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40화 (40/120)

〈 40화 〉 밤

* * *

“안녕 꼬마 아가씨?”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인물의 등장에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눈동자를 굴려보았지만, 어디에도 엘리사는 발견되지 않았다.

조금 전에 들렸던 목소리는 분명 엘리사의 목소리였다. 내가 엘리사의 목소리를 착각할 리가 없었다.

내가 이 세계에 와서 가장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엘리사만큼은 헷갈리려고 해도 헷갈릴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굳어 있어?”

그녀는 내 뺨에 손을 갖다 대며 말을 이었다. 차가운 손의 냉기가 내 뺨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내치고 싶었지만, 얼음장같이 굳어버린 몸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못 볼 것이라도 본 것 마냥.”

그녀는 귀여운 것을 본 것처럼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내게 긍정적인 신호가 아니었다. 오히려 부정적인 신호였다.

나에 대한 이상한 집착이 끝나지 않았다는 신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말에 정신이 확 뜨였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녀는 위험했다. 놀라움에 굳었던 몸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힘을 끌어서 살짝 열었던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래, 닫으려고 ‘했다.’

“우리 아가씨는 성격도 급하다니까.”

그녀는 내가 닫으려는 문을 막고 내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내가 약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면전에서 내 나약함을 처박아주니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귀여운 애완동물을 보는 그녀의 시선에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써서 문을 닫아보려고 했지만 턱도 없었다.

그녀의 비웃음만 더 커질 뿐 이었다. 그녀의 비웃음은 내 마음을 파고드는 것 같아 나는 그녀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했다.

“...........방금 엘리사의 목소리 아니었어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내가 가장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궁금한 건 알고 죽자는 심산이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은 아니었지만 내 딴에는 이게 가장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이성을 담당해야 할 부서는 그녀를 보고 바로 탈주해 버렸으니 말이다.

“아~ 그거?”

그녀는 허리춤에서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물체를 꺼냈다. 그녀가 그 물체를 건드리자 내가 잘 알고 있었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가씨…….”

엘리사의 목소리. 내가 아까 들었던 목소리기도 했다.

그녀가 들고 있는 건 녹음기였다. 이 세계에 어떻게 녹음기가 있지?

“이건 어쩌다 발견한 유물인데 꽤 신기한 물건이야.”

나는 그녀의 설명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이 버튼을 누르면 그 당시의 시간, 그러니까 목소리를 녹음해주는 거지.”

“뭐야 그게……….”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소설 속에서 그런 물건을 본 적은 없었다. 나중에 발견된 물건인가?

딱 봐도 엄청 귀해 보이는 물건인데 하필이면 그런 게 저 여자 손에 있다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속아 넘어갔다는 것에 대한 패배감과 당혹감이 내 머리를 채우고 있는 까닭이었다.

“실례할게~”

그녀는 문을 활짝 열고 집 안을 향해 들어왔다. 나는 그녀가 발을 한 발짝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나 또한 뒤로 한 발짝씩 움직였다.

점점 뒤로 가다 보니 어느새 침대에 발이 막혀버렸다. 집이 좁다 보니 몇 걸음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침대에 막혀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려워 눈을 깔고 벌벌 떨고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녀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상함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순간 소니아의 마법을 알아차린 건가 싶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마법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에 나를 속이면서까지 나 스스로 문을 열게 했으니까.

이 집에 무언가 이상하거나 특이한 점이라도 있나? 스스로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그런 것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엘리사한테 선물을 받았지만 그날 이후로 걸치지 않았던 목걸이 정도가 있었다. 목걸이라도 걸칠 걸 그랬다.

진심으로.

가면녀가 저렇게 생각에 잠겨있을 때 빠져나갈까.

갑자기 든 생각은 꽤 기발한 생각 같았다. 나는 그대로 몸을 슬슬 옆으로 빼면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아가씨.”

내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꽤 괜찮은 작전이었을 텐데.

아가씨라는 호칭은 엘리사를 통해 꽤 많이 들어보았지만 가면녀의 입에서 나오는 아가씨라는 단어는 느낌이 달랐다.

조금 더 차가운 느낌이랄까. 윗사람을 부르는 게 아니라 아랫사람을 부르는 것 같았다.

“.......이게 다야?”

“네……?”

“아니, 이딴 게 전부는 아닐거 아냐.”

이런 거라니….

마음속에서 울컥하고 울분이 터져 나왔다. 여기가 굉장히 좁은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나는 만족을 하며 살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은 올 때마다 나에게 미쳤냐고 하니까 마음이 아파져 왔다.

평소 같았으면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동안의 기억 때문인지 자신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마당도 있는데……”

“뭐?”

“마당은 넓잖아요……. 예쁘게 꾸몄고….”

“하?”

그녀는 내 겨드랑이를 잡고 들어 올렸다. 인형을 들어 올리듯이 너무 쉽게 들어 올려져서 저항할 틈도 없었다.

허공을 휘젓는 다리는 내 당혹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놔주시면 안 될까요…….”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 정도면 거의 물건 취급인 것 같은데….

“.......그래, 그럴 수 있지.”

가면녀는 나를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방금 그녀의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더 가까웠다.

그녀는 나를 침대에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는 침대에 도착하자마자 이불로 몸을 둘렀다.

최소한의 대비랄까. 나 나름대로는 진지한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 기묘한 대치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나는 이번에도 의문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어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여긴 왜 오신 거에요?”

