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싸움
* * *
저벅저벅—
엘리사는 문을 넘어 침대를 향해 발을 뗐다.
엘리사의 발걸음은 느렸지만 한 발짝 할 발짝 디딜 때마다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꽉 쥔 주먹은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인지 바로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지금 이 상태로 엘리사를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윽……!”
“누워있으렴. 괜히 나서다가 다치지 말고.”
그러나 그녀는 일어나려던 내 어깨를 잡아 다시 침대에 눕혀 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살짝 욱했지만, 그녀 나름대로 배려라 생각해서 항의하지는 않았다.
엘리사는 어느새 침대 바로 앞까지 와서 나를 바라보았다. 내 지금 모습을 생각하니 쪽팔림이 몰려와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지금 네 모습이 남한테 보여줄 게 아니긴 하지.”
가면녀는 웃으며 내 배를 톡톡 건드렸다. 나는 그녀의 손길을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손때.”
엘리사는 가면녀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엘리사가 화가 나면 무섭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가면녀가 나를 깔고 있었기에 나는 탈출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엘리사의 살기는 나에게까지도 닿을 정도였지만 가면녀는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이 웃어넘겼다.
“여긴 어쩐 일이래?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숨어다니지 않고 우리 앞에 모습을 다 나타내다니.”
내가 왜 그녀와 우리라는 단어로 엮여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지금 입을 열어봤자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엘리사에게 지금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집중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손 떼라고.”
엘리사는 가면녀의 손을 잡아챘다. 나는 일시적으로는 내 배에 가해지는 자극이 없어져서 좋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 둘 사이에서 큰일이 날 것만 같아 무서워졌다.
나에게는 엘리사의 협박이 나에게 향하는 것이 아님에도 무섭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위협이라고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가면녀는 되려 엘리사의 반응이 어이없다는 듯이 넘겼다. 그녀의 말에는 미미한 혐오감이 섞여 있는 듯 했다.
“네가 뭔데?”
“뭐……?”
“내 말이 틀려? 이게 네가 하던 거 아냐.”
“.......”
“더군다나 메이드가 주인을 덮쳐? 나 같으면 얼굴 들고 다니지도 못하지.”
그녀의 말은 정론이었다. 너무나 뚜렷하고 올바른 말이었다. 이런 말을 그녀가 했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엘리사 또한 별 반응이 없는 거겠지.
“나였으면 머리 박고 자살했지 지금 이러고 있지는 않겠지. 안 그래?”
“저기 그건—”
그녀가 너무 심한 말을 하려는 것 같아 말을 끊으려는 찰나, 엘리사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 지금 너 같은 새끼만 없었으면 지금 나는 무릎을 꿇고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엘리사는 가면녀의 팔을 잡은 채로 문밖으로 던졌다. 가면녀가 반응을 할 새도 없이 문밖으로 날아갔다.
“어…?”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멍하니 문 밖을 쳐다보았다.
문이란것이 있었다는 게 거짓말 같을 정도로 말끔하게 뜯어진 직사각형으로 바깥의 풍경에 그녀는 보이질 않았다.
내 위에 가해졌던 압박이 사라진건 좋은 일이었지만 나를 괴롭히던 사람이 저렇게 내던져지는걸 보는 것은 생각보다 오묘한 체험이었다.
“.....아가씨.”
“어, 어?”
갑자기 들려온 엘리사의 말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엘리사를 보았다.
그녀의 옷차림은 평소에 내가 보았던 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그동안 어떻게 세탁을 한 걸까, 라는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눈빛이었다. 항상 냉정하고 흔들림이 없었던 그녀의 눈은 나를 바라볼 때면 떨림을 주체하지 못했다.
나약한 그녀의 모습은 내가 보고 싶어 하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상처가 될 것만 같았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나 까지도 말이다.
그날 밤, 엘리사는 내게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기고 도망치듯이 떠나버렸다. 그녀가 돌아오기까지 나는 많은 생각을 했지만, 그럴듯한 답은 찾지 못했다.
그때 있었던 일을 덮고 바로 용서해주는 것도 생각해보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일을 바로 용서해 주면 앞으로 이런 일이 몇 번이나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내 마음은 분노보다는 슬픔에 훨씬 가까웠다. 다만 내가 어떤 것에 슬퍼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을 뿐이었다.
