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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45화 (45/120)

〈 45화 〉 역사

* * *

“하……….”

교실에서 나온 소니아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머리를 박박 긁으며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걸음을 걸을수록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은 기분에 그녀는 갈수록 신경질적으로 복도 바닥을 밟았다.

시발.

머리로 욕을 되뇔수록 울 것 같던 자스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무너질 것 같은 모습은 소니아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분명 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뒷골목에서 가만히 비를 맞고 있었던 그날, 소니아는 자스민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가냘프고 연약한 그 눈동자는 자신의 받아들인 듯 평온했다.

그 눈빛이 꼴 보기 싫었다. 나이 얼마 먹지도 않은 꼬맹이가 그런 눈빛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반강제로 집에 끌고 갔었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자스민의 집에 그녀를 보러 찾아갔다. 점점 나아지는 게 눈에 보였기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방금 그 반응은 그때보다 최악이었다. 그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시발. 담배, 담배 어딨어.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확인했다. 곧 있으면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지금 수업을 듣고 싶지 않았다.

소니아는 아카데미를 나와 한적한 공원에 앉았다. 인적이 드문 공원이라 그런지 주변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무가 무성히 자라 따가운 햇빛은 가려져 시원한 바람만이 불어오고 있었다.

소니아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꽉 차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한 개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돛대. 자동으로 얼굴이 찡그려진다.

“..........좆같네.”

소니아는 욕지거리를 내뱉고 돛대를 입에 물었다. 빈 담뱃갑은 구겨서 풀숲에 던졌다.

자스민이 있을 때는 주머니에 넣거나 쓰레기통을 찾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이러는 게 편했다.

칙?

그냥 같이 있을 걸 그랬나.

그녀의 반응에 당황해 도망치듯이 나온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죄책감에 강의실에서 나왔지만 결국 자스민을 두고 온 것에 더 죄책감을 느꼈다.

미안하다고 사과만 할게 아니라 같이 있어 줄걸 그랬다. 지금 이렇게 궁상떨어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후……”

회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푸르른 작은 숲속에서 연기를 내뿜어내고 있다니. 헛웃음을 치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연기에서는 달콤한 과일 향이 퍼졌다. 회색 연기에서 퍼지는 과일 향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차라리 향기가 없는 게 더 좋겠어.

노엘에게 다음에는 향기는 원래대로 돌려달라고 해야겠어.

자스민의 목에 무엇이 있기에 보여주지 않으려 했을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 중요한 부분은 누가 그런 짓을 했냐는 것이다.

자스민의 옷차림을 보아하니 미친 광견 년이 돌아온 건 확실해 보였다. 깔끔히 정돈된 옷 꼬락서니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었다.

씨발년. 애가 그 정도로 망가진 걸 알면 되돌려 놓으려고 해야지.

자스민은 자각하지 못했겠지만, 그녀는 스스로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녀는 의외로 자신의 깊은 내면을 보여주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지 못한 거겠지.

애초에 위태위태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될 줄이야.

그쪽에 물어봐야 하나.

아니, 자스민이 말해주기 전까지 어젯밤의 사건에 관해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짜증이 나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이면 몰라도 자스민과의 약속만은 지키고 싶었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을 바라보는 자스민의 얼굴을 실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래, 단지 그것뿐이었다.

소니아 입에 물었던 담배를 호수에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씨가 꺼져가는 꽁초를 보니 다시 담배 생각이 머리에 퍼졌다.

필요한 거라고 해도 너무 많이 피우면 좋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했지만 내 발걸음은 노엘의 연구실로 향하고 있었다.

일단 담배를 받고 뭐라도 하자.

집에서 잠을 자든, 자스민에게 사과를 하든.

교양수업은 내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원래라면 일주일 동안 천천히 나가야 할 것을 한꺼번에 풀고 있으니 학생들의 부담이 배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교수들도 이번에 밀린 진도는 이번 학기에 끝내자는 사명감으로 임했다.

원래 여러 번 있었던 평가를 조별 과제 하나로 묶어서 평가한다던가, 저번에도 말했듯이 질의응답 시간을 제외한다던가.

