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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44화 (44/120)

〈 44화 〉 사과

* * *

내 기분이 꿀꿀하던 어쨌건 시간은 흘렀다. 시간이란 존재는 나 같은 건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내 어깨를 치고 먼저 가버렸다.

내가 불만을 표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직 내게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쌓여있었지만 나는 그것들을 애써 무시했다.

지금 나는 아카데미를 가야 하니 말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나 스스로 불안해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카데미를 성실히 다니는 것 뿐이다. 그것 외에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카데미의 수업을 들은 지 오래되어서 슬슬 그리워지던 참이었다. 집 안에만 박혀있는 것도 싫증이 나던 참이었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내 집이 부서지고 성벽에 금이 가도 나는 등굣길에 올랐다. 사실 아까 생각한 것과는 달리 조금 더 쉬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중에 진도를 급하게 따라가게 되는 것은 원하는 일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기숙사 화제로 1주일 넘게 쉬었으니 진도도 빠르게 나갈 게 분명했다.

별로 다른 점이 없는 등굣길이었지만 다른 점이 있기는 했다. 내 목에 은색의 목걸이를 걸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목걸이는 엘리사가 내게 선물해주었던 목걸이였다. 평소에 목걸이는 목이 갑갑해서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많이 매진 않았다.

심지어 최근에 엘리사와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는 목걸이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목걸이와 반지를 볼 때마다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었다.

하지만 어젯밤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앞으로 내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최소한 안전장치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엘리사를 그 안전장치라고 생각했지만, 그 안전장치가 폭주하면 어떻게 되는지 몸소 체험하고 나니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엘리사가 정성 들여 마법을 소켓을 뚫고 마법을 박았으니 성능은 확실하겠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또 덮쳐지고 싶지는 않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목걸이를 차고 길을 걸으니 목에 전해지는 무게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뭔가 칼을 찬 느낌이랄까.

그리고 더웠다. 목에 땀이 차는 느낌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물론 목걸이 때문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테니 조금만 참는다는 마인드로 길을 걸었다. 모양은 내 마음에 쏙 들어서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아카데미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아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학생들은 오랜만의 등교에 들뜬 것 같았다. 서로 삼삼오오 모여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따뜻해 지는 것 같았다.

동시에 살짝 죄책감이 느껴졌다. 기숙사가 불탄 원인 중 하나가 나라고 생각하니 내가 그들의 1주일을 뺏은 느낌이었다.

그때 소니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니아는 나를 보자마자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녀의 그런 행동에 감사했다. 내가 아카데미에 다니고 나서 사귄 친구라고는 소니아와 노엘이 전부였다.

입학식 때 있었던 일 때문일까, 소니아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외모를 생각해 보면 찝쩍거리는 남자들도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런 사람들마저도 소니아에게 다가오려고 하지 않았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내 목을 조르고 나를 때리려 했으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막상 소니아는 그에 대해 별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원래 사람과의 대화를 그리 즐기는 사람은 아닌지라 자신의 주변에 사람이 있든 없든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가끔 보면 오히려 다른 학생들이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걸 괜찮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소설에서 그녀가 외모 때문에 겪었던 여러 추파를 생각한다면 그녀의 마음이 이해되는 것 같았다.

나 같은 경우는 소니아와 너무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내가 소니아와 계속해서 같이 다니자 그들 사이에서 내가 소니아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내가 이런 소문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 이미 아카데미에 있는 대부분이 그 소문을 믿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이런 인식을 고치고 싶었지만 이미 기정사실이 된 소문을 바로잡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친구가 2명이나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정신승리를 했다.

“어제 무슨 일 있었냐.”

“ㅇ, 어?”

혼자서 한창 생각을 하고 있던 중 소니아의 말에 옆을 바라보았다.

소니아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니아가 어제 있었던 일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 소니아의 표정을 보면 어젯밤 무언가 일이 있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눈이 부었잖아.”

소니아는 내 눈가를 매만지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나는 얼굴을 붉히며 눈을 감았다.

