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빵
* * *
옥탑방으로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침의 더위는 거짓말같이 사라진 지금, 느껴지는 건 시원한 바람뿐이었다.
태양은 감쪽같이 자리를 비우고 달과 별이 그 자리를 꿰찼지만 그들은 태양만큼 밝지 않았다.
곳곳에 켜져 있는 가로등을 보면서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내 발걸음이 가벼워진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소니아와 노엘에게 어젯밤 있었던 일을 밝힌 일이 그 이유였다.
밝히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나는 그들을 믿고 어젯밤의 사건에 대해 입을 열었다.
반응들은 제각각이었다.
노엘은 내가 얘기를 할 때마다 계속해서 실소를 내뱉었다. 엘리사의 머리카락 색이 밝아졌다는 부분을 얘기할 때 소니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등을 뒤로 당겼다.
엘리사의 머리 색깔이 변한 것이 내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았다.
웬만한 부분에는 웃으며 넘어가는 노엘이 이렇게 반응할 정도니, 말이다. 노엘은 이후에도 찬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심란한 마음을 나타냈다.
소니아는 겉으로 보면 노엘보다 얌전하게 듣는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노엘은 중간부터 어이없어했지만, 소니아는 카밀라가 나를 덮쳤을 때부터 주먹을 꽉 쥐었다.
처음에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기에 그리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녀의 주먹을 본 뒤부터는 그녀가 분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니아 같은 경우에는 표정이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기에 나중에는 더 무서웠다.
주먹은 피가 날 것같이 쥐고 있으면서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는 것이 내게는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내가 어젯밤의 일에 말을 하기 꺼려졌던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나를 지금과는 다르게 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덮치려는 적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일어났다. 두 사건 모두 내가 가장 잘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내가 기폭제가 된 것은 맞았다.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있었다.
나라는 인간에게 잘못이 있기에 당하는 거로 생각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 말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고말고.
그런데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엘리사가 나를 덮쳤을 때부터, 그리고 오늘 아침부터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불안했다.
인간관계에 관한 거라면 더더욱.
노엘과 소니아는 이 세계에 둘밖에 없는 내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들과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들이 내게 잘못하더라도 나는 그들에게서 멀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떻게 얻은 인연인데, 나만 용서하면 되는데, 나만 넘어가면 그대로 있을 수 있었다.
그러니 나는 그들이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이것은 그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엘리사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카밀라마저도.
이 정도면 나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결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선녀지.
다행히도 그들은 나를 평소와 다름없이 대해 주었다.
단순하게 말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것이 느껴졌다.
그들이 대하는 말투나 행동에서 평소와 그리 다른 점은 없었다. 물론 평소보다 내 기분을 더 신경을 써주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것은 괜찮았다.
그렇기에 옥탑방을 걸어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소니아, 저 빵 맛있어 보이지 않아?”
“.....네 돈으로 사 먹어라.”
“야박하네…… 서러워 죽겠다 야.”
“죽어, 그냥.”
기분 좋은 날씨, 후련함 그리고 내 뒤를 따라오는 내 친구들 덕분에.
내가 돌아가겠다고 말하니까 노엘과 소니아는 나를 따라나서 주었다. 내가 괜찮다고 했지만, 그들은 기꺼이 나와 같이 가겠다고 말해 주었다.
옥탑방까지 돌아가는 길이 심심하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그들과 같이 돌아가는 중이었다.
옥탑방에 들릴 거냐고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가는 김에 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들이 할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그들은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나중에 헤어질 때 한 번 더 물어볼 생각이다. 그러면 힌트라도 알려주겠지.
“친구야, 저기 빵집 맛있어 보이지 않아?”
“어디?”
“저~기.”
노엘이 가리킨 곳에는 작은 빵집이 있었다. 노란색 간판이 달린 빵집이었는데, 가게 안의 조명도 노르스름해서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빵집과는 살짝 거리가 있었지만 희미하게 냄새가 퍼져왔다. 무척이나 포근하고 푹신한 냄새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과자만 먹고 제대로 된 식사는 하지를 못했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위장은 음식을 달라는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오늘 점심도 굶어서 그런가 저 빵집의 유혹을 떨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맛있어 보이네……”
그리고 나는 매우 어려운 일은 하지 않는 주의였다.
우리는 곧장 빵집으로 걸어갔다.
빵집으로 갈수록 향기로워지는 향기에 우리들의 발걸음은 계속해서 빨라져만 갔다.
“어서 오십쇼~”
주인의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빵집 주인은 꽤나 나이가 들어 보였다.