확실한 것이 있다면 나는 엘리사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한 행동을 모두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녀가 내 곁에 없을 때 나는 쓸쓸함을 느꼈다. 그것만은 꾸밈없는 사실이었다.
“......죄송합니다.”
“.......”
“제가 아가씨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용서를 받아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엘리사……”
“다만—”
“돌아와 봤더니 꼴값을 떨고 있네, 강간마년이.”
엘리사가 말을 하고 있을 때 문밖으로 던져졌던 가면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문밖으로 던져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쩡한 모습이었다.
던져질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양손에 날카로워 보이는 단검을 들고 있다는 점이랄까. 그녀의 분위기는 상당히 날카로워져 있었다.
내 목을 조를 때보다 더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는 그 자체로 내게 두려움을 주었다.
엘리사는 그녀가 선택한 강간마라는 어휘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뒤돌기 전의 표정을 보아하니 어지간히도 빡친것 같았다. 둘 다 내 입장에서는 뭐……. 맞는 말 같긴 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몇 번이나 나를 구해주었다는 점에서는 엘리사가 더 낮기는 했다. 엘리사가 나타났을 때 흐르던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기도 했고.
“그냥 꼴려서 덮쳤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하지 왜. 그렇게 말하기는 쪽팔리는가 봐?”
그녀는 실실 웃으며 엘리사를 도발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종일 차가움을 유지했기에 어색함이 느껴졌다.
“하.”
그동안 엘리사를 봐오면서 느낀 게 있다. 평소에는 냉정하지만, 스위치가 켜지면 다혈질이 돼 버리고 만다.
특히나 이런 도발에 안 넘어가는 건 본 적이 없다. 엘리사의 이런 성격이 저번에 내가 납치당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고.
“.....너는 안 되겠다.”
엘리사는 한숨을 쉬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엘리사.”
“....네, 아가씨.”
엘리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왜 도망쳐서 돌아오지 않았는지, 왜 하필이면 지금 돌아왔는지.
“......다치지는 마.”
하지만 나는 이 말만을 내뱉었다. 엘리사가 돌아왔으니 앞으로 이런 얘기를 할 시간은 많았다.
어차피 내가 멈추라고 해도 듣지도 않을 것 같고 다치지 말라고 하는 게 최선이었다. 가면녀한테 한 방 먹이는 것도 보고 싶기도 하고.
“네. 아가씨.”
엘리사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미소는 어색했지만, 그 자체로 내게 안정감을 주었다.
“.....이건 뭐 나 혼자만 악역 취급인데.”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가면녀는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악역 맞잖아.
“넌 닥쳐. 네 목소리도 듣기 싫으니까.”
“하아……”
그녀의 불만을 엘리사는 바로 차단했다. 그녀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칼을 고쳐 잡았다.
나는 침대 구석에 있던 이불을 가져와 내 몸을 덮어 앞으로 있을 일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엘리사가 무릎을 굽혔다. 순간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눈 깜짝할 새에 그녀의 주먹은 가면녀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카강—!
가면녀는 곧바로 반응했다. 그녀의 단검과 엘리사의 주먹이 맞붙었다.
칼과 주먹의 대결이지만 엘리사의 주먹에서 피가 나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면녀의 칼 쪽이 위태로워 보일 정도였다.
둘 사이의 팽팽한 힘겨루기. 그 균형을 무너트린 쪽은 엘리사였다.
엘리사의 주먹은 가면녀의 칼을 부러뜨리고 그녀의 얼굴을 향해 나아갔다.
휙.
가면녀는 고개를 살짝 틀어 엘리사의 주먹을 피했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새로운 단검이 들려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단검에서 보라색의 빛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악.
그녀의 단검이 엘리사의 몸을 사선으로 그었다.
엘리사가 바로 방어했기에 몸에 상처가 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대가로 엘리사의 몸은 살짝 굳게 되었다.
가면녀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물 흐르듯 엘리사의 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단검을 역수로 잡고 그대로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엘리사는 서둘러 막아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단검의 차이라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저 단검,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아마도 유물일 가능성이 컸다.
쾅!
엘리사는 옥탑방 벽에 부딪혔다. 목 위로 올라오는 핏물을 삼키고 다시 주먹을 쥐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밀리기만 할 뿐이었다. 조금은 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사의 머리카락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한밤중에 태양이 뜬 것과도 같았다.