소니아의 집에서 자고 난후부터 그녀는 이런 식으로 갑작스러운 스킨십을 해왔다. 나는 스킨십에 면역이 없었기에 꽤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가 의식하면서 하는 행동은 아닌 것 같았기에 나는 뭐라 불평도 못 하고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소니아가 어젯밤 일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사실 소니아에게 못 알릴 것은 없지만, 굳이 내가 덮쳐졌다는 것을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 어제저녁에 책상에 발을 찧었거든.”

“그래….”

말을 그렇게 했지만 소니아는 전혀 수긍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나 스스로 거짓말에 재능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소니아도 내 말이 이상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딱히 추궁할 건덕지가 없는 모양새였다.

내가 침을 삼키며 긴장하고 있을 때, 문을 열고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리고 책을 폈다. 소니아는 나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수업 진도는 내 생각대로 빠르게 지나갔다. 기본적인 개념들 같은 것들은 간단하게 넘어가고, 평소 진행하던 질의응답도 하지 않았다.

교수의 얼굴을 보면 자신도 급하게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미안함이 역력해 있었다.

교양수업은 어떡하지…….

앞으로 있을 수업들이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교수님의 말이 끝나자 나는 서둘러 다음 수업을 들으러 갈 채비를 했다. 다음 수업은 교양수업이었기에 좋은 자리를 얻으려면 서둘러 가야만 했다.

“야.”

……...물론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정리하던 손을 떼고 소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까와 같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딜 가려고.”

“다음 수업…….”

“아직 많이 남았잖아.”

소니아는 나를 자리에 앉혔다. 나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까부터 이상했던 건데, 이 날씨에 목티는 덥지 않냐?”

그녀가 지적한 부분은 내가 입고 있는 터틀넥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목토시에 가깝긴 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나 거울을 봤을 때 내 모습은 가관이었다. 배와 쇄골, 어깨, 심지어 목에까지 키스 마크가 가득했다.

누가 보면 어젯밤에 질펀하게 한 줄 알게 분명했다.

교복으로 대부분의 흔적은 가려지긴 했으나, 목 쪽에 있는 키스 마크들은 가져지질 않았다.

교복 셔츠의 옷깃을 세어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가씨.”

한참을 고민하고 있던 그때, 엘리사는 내게 터틀넥 티를 내밀었다. 엘리사의 준 터틀넥을 교복 안에 입어보니 키스 마크들이 전부 가려졌다.

그때만큼은 엘리사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때만.

단점은 화창한 날씨에 티를 2개나 껴입으니 더울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등굣길에서 목에 땀이 차기도 했고….

“어떻게 생각해.”

“어…… 그게……”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멍청한 나 자신이 체감되는 것이 너무나 슬펐다.

“목에 상처가 나서……. 가리려고……”

“그래? 한번 보자.”

소니아는 무심하게 내 목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빼 소니아의 손을 피했다.

“허.”

아 망했다.

소니아의 입에서는 탄식이 나왔다. 내 머릿속은 공포로 굳어버렸다.

소니아는 내가 몸을 아예 뒤로 뺄지는 생각도 못 했는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소니아…….윽…….”

소니아는 내 어깨를 세게 잡았다.

“네가 말 못 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그녀의 손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강제로 알아낼 수밖에.”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는 구도가 보였다. 몸을 움직여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흐…. 흣….”

소니아가 하려는 건 단순하게 내 목을 보는 것이었다. 알고 있었다.

그때처럼 나에게 직접적인 위험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소니아는 어젯밤 일을 들어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내 몸과 정신은 공포에 굳어있었다. 내 어깨를 잡은 손이 무섭다. 나한테 다가오는 손이 무섭다.

…………..싫다. 정말 싫다. 나는 포기한 심정으로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숙였다.

“하……….”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깨에 가해졌던 압력은 사라지고 다른 무언가가 내 몸에 닿지도 않았다.

살짝 눈을 떠 보니 소니아가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일어난 변화에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어…?”

소니아는 아까의 기세는 어디 가고 지금은 내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소니아의 사과를 들을 줄이야.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을게. 나중에 말해주고 싶을 때 말해줘.”

소니아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을 나갔다.

잘은 모르겠지만 좋은 거겠지. 소니아는 내가 원하는 대로 강제로 내 목을 보지 않고 물러났다.

왜 그렇게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을까. 내가 너무 불쌍하게 굴었나. 나는 아까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쫓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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