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등장
* * *
“흐…. 흐흣……”
엘리사가 나를 덮쳤을 때 엘리사의 손길은 거칠고 빨랐다. 그녀도 나도 이런 상황에서 익숙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때 별일이 없을 수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엘리사가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게 내게는 다행이었다.
반면 그에 반해 가면을 갓 벗은 내 위에 있는 그녀는 너무나 능숙했다.
내 위에 올라탔을 때부터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손길은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동시에 고혹적이고 느렸다.
엘리사의 경우에는 물리적으로 저항을 할 수 없었다면 그녀의 경우에는 그녀의 손길 하나하나가 사람을 깔려있게 만들었다.
내 몸을 조심스럽고 야릇하게 만지는 손길, 오른쪽 쇄골쪽에 느껴지는 뜨거운 입김,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 그 모든 게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 하읏……. 너무 능숙한 것 아니에요……?”
“재능…. 이라고 하면 믿을래?”
“아윽…… 거기는 건들지 마요오…….”
재능은 무슨 그녀가 이런 상황에 얼마나 익숙한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는 이미 프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냥…. 목 졸라주시면 안 돼요……?”
나는 그녀의 말에 목을 졸라달라고 졸랐다. 계속 이런 짓을 당하면 나 자신을 유지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원하는 대답과는 정반대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것도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종류의 대답을.
“그건 안되지. 너는 죽는 게 목적이잖아.”
“......!!”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녀가 내 목적을 알고 있는 거지? 엘리사를 제외하면 내 목표를 누군가에게 알려준 적도, 노출한 적도 없을 텐데….
“전에 내가 목을 졸랐을 때, 너 표정이 어땠는지 알아?”
“네….?”
“행복해했어.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죽음에 다가서는 걸 기뻐했다고.”
그녀는 스스로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아마 나 같은 사람이 이 세계에는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사실이지만.
“내가 죽는 걸 원하는 사람에게 내가 죽게 해줄 리가 없잖아. 안 그래?”
“.............”
“간만에 흥미가 생긴 장난감인데 쉽게 놓아줄 리가 없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또다시 쇄골과 오른쪽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나는 그녀의 행동을 보고 절망에 빠졌다.
그녀가 다시 나를 목을 졸라 죽여주길 기대했는데…….
절망감에 빠진 나에게 주어지는 건 그녀의 끈적하고 집요한 애무뿐이었다. 나는 그럴듯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해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고 달과 별은 자신들의 전성기를 즐기고 있었다.
내 목덜미와 쇄골에는 눈 뜨고 보기 민망할 정도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흔적을 보고 가까스로 내린 고개를 다시 올릴 수 밖에 없었다.
“흐읏…….”
나는 천장을 쳐다보며 이 시간이 어서 빨리 끝나기를 빌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이 순간을 끝낼 마음이 없어 보였다.
“아직 별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라니…. 대단하네.”
툭 내뱉는 그녀의 말이 내게는 그녀가 했던 어떤 행동보다 부끄러웠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나는 그녀의 행동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무슨 수작을 부린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그냥 내가 민감한 걸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여러 가설들은 내 머리 구석에 처박아놓으며 나는 그녀의 눈빛을 피했다.
“먼저 너를 탐한 사람이 있다는 게 맘에 안 들지만…. 뭐, 나도 네 처음을 받아 가면 되는 것 아니겠어.”
“그게 무슨 소리—”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열려있는 내 입술 안에 자신의 혀를 집어넣었다.
워낙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막을 수도 없이 입을 내주고 말았다.
그녀의 혀는 탐욕스럽게 얽혀왔다. 맞대어 문지르고, 도망치려는 내 혀를 잡아 기다렸다는 듯 지독하게 엉켰다.
“으응……!”
나와 그녀의 두 혀가 엉킬 때마다 입 안에서는 젖은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농밀하고 끈적하게, 더 깊게 파고드는 키스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혀 전체가 애무를 당하는 느낌에 호흡까지 통제당하니 내 머릿속에 공기가 부족하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아…….”
그건 나 뿐만이 아닌지 내 위에서 그녀 또한 가쁜 숨을 뱉어냈다. 그녀의 빨개진 볼과 흔들리는 눈동자는 그녀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입술은 처음이지?”
빨개진 얼굴로 물어오는 그녀의 얼굴에는 뿌듯함과 기쁨, 정복감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는 끝까지 내 시선을 따라왔다.
“처, 처음이에요…….”
그렇기에 나는 사실을 말하며 눈을 꼭 감았다. 대한민국에서도 키스를 해 본 적은 없었기에 방금 그녀와 한 키스가 내 생에 첫 번째 키스였다.