그런 그들의 간절함이 전해져 왔기에 나는 함부로 그들을 탓할 수가 없었다.

그래……. 나하고 카밀라가 문제지. 다른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눈을 부릅뜨고 수업을 경청했다.

이번 수업은 역사학.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업이었다. 특히 이번에는 태초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을 배우기에 호기심은 배가 되었다.

“이 대륙의 역사는 신께서 눈을 뜨게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태초에는 이 세계에 하나의 대륙만이 존재했습니다. 최초의 대륙에서 여러 종족은 평화롭게 살고 있었죠.

하지만 항상 평화로울 수많은 없는 법. 여러 종족은 여러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교수는 숨이 찬 건지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전쟁은 참혹하고 끔찍했습니다. 모든 종족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싸웠습니다. 그렇게 참혹한 전쟁이 계속되던 어느 나날.”

“최초의 날 이후 처음으로 신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신께서는 드워프가 살고 있던 남쪽 지역을 대륙에서 떼어내 새로운 대륙을 만드셨습니다.

용과 수인이 살던 북쪽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그때를 대격변이라고 부릅니다.

그 후로 북쪽 대륙은 도바노르 라는 이름을, 남쪽 대륙은 보르 메이슨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

교수는 강의실의 벽에 지금의 세계 지도를 붙였다. 세계 지도를 저렇게 크게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 결과 지금 우리가 아는 이 지도의 모습이 완성되었습니다. 신께서는 여러 종족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각 대륙 사이에 안개를 뿌려 서로의 대륙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어떤 학생이 손을 들고 교수에게 질문했다.

“교수님 그러면 엘프는왜 데우스 대륙에 남아있는 건가요? 엘프는 인간과 맞지 않아 몇 번이나 충돌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학생의 말에 교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에게 학생의 질문은 예상 내의 답변이었던 모양이었다.

“엘프 또한 그 대격변에서 온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엘프라는 종족은 여러 갈래로 찢어져 있던 존재였습니다. 남쪽에는 우드 엘프와 다크 엘프가. 북쪽에는 스노우엘프, 중앙에는 하이엘프 있었습니다.

엘프 사이에서도 여러 종족이 나뉘었었기에 신께서는 엘프 또한 각자 맞는 곳으로 나누신 겁니다.”

학생은 교수의 말에 이해한 듯 교수에게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표했다. 교수 또한 학생의 감사에 화답했다.

“인간과 엘프는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차례 충돌이 있었습니다. 서로 많은 생명이 죽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충돌과 갈등만 있지도 않았습니다.

인간과 엘프는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엘프에게 자원을, 엘프는 인간에게 기술을 말이죠.

실제로 인간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엘프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교수는 책상을 손으로 짚고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깃든 인자함은 그가 학생들은 어떻게 대하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날을 세우기보다는 이해하려고 하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그만큼 배울 게 많다는 것과도 같으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역사학 강의는 끝이었다. 교수가 강의실을 나갈 때는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 또한 박수를 쳤던 사람 중 하나로서 그의 수업에 더 없이 만족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고민할 때에는 바로 집에 갔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집에 엘리사가 있다는 점이었다.

엘리사가 나를 도와준 뒤로 엘리사에 대한 감정은 대부분 풀렸다. 하지만 아직 단둘이 오랜 시간 있기에는 어딘가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다.

소니아를 찾아볼까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넓은 아카데미에서 사람을 찾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었다.

……….노엘이나 보러 갈까.

노엘은 첫인상과는 달리 나를 많이 신경을 써 주는 게 느껴졌다. 내가 기분이 꿀꿀할때면 내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에 대한 내 평가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번에 나에게 먹였던 포션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도 알고 싶고.

저번에 노엘이 진지한 눈빛으로 먹으라고 하였기에 깊이 파고들지 않고 먹었었다. 보러 가는 김에 한번 물어봐야겠다.

연금술 수업도 재미있었으니까. 언제 재개하는지 물어볼 필요도 있고.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노엘의 연구실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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