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한숨
* * *
가면녀, 아니 카밀라가 준 우유를 다 먹을 때쯤 엘리사가 돌아왔다. 그녀가 걱정하지 말라고는 해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엘리사가 돌아왔을 때 그녀의 몸에는 커다란 상처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찢어진 옷과 먼지가 묻은 머리카락이 전부였다.
들렸던 소리의 규모가 워낙 커서 상처가 많았을 것 같았지만 내 기우였던 모양이다.
둘이 엄청나게 심각하게 싸운 것 같지는 않았기에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엘리사는 그때의 이야기를 별로 내켜 하지 않았다. 나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엘리사는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가면녀의 이름뿐이었다. 그마저도 엘리사의 말실수로 알게 된 거지만.
그녀에 대해 불만을 내뱉다가 자연스럽게 카밀라의 이름이 나왔었다. 엘리사는 모른 척 넘어가려고 했지만 내 귀는 이미 그 이름을 들어버린 참이었다.
엘리사는 카밀라의 정보를 내게 알려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 대해 질문을 하면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일까 싶었지만 엘리사와 대화를 거듭할수록 그게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엘리사는 카밀라를 싫어했다. 그것도 매우 엄청나게.
그 둘은 뭐랄까……. 서로 천적인 존재랄까. 특히 엘리사는 카밀라를 극도로 경계하고 싫어했다.
“엘리사. 왜 그렇게 카밀라를 싫어하는 거야?”
“네?”
“아니, 그렇게 놀라지 말고…….”
엘리사는 내가 이런 질문을 할 줄 몰랐는지 놀란 표정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물어보았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이리 진지하니 나까지 진지해지는 것 같았다.
“.....아가씨를 납치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뿐이야?”
“.......”
이후 엘리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카밀라의 단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취향이 지독하다, 음식을 가린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 유아독존이다 등등.
이 정도면 사실 카밀라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엘리사는 카밀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것까지 알고 있을 정도면 사실 카밀라하고 친한 거 아니야?”
“절대 아닙니다!”
엘리사는 목청을 높이며 소리쳤다. 엘리사가 이 정도로 격하게 반응할 줄 몰랐기에 내 어깨는 살짝 움찔거렸다.
엘리사도 자신이 과하게 반응한 걸 알았는지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단지……”
“단지?”
“마주칠 기회가 많았던 것 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엘리사는 천장을 바라보며 공상에 빠져들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며 마지막으로 남은 우유 한 모금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날이 지나고 옥탑방에 여러 인물이 들이닥쳤다. 그중에는 내가 예상했던 인물과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인물이 섞여 있었다.
첫 타자는 우리에게 옥탑방을 내어준 여관주인이었다.
그는 어젯밤 들린 소리 덕분에 잠을 설친 듯 보였다. 그는 금이 간 바닥과 벽, 처참하게 뜯어진 문을 보고 큰 한숨을 쉬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우리의 잘못이었기 때문에 수리 비용은 내가 전부 부담하기로 했다.
그에게는 괴한이 나타나 나를 납치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듣자 나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나는 애써 그 시선을 피했다.
저번에 나를 납치했던 미친년이 나를 따먹으러 온 것이라고는 말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는 내게 힘을 내라며 쿠키 몇 개를 주고 내려갔다. 자기 손녀가 구운 것이라고 했나. 그가 내게 준 쿠키는 모양이 불규칙했다.
짬 처리를 당한 건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쿠키의 맛은 좋았기에 온전히 그의 호의에 감사할 수 있었다.
다음은 테오도르의 경비병이었다.
그들은 옥탑방에서 일어난 일과 성벽 외곽에 파여진 크레이터가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관주인에게 말을 했던 것 처럼 있었던 일을 설명했지만, 그들은 우리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았다.
납치범을 어떻게 물리쳤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들의 눈에는 귀족 영애와 하녀 둘이서 납치법을 쫓아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엘리사는 내 가문에서 내 호위를 위해 고용된 자라며 그들의 의심을 넘겼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납치범이 왜 나를 이곳에서 노렸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 같았다.
