업의 진도는 그동안 말해왔던 것처럼 살인적이라 말할 수 있었다.
원래 예정되어있던 수행평가는 모두 평범한 강의로 대체되었다.
수행평가에는 발표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나는 나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발표를 하는 것은 쥐약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불쾌하게 생각하는 나라는 사람에게 발표는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수업의 홍수에서 다행인 수업이 있었다.
바로 역사학이었다. 그동안 역사책을 많이 읽었던 보람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아직 역사학은 그동안 큰 역사의 줄기를 훑는 과정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겉핥기로 읽은 역사책들은 내게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한 번에 뭉탱이로 머리에 들어오는 지식은 오래 기억되지 않지만, 원래부터 꾸준히 머릿속에 집어넣었던 지식은 오랫동안 남는 법이었다.
아카데미에 오기 전에 읽었던 책들은 내게 이 대륙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2학기가 되면 더욱 힘들어지겠지만 뭐, 그건 그때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엘리사의 관계는 그대로였지만 그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것들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듣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수업이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가는 수업은 이 아카데미에서 가장 중요한 수업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바로 자신만의 마법진을 발견하는 수업이었다.
그동안 마법은 공용 마법진으로 연습했지만, 이제는 자신만의 마법진을 습득하게 된다.
사람에게는 모두 자신의 영혼에 맞는 마법진이 있다. 각각의 사람들은 모두 고유의 마법진이 존재했다.
모든 사람의 마법진은 큰 원 모양인 것은 같았지만, 그 안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최초로 마법을 사용한 아이리스는 안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원의 띠만 존재했다고 한다.
그녀는 마법진이 원래 이런 모양인 줄 알았지만, 그녀의 제자들부터 그녀와 달리 원 안에 다른 모양들이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마법진을 발견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쉽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용 마법진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면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쉽다고 한다.
왜냐하면 마법진을 말 그대로 ‘발견’하는것 이기 때문이다. 이미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마력을 내뱉기만 해도 마법진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과연 내 마법진은 어떤 모양일까?
자스민과 같은 모양일까, 아니면 전혀 새로운 모양일까.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 자신이 판타지 세계에 와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판타지 세계라는 것을 자각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일까, 이런 기회에 내 가슴은 엄청나게 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여러분은 훌륭하게 마법을들 시전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르셀린 교수의 음성이 강의실에 울렸다. 그녀는 긴 막대기를 휘두르며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지팡이를 휘두르는 궤적을 따라 공중에 선이 그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평범한 지팡이는 아닌 것 같았다.
이 수업을 마르셀린이 강의한다는 말은 듣지 못한 것 같은데……
그녀와 여러 번 충돌이 있었기에 나는 그녀와 마주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었지만.
물론 이 강의실에서 마르셀린 교수를 꺼려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마르셀린을 눈으로 좇을 수 밖에 없었다.
원래라면 소니아에게 말을 걸면서 투덜댔겠지만, 아쉽게도 내 옆에 소니아는 없었다.
소니아는 어제 수업 내용을 듣더니 ‘자신에게는 필요 없다.’라고 말하면서 이번 수업에 불참을 선언했다.
내가 같이 가달라고 조르면 같이 들어줄 것 같기는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혼자 수업을 듣는 것이 엄청 쪽팔린 것도 아니니까.
“이제는 여러분 스스로의 마법진을 찾을 시간입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종이를 펼치세요.”
그녀의 말에 내 앞에 말려있던 종이를 펼쳤다. 공용 마법진이 그려져 있던 그 종이와 같은 재질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종이 위에는 아무런 그림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 종이는 평범한 종이가 아니었다.
남쪽에 존재하는 열대우림에서 자라는 특수한 나무를 이용해 만든 귀한 종이었다.
머크 나무라고 불리는 이 나무는 마나에 민감하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비와 번개가 치는 이 대륙의 열대우림에서 살아남기 위해 머크나무는 마나을 모조리 흡수하는 쪽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번개가 나무에 내리치더라도 영양분으로 삼아 삶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머크나무는 마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흡수하는 성질이 있었기에 공용 마법진을 새겨넣는 데 쓰이게 되었다.
“이 종이에 여러분의 마나를 집어넣으시면 됩니다. 마나로 둥근 원을 만든다고 생각하면서요.”
“자신의 마법진이 새겨지면 제 앞으로 와 저에게 보여주시면 됩니다. 제가 확인하면 종이를 가지고 나가시면 됩니다.”
마르셀린 교수답게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그녀의 말에 의욕이 붙었는지 종이에 손을 갖다 대고 마나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모습을 쓱 둘러본 다음, 종이에 마나를 집어넣어 보기 시작했다.
원을 그리는 느낌이라…….
마나를 가지고 피자를 만들듯이 원을 그리는 상상을 하며 종이에 손을 갖다 댔다.
소설에 적혀있는 묘사에 따르면 마나를 집어넣으면 손안에 따뜻함이 느껴지면서 그려진다고 했다.
그 묘사를 참고하면서 나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종이에 마나를 넣는 것 까지는 쉽게 진행되었지만, 종이에 마법진이 새겨지지는 않았다.
몇 번을 해 보아도 마법진이 생길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강의실에 있는 학생들은 하나둘씩 검사를 맡고 강의실을 나서는데 나만 그대로였다.
이윽고 넓은 강의실에 나 혼자만 남아버리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나와 마르셀린 교수만.
이 넓은 강의실에 혼자남은 학생인 나를, 마르셀린 교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베어 버릴 것 같았기에 빨리 이 자리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과는 다르게 미동도 하지 않는 종이가 미웠다.
“하아……”
마르셀린의 한숨이 들려왔다. 그녀의 한숨 소리에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뚜벅뚜벅—
그녀는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가 문제야?”
“..........”
그녀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남들이 봐도 한심해 보이겠지. 다들 10분 안에 해내는 것을 지금까지 붙잡고 있으니까.
나는 고개를 내리깔고 조그마하게 말했다.
“....모르겠어요.”
“뭐?”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지금 그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대충 예상이 갔다. 아마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겠지.
그녀는 대뜸 내 팔을 잡았다.
나는 놀라움에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뭘 보냐는 듯이 사납게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 한 번 더 해봐. 내 앞에서.”
나는 그녀의 말대로 한 번 더 종이에 마나를 집어넣었다.
1분, 2분, 3분……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종이에는 어떠한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허……”
마르셀린은 꽤나 당황한 것 같았다. 그동안의 교수 생활 동안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일까.
“.....소니아는 어디 갔어.”
“네?”
“니가 옆에 붙어 다니는 소니아 말이야. 걔라도 있으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오늘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나오지 않았어요.”
“지랄 났네.”
마르셀린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일단 오늘은 가봐. 원인을 모르는 이상 여기서 이러는 건 아무 도움이 안 돼. 그 종이는 가지고 가고.”
나는 그녀의 말에 종이를 챙겨 강의실 밖으로 밖으로 나갔다.
허탈감과 패배감이 내 몸을 감았다. 다리가 무거웠다.
좀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죽고 싶다.
그냥 지금 조용히 자살하고 싶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