그 사실을 말하는 것은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실제로 내 볼은 더 없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내 몸의 소중한 것이 하나하나씩 사라져가는 느낌이랄까. 허무하고 공허했지만, 그 틈새를 알 수 없는 심장박동이 채워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느낌이 너무나 두려웠다.
“........?”
그런데 눈을 감은 채로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그녀 쪽에서 별 반응이 없었다. 나는 데자뷰를 느끼며 눈을 뜨자 멍하니 나를 쳐다보는 그녀가 보였다.
내가 말한 대사에 이상한 것은 없었을 텐데 그녀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이런 반응은 내게 안도감이 아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고요, 내 생에 고요가 이렇게 무섭게 느껴진 적이 있었나. 그녀가 언제 움직일지 몰라 나는 궁지에 몰린 생쥐같이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아…. 진짜 못 참겠네.”
내 생각 그대로 그녀는 말을 내뱉고 다시 내 입술을 탐했다. 나는 묘한 쾌감과 뜨거운 열기를 밀어내며 저항을 계속했다.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녀에게 집어 삼켜질 것만 같았기에.
정말로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녀의 끈적한 키스와 애무만 벌써 몇십 분이나 이어졌다. 갈수록 힘이 빠지는 나와 달리 그녀는 갈수록 힘이 넘치는 것 같았다.
계속 미친 듯이 저항했던 내 팔은 삶은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팔에 힘을 줘 보려고 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는 게 내 한계였다.
“흐…… 흐헤…….”
내 입에서는 제대로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에게 제대로 된 저항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힘 빠진 신음소리 뿐이었다.
“어머, 벌써 맛이 갔네.”
그녀는 내 위에서 별거 아니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그녀에게 뭐라 반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현실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내가 입을 뻥긋거리는 것을 그녀는 웃으며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내 몸을 전체적으로 쓸더니 엄청난 말을 입에 담았다.
“이 정도면 예열은 충분히 된 것 같은데…… 이제 제대로 해 볼까?”
“에……?”
그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그녀의 행동을 보았을 때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내 코앞으로 다가오게 되니 나는 충격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힘이 빠져 아무런 움직임도 할 수 없었던 팔을 움직여 내 의견을 표출해 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 만해요……”
“하하, 내가 왜?”
그녀는 조금씩 움직이는 내 팔을 가지고 장난치며 웃어넘겼다.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무력했나. 스스로 나약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나 스스로의 나약함이 너무나 뚜렷하게 체감되었다.
“네 반응을 보니 나보다 먼저 자국을 남긴 놈도 여기까지 하지는 않은 모양이네.”
그녀가 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바라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몸에 들어오고 이 몸에 엄청난 애착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이 몸이 내 몸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지금 행하려는 행동이 내게는 결코 반갑지 않았다. 그녀가 했던 다른 행동들이 반가웠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 행동은 특히 무섭고 당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까지 당하게 되면 나는 다시 되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제, 제발……. 그쪽은 하지 않으시면 안 돼요……?”
“흐음……”
그녀는 내 애원에 잠깐 생각하는듯했다. 잠깐동안만.
“싫어.”
그녀는 상쾌하게 웃으며 내 말에 거절했다. 결과는 대충 예상하고 있었지만, 절망감이 덮쳐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질투심이 심한 편이라……. 하나를 뺏겼으면 그 이상을 가져가야 마음이 편하거든.”
애초에 내가 누군가의 소요였던 적은 없지만 말이다.
엘리사고 가면녀고 나를 가진 적도 없으면서 서로 경쟁하는 느낌이라 나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야.”
상냥하게 말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을 한번 겪어서 그런지 이제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이 시간이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콰앙—
그때, 큰 소리가 내 귓가를 사정없이 때렸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보아하니 문 쪽인 것 같았다.
내 위에 있는 그녀도 예상했던 상황은 아니었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의 찌푸린 얼굴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 소리를 낸 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울 따름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싶었지만 힘이 달려서 그러지 못했다. 고개를 살짝 돌려 곁눈질로 보는 게 한계였다.
단단하게 달려 있었던 문은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다. 내 위에 있는 강간마씨도 저 문을 부시는 것은 실패했는데, 저렇게 힘으로 무셔버리다니.
그럴 정도로 힘이 강한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한 한 명밖에 존재하질 않았다.
“아가씨.”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건조했던 안구에 습기가 차는 게 느껴졌다. 내가 보고 싶었던 이가 서 있었다. 환하게 빛나는 머리카락과 함께.
“모시러 왔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