주름진 피부와 하얀 수염은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빵집 안은 밖에서 보았던 것처럼 따뜻한 분위기였다.
카운터 뒤편에 있는 오븐에서 전해져오는 열기와 노란 조명이 합쳐지니 따뜻한 사람의 품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각자 빵을 골랐다.
소니아는 식빵을 하나 골랐고, 노엘은 소보루빵을 하나 집었다. 그리고 나는….
“이야…. 친구야 진짜 그걸 다 사게?”
“어, 어……. 왜?”
나는 맛있어 보이는 것들을 하나씩 골랐다. 식빵, 소보로, 크림, 팥 등등…….
괜찮아 보이는 것들을 모두 바구니에 고르니 바구니가 꽉 차버리고 말았다.
“네가 다 먹기에는 너무 많지 않아?”
“엘리사가 먹을 거까지 고른 거야.”
“.........어휴.”
노엘은 그런 나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살짝 한심하다는 반응이었기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왜?”
“.....아냐.”
노엘은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뭐 이상한 짓이라도 했나?
스스로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던 것 같은데…….
“여기요.”
내가 속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는 새에 우리가 고른 빵을 전부 노엘이 계산해 버리고 말았다.
“어. 내가 계산하려고 했는데…….”
“됐어. 너는 그 돈으로 너 집이나 수리해.”
노엘은 그렇게 말하며 봉지에 자신이 고른 빵을 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덜 고를걸. 갑자기 후회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당연히 내가 살 줄 알았기에 남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고른 건데, 노엘이 전부 지불하다니.
내가 노엘에게 부담을 준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노엘을 미안한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노엘은 괜찮다고 말하면서 내 머리만 쓰다듬을 뿐이었다.
나는 내 봉지에 담긴 빵을 노엘과 소니아에게 하나씩 건넸다.
그들은 거절하려고 했지만 내 완강한 의견에 빵을 하나씩 받아 갔다.
우리는 길을 걸으면서 빵을 입에 넣었다. 빵의 향기로운 냄새를 계속해서 맡다 보니 돌아가서 먹는 건 살짝 무리 같았기 때문이었다.
“음…. 으음… 맛있네….”
“....그러게. 가서 사길 잘했다.”
“.......”
우리는 각자의 감상을 말하면서 옥탑방을 향해 걸어갔다. 달과 별을 보며 먹는 따끈따끈한 빵은 별미 중의 별미라고 할 수 있었다.
어느덧 내가 사는 건물 앞까지 와 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잘 있어.”
“.....그래.”.
“친구야, 이번에는 함부로 문 열어주면 안 된다?”
“안 그럴 거라고…….”
그들은 나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어딘가 가는 모양새였다. 그들이 어디를 가려는지 알아내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애들아 어딜 가려는 거야?”
“......친구야. 나중에 알려준다니까.”
노엘은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노엘은 어렵나. 노엘은 은근히 칼 같은 면이 있어서 안 된다고 하는 부분은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알았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정반대였다.
“소니아……. 알려주면 안 돼?”
나는 소니아에게 매달렸다.
소니아는 냉정해 보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단호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물론 모든 것에 해당하는 건 아니고 조금 정을 붙인 상대에 한정하지만.
어쨌건, 소니아는 실제로 내 물음에 말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안돼?”
“그………”
소니아는 노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허락을 맡으려는 거겠지.
노엘은 웃으면서 고개를 까딱했다. 허락의 의미였다.
“하…… 우린 카밀라를 잡으러 갈 거야.”
“카밀라를?”
“어. 나 하나로는 힘들지만 노엘이 있으면 해볼 만해.”
소니아가 꺼낸 이야기는 갑작스러웠다. 카밀라를 잡으러 간다니.
나는 소니아에게 물었다.
“왜…?”
“네가 전에 카밀라가 있던 자리에 은색 빛이 남아있었다고 했지. 그건 그녀가 무리했다는 증거야.”
“안 그래도 이 도시에서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던데 겸사겸사 그것도 막아야지.”
노엘은 소니아 어깨의 손을 얹고 웃으며 말했다.
카밀라가 무리를 했다니.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는데…….
뭐, 내가 아는 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소니아가 훨씬 잘 알겠지.
나는 그들을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이 카밀라라고 하니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지금 카밀라를 마주하는 것은 내게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소니아도 이런 내 모습을 보았는지, 내 어깨를 잡고 내게 말했다.
“별일 없을 거야. 가서 쉬어.”
“그래, 친구야. 지금 네가 가봤자 더 힘들기만 할걸?”
나는 그들의 진심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친구들을 슬프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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