“널 보려고.”

즉답.

마치 러브코디에서나 나올법한 대사였지만 안타깝게도 말한 사람이 납치범이라는 점에서 공포를 조성하는 효과만 나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했단 말이야.”

그녀는 점점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동안의 일들로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시하려고 해도 계속 생각이 나서 말이지. 우리 아가씨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어.”

그녀는 나를 덮치는 모양새였다. 나는 그 밑에 깔려 있었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서로를 더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때의 기억이 오버랩되는것 같았다. 분명 그때도 엘리사가 나를 덮치는 모양새였지.

그때와는 다르게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된 상태기 때문에 조금은 더 담담하게 이 상황을 맞이할 수 있었다.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것하고 지금 이 행동은 무슨 관계인 거에요?”

“서로에 대해 알려면 이만한 것이 없잖아.”

“.....그냥 목 졸라주시지.”

“그건 안되지.”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너무 당당한 것 아니야?

그녀의품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녀의 힘은 내 예상을 웃돌았다. 그녀는 내 반응을 보면서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진짜 이 세계에는 다 크싸레밖에 없는 걸까. 아니면 내가 미친년들을 불러 모으는 걸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 외모가 그렇게 뛰어나지도 않는데 내가 뭐라고 그렇게 달려드는 걸까.

내 몸에서 페로몬이라도 뿜어져 나오나.

그녀는 내 팔을 잡고 내 몸을 훑었다. 그 모습이 마치 먹이를 보는 포식자의 눈빛 같았다. 나는 그 눈빛을 몇 번이나 보았다.

가장 최근에는 엘리사에게 느꼈던 눈빛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엘리사는 취해있었고 내 위에 있는 사람은 취해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쯤 되니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남지 않았다. 저번에 목을 졸렸을 때도 비슷한 감상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내 머릿속에는 그녀의 가면 뒤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저 가면 뒤에 얼굴은 알고 싶었다.

“최소한 가면은 벗으면 안 돼요?”

“왜?”

“궁금하잖아요…….”

그녀는 미소를 짓더니 가면에 손을 갖다 댔다. 나는 그녀의 손끝을 하나하나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자, 보여줄게.”

나는 사실 그녀가 가면을 쓴 이유가 외적인 외모에 있다고 생각했다. 불편하게 가면을 쓸 이유는 별로 많지 않으니 말이다.

가면을 쓴 이유가 외모라는 내 추측은 맞았다. 단지 내 예상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말이다.

아름다웠다.

내가 살면서 보았던 그 어떤 여성보다 더. 은을 녹여 놓은 듯 광택이 흐르는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가 보였다.

은은한 벽의 조명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까만 하늘에 빛나는 달처럼 고고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뚝한 코와 차갑게 가라앉은 눈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하였다.

그동안 가장 예쁜 사람은 엘리사라고 여겼는데, 그 엘리사조차 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에 비하면 빛이 바랬다.

경국지색. 항상 말로만 듣던 고사성어를 이해하게 된 순간이 오게 될 줄이야.

…..이 정도의 외모면 그녀가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 이 정도의 외모면 얼굴을 가리는 게 삶을 사는 데 있어 더 편하겠지.

그녀의 얼굴만을 보았을 뿐이지만 그녀가 외모로 인해 겪었을 고충이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어때?”

그렇게 말하며 씩 웃어 보이는 그녀는 꽤 후련해 보였다. 가면을 그렇게 자주 벗는 편은 아닌 건가.

“예뻐요. 정말로.”

나는 진심 그대로 그녀의 외모를 칭찬했다. 그녀에 대해 좋은 감정은 없지만, 외모만큼은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그래? 고맙네.”

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내 칭찬을 반가워했다. 나는 풀려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녀의 손놀림은 점점 끈적해져만 갔다.

그러더니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잠겨있었던 내 파자마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 그녀를 멈추려고 했지만 내 나약한 힘으로는 그녀의 힘을 이겨내지 못했다.

툭툭—

내 파자마의 단추가 들릴 때마다 나를 눈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 따뜻하게 보호되던 가슴팍에 바람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입과 눈을 꼭 감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팔은 예외였지만.

“하.”

그때, 그녀의 탄식이 들려왔다. 갑자기 들려온 그녀의 탄식에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내 오른쪽 쇄골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꼬맹이인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그녀가 바라본 곳은 전에 엘리사가 나를 덮쳤을 때 생겼던 흔적이었다. 다른 쪽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지만 쇄골 쪽에 남아있는 키스 마크는 도통 사라지질 않았다.

누군가 이 흔적을 보는 것이 싫어서 소니아와 같이 씻는 것도 경계했었는데……. 이렇게 들킬 줄은 몰랐다.

그녀는 엘리사가 남긴 흔적을 보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눈이 어째서인지 더욱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분명 내 잘못은 아니지만, 그녀의 이런 눈빛을 보니 괜스레 내가 잘못을 한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눈을 피하면서 그녀에게 잡힌 팔을 빼려고 시도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내 팔을 더 세게 잡았지만 말이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지…….”

그녀는 엘리사가 흔적을 남긴 곳 반대편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녀가 입을 움직일 때마다 내 피부에 그녀의 숨결이 전해져와 간지러웠다.

“아가씨. 네가 잘못한 거야.”

그녀의 눈에 비친 차가운 질투를 보았다. 나로서는 그녀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아직 밤이 끝나기에는 멀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