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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38화 (38/120)

〈 38화 〉 심문

* * *

실험실의 내부는 내가 있을 때와 비교하면 실험대를 제외하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정리했었던 책장과 여러 유물은 아직 먼지가 쌓이지 않았다.

내가 정리한 그래도 있다는 점에서 나는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까 말했던 실험대였다. 말이 실험대지 사실상 책상과도 같은 취급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실험대 같이 쓰이고 있었다.

실험대 위에는 내가 처음 보는 실험 도구와 용액들이 놓여 있었다.

그동안 노엘의 수업을 들으면서 나름 연금술에는 눈이 밝다고 생각했건만 이래서야 연금술을 처음 대하는 초심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 자책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내게 손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친구야, 오랜만이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삼각 플라스크가 들려있었다.

플라스크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들어있었다. 플라스크 안에 들어있는 푸른색 액체는 내가 전에 먹었던 에너지 음료 같기도 했다.

하늘색보다 더 푸르고 밝은색의 음료는 정상적으로는별로 볼 수 없는 색이다 보니 별로 입에 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 액체가 넘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노엘이 개의치 않는 걸 보니 별로 위험하지 않은 액체 같았다.

“여긴 어쩐 일이야?”

“.......그냥 지원금을 받으러 왔는데, 너를 본 지 한참 된 것 같아서 들렀어.”

“그래?”

노엘은 삼각 플라스크를 내려놓고 내게 다가왔다.

그녀가 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고개를 한참 꺾어 올렸어야 했다. 노엘의 큰 키 때문이었다.

노엘은 자기 팔로 내 허리를 둘러싸고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뭔가 정중하게 에스코트를 받는 것 같아 쪽팔렸지만 노엘의 손길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나를 소파에 앉히고 그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실험대에 있던 물잔을 가져와 물을 들이켜면서 내게 물었다.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어….”

그녀의 물음에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진짜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하나?

소니아에게는 이미 말했는데 뭐가 대수냐 싶겠지만 나는 내가 덮쳐질 뻔한 이야기를 아무에게나 퍼트리고 싶지 않았다.

노엘이 그 아무나라는 뜻은 아니지만 그래도 바로 말하기에는 좀 쪽팔린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나름 잘 지냈지.”

나는 노엘의 질문을 피했다. 그녀가 물은 것이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나는 그녀의 뜻을 살짝 피했다.

그녀의 의도가 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순수한 사람처럼 말이다.

“아니, 내가 듣고 싶은 건 그게 아닌 걸 잘 않잖아.”

그녀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대면서 말했다.

나는 노엘의 이런 점이 무서웠다. 그녀는 중심에서 빗겨나간 것 같으면서도 중요할 때는 내게 중요한 질문을 했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했지만, 그녀는 순순히 내 눈동자를 피해 주지 않았다.

“친구야, 너의 눈빛을 보면 대충 짐작은 가능하단 말이지.”

그녀는 피하는 내 눈을 계속해서 마주치면서 말했다.

노엘의 눈빛은 언뜻 보면 가벼웠지만 이럴 때는 너무나 무거워 피하기가 무서웠다. 그녀의 눈은 내게는 커다란 바위 같다고나 할까.

“너 뭔가 일이 있었지. 그렇지?”

그녀는 점점 고개를 내 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애써 고개를 돌렸지만,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여기서 벗어날 길은 없다는 것을.

“친구야, 지금까지 내 감이 틀린 경우는 별로 없었거든. 그냥 곱게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말을 하며 싱긋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압박하는 노엘에 못 이겨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노엘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하기는 해도 저 말의 뜻은 내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강력하게 주장할 정도인가….

노엘이 보기에는 내가 이상해 보인 것 같았다. 나는 평소와 같아 보였는데도 말이다.

사실 그리 괜찮은 것은 아니지만, 노엘이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챈 것은 의외였다. 나한테는 연금술을 가르칠 때를 제외하고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말이다.

“사실 그게…….”

노엘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실토했다. 얘기를 꺼낼 때 노엘은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얼굴은 처음 보았기에 나는 심문을 받는 죄수처럼 그동안 있었던 일을 실토했다.

“하, 그렇단 말이지…….”

노엘은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의 굳은 얼굴을 보며 나는 죄인처럼 정자세로 가만히 그녀가 할 말을 듣고 있었다.

노엘의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해야 할까…….

무서웠다. 그래, 존나 무서웠다.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이 살인하기로 마음먹을 때의 표정 같달까?

노엘에게 이런 말은 하는 건 실례이긴 하지만 무서운걸 어쩌란 말인가. 항상 실실 웃는 노엘의 모습만을 바라보았기에 그녀의 이런 모습은 새로웠지만 어색했다.

“뭐, 그럴 수 있지.”