자스민은 벨리타 가문의 하나뿐인 여식이라 납치 시도가 있어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몇몇 귀족의 자식들이 납치를 당한 적도 있으니까.
그러나 치안이 뛰어나다고 소문난 테오도르의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슬슬 그들을 내보내고 싶었지만, 그들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의지를 불태우며 질문을 이어갔다.
결국 그들의 질문 공세를 1시간 동안 대답하고 나서야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꾸몄던 루프탑의 가구들은 대부분 망가졌다. 고기 그릴, 책상, 천막까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루프탑을 꾸밀 때 싼 걸 사면 금방 망가질 것 같아 비싼 기구들을 샀었다. 당시에는 과소비인가 싶어도 성능은 좋아 잘 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저렴한 것을 살 걸 하고 후회하게 된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고 하지만 후회는 가슴 깊숙이 남는 법이었다.
다행히도 소파만은 온전했기에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보고만 있기만 해도 청량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너무나 넓은 하늘은 오히려 공허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뭐냐면…….
“힘들어……”
경비병들의 심문은 엄청난 일을 겪었던 나에게는 너무나 힘들었다.
어젯밤 일로도 내 머리는 한계에 봉착했는데 이런 일까지 발생하니 저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그들은 나였으면 한 귀로 흘릴 것 같은 정보도 집요하게 놓치지 않고 되물었다. 그렇게 끝나지 않는 끝말잇기를 하다 보니 이 사건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질문도 내게 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귀족 영애가 왜 이런 옥탑방에 살고 있는지에 관한 물음이었다. 기숙사의 화재로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그런데도 그들의 눈에서 의심이 없어지진 않았다.
따지고 보면 내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정확한 사실은 아니긴 해도 어디까지나 나는 피해자의 신분이었다. 옥탑방에서 전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내가 그들에게 거짓말을 한 이유는 첫 번째로 쪽팔렸기 때문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미친년이 들어와서 강간당할 뻔했어요, 라고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는 이 사건이 크게 번지는 것을 막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사건이 벨리타 가문에 알려지는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려면 경비병에게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나, 문이 종잇장처럼 뜯어진 이상 그것은 무리였다.
아버지의 관점에서 강간미수보다는 납치를 당할 뻔 했다는 게 그나마 덜 화가 나지 않을까 싶어 한 변명이기도 했다.
최선을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지만, 선명하게 남은 어젯밤의 흔적들과 경비병들의 집요했던 태도로 보아 어려울 것 같았다.
아마 나는 곧 있으면 본가로 불려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가서 자스민의 아버지와 얼굴 마주면서 식사를 하겠지.
벨리타 가문의 가주이자 자스민의 아버지인 벨리타 가필드. 그는 살벌하다는 브레토니아 야만족들을 토벌해 북쪽 끝자락으로 몰아낸 명장이었다.
무력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멍청하지 않았다. 여러 광산을 뚫고, 그곳에서 나오는 자금을 바탕으로 벨리타 가문의 기틀을 탄탄하게 닦았다.
현재 벨리타 가문의 위상 대부분은 그 혼자서 이륙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의 단점이 있다면 브레토니아인답게 자식과의 소통을 잘하지 못했다. 게다가 자식에게 모질게 대하지 못해 자스민이 엇나가는 것을 교정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조금씩 엇나가는 자스민을 그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사이 그와 자스민은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었다.
아버지에게마저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가진 자스민은 걷잡을 수 없이 비뚤어졌고, 그 결과가 소설 초반에 나오는 악역 영애 자스민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모르겠을 뿐 더러 죄책감이 내 마음을 짓눌렀다.
고의가 아니라고 해도 그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딸을 죽인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사랑한 것은 벨리타 가필드의 딸인 벨리타 자스민이지 내가 아니었다.
아카데미에 가기로 한 이유 중에는 본가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나라는 외부인이 그 장소에 머물기에는 힘들고 답답했다.
최대한 엮일 일이 없게 하고 싶었는데…….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몇 번째인지 모르는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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