가면녀는 그 모습을 보고 뒤로 물러났다.
콰쾅—!
그러나 엘리사는 그보다 더 빨리 그녀를 낚아채 테오도르 외곽에 던졌다.
엘리사는 발을 뻗어 가면녀를 던진 곳으로 달려갔다.
테오도르의 외곽 성벽에는 작은 크레이터가 만들어졌다. 그 크레이터에는 가면녀가 처박혀 있었다.
그녀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단정했던 옷차림은 찢어지고 더러워졌다. 머리카락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면녀는 자신 앞에 도착한 엘리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미쳤니?”
“어쩌라고.”
“하…. 그래, 개새끼 상대로 대화가 통할 거라 생각한 내 잘못이지.”
가면녀는 몸을 일으켰다. 너덜너덜한 겉모습과 달리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왜 이렇게까지 하는거니. 수명 깎아가면서까지 무리할 이유가 있어?”
“아가씨한테 그런 짓을 해놓고 이유가 있냐고?”
엘리사는 주먹을 으스러질 듯이 쥐었다. 엘리사의 주먹에는 황금빛의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도 똑같은 짓 해놓고 왜 그러냐는 거지. 내가 너였으면 이미 자살했어.”
“그건….”
“네가 화내는 이유는 말이지. 단순히 내가 그 애를 덮친 것에 화내는 게 아니야. 자기보다 먼저 자신도 못 한걸 하려 했다는 것에 화내는 거지.”
“.............”
“너는 그냥 집착과 질투, 탐욕을 충성심으로 포장하고 있을 뿐이야.”
“닥쳐….!”
“........후. 너 같은걸 메이드로 삼고 있는 그 애가 불쌍하다. 지금은 나 때문에 너를 좋게 보겠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결국에는 너도 나와 똑같은 사람인데.”
“......카밀라. 너를 처음 봤을 때 너를 죽였어야 했어.”
“뭐, 아쉽게 됐네.”
카밀라가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엘리사는 카밀라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 속도는 지금까지와는 결을 달리했다. 그 순간만큼은 과장을 보태면 광속의 속도라고 할만했다.
그러나 엘리사가 주먹을 내지른 곳에 카밀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은빛의 마력만이 남아있었다.
엘리사는 바로 그녀를 찾으러 나가려고 발걸음을 뗐다.
하지만 그때, 머리카락이 원래대로 돌아옴과 동시에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엘리사는 바닥에서 넓은 하늘을 쳐다보며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힘을 비축했다.
“안녕?”
엘리사와 가면녀가 싸우러 나간 이후 시간은 꽤 흘렀다. 슬슬 엘리사가 걱정될 때쯤 가면녀가 내게 다가왔다.
엘리사는 어떻게 된 거지? 진 건가? 여러 의문이 내 머릿속을 채웠다. 그녀는 내 이런 의문을 알고 있다는 듯이 웃었다.
“......엘리사는요?”
“바닥에 누워있어. 곧 있으면 일어날 거야.”
“....그래요?”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것 같아 보여도 실제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가면녀는 내게 우유를 건네주었다. 의외의 물건이었기에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게 뭐예요?”
“으음…. 사과선물이랄까?”
사과 선물이라니. 그런 것치고는 너무 평범한 것 아닌가 싶었지만, 사과하러 온 게 어딘가 싶었다. 그녀에게 사과 같은 건 평생 받지 못할 것 같았는데.
“한창 분위기가 좋을 때 괴한이 난입해서 분위기가 깨졌잖아. 그에 대한 사과랄까.”
“.....반대잖아요.”
“뭐, 그게 그거지 뭐.”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아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읏…….”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이 자국을 남겼던 곳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녀는 슬며시 고개를 들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자스민, 물리지 않도록 조심해.”
“.....누구에게요.”
그녀는 싱긋 웃으며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충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었기에 더 묻지는 않았다.
“그럼 나는 가볼게. 다음에 만날 때는 마음의 준비를 하렴.”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인사가 딱 그녀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와는 꽤 빠른 시간 안에 한 번 더 만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녀가 있던 위치에 은빛의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엘리사를 기다리며 그녀가 준 우유를 마셨다. 그녀가 남긴 은빛 흔적을 바라보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