그녀는 그 말을 하고 다시 내가 알던 얼굴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모습이 마치 가면을 쓴 것 같아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거기에 계속 살아도 괜찮겠어?”

노엘은 내게 싱긋 웃으며 물었다. 평범한 질문이었지만 나에게는 굉장한 압박이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ㅇ, 어…. 그래도 그냥 거기에 있으려고.”

“그래? 뭐, 네 선택이니까 존중할게.”

그래도 노엘은 내 선택에 대해 더 이상 뭐라 말하지는 않았다. 내 선택을 존중한다는 말을 끝으로 이 주제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책장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책장에 놓여 있던 지갑을 가져와서 내 앞에 섰다.

“밥 먹었어?”

“아침만 먹었는데……?”

“잘됐네. 나는 아무것도 안 먹었거든.”

노엘은 그 말을 하고 내 허리를 잡아 나를 일으켜 세웠다. 뭔가 아기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라 불만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꽤 편하기도 했으니 괜찮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나랑 밥이나 먹으러 가자. 친구야.”

“여기서 안 먹고?”

실험실에서 청소를 할 때, 청소가 끝나고 나면 노엘과 나는 실험실에서 밥을 먹었다.

그렇게 꽤 많이 얻어먹었기에 나는 이번에도 여기서 먹을 줄 알았다.

“여기서 먹자고?”

노엘은 그렇게 말하며 개판이 되어버린 실험대를 가리켰다. 실험대는 물병을 하나 놓을 곳이 없을 정도로 빡빡했다.

확실히 여기서 먹기에는 무리 같았다. 이 실험대를 치우면 먹을 수 있겠지만 아직 실험이 끝나지 않은 거겠지.

밥을 먹자고 진행 중인 실험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옷의 먼지를 살짝 털어내고 옷가지를 정돈했다.

“......그냥 나가서 먹자.”

“그렇지?”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럼 일단 밖에 나가자. 한동안 바깥공기를 맡지를 않아서 나가보고 싶네.”

노엘은 히키코모리 같은 말을 내뱉으며 문을 향해 나아갔다. 나 또한 그녀의 뒤를 열심히 따라갔다.

노엘과 나는 아카데미 바깥으로 나와 괜찮은 맛집을 탐색했다.

전에 소니아와 데이트를 할 때는 골목길 사이사이 까지 봤지만, 지금은 최대한 대로변 쪽으로 살펴보았다.

나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노엘은 최대한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그동안 있었던 내 이야기에 별 반응이 없었던 노엘이었지만, 막상 그 후에는 나를 더욱 배려해 주는 것이 눈에 보였다.

소니아나 노엘이나 나를 배려해 준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인연을 찾아보려고 해도 찾지를 못했지만, 지금은 그런 사람이 두 명이나 있었다.

사실 한 명 더 있었지만 ‘그 녀석’은 나쁜 짓을 저질렀으니 굳이 저 둘 사이에 끼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노엘과 같이 다니다 보니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바로 보폭의 차이었다.

그녀의 큰 키 덕분에 그녀가 한 걸음을 옮길 때 나는 두 걸음 이상을 옮겨야 했다.

처음에는 그녀 또한 내 걸음걸이에 맞춰 주었지만 갈수록 차이가 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흐헥…. 잠깐…….”

나는 걸음을 빨리 옮겨 노엘의 팔을 잡았다. 노엘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내가 왜 멈춰 세웠는지 잘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같이 가…… ㄴ, 나 힘들어…….”

“아아…….“

그제야 노엘은 내가 왜 멈춰 세웠는지 안 것 같았다. 노엘은 내가 잡은 팔 쪽으로 나와 팔짱을 꼈다.

“미안, 친구야. 이제 이렇게 하고 가자.”

“....어?”

“이러면 네가 뒤처진 걸 바로 알 수 있잖아.”

노엘의 말을 듣고 무언가 찜찜했지만 나는 그녀의 옆에 붙었다. 뭐……. 괜찮겠지.

맛집을 찾아다닌다고 했지만 사실 내가 아침을 먹은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시내를 탐방하고 다녔다.

그동안 많이 둘러보았다고 해도 이 도시는 요일이나 날씨에 따라 모습을 달리했기 때문에 매일매일이 새로운 느낌이었다.

또한 놀러 가는 사람의 차이도 있었다. 소니아, 노엘…. 엘리사 모두 성향이 달랐기에 같은 걸 보더라도 다른 반응의 차이를 즐기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둘러보다 괜찮아 보이는 음식점을 찾았다.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곳이었는데 나는 다른 데를 갈려고 했으나 노엘이 자신의 빵빵한 지갑을 보여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기에 나는 이곳으로 결정했다.

나도 지원금을 받았으니까 계산할 때 더치페이를 하면 되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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