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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36화 (36/120)

〈 36화 〉 나만의 공간

* * *

“이제 어떡할 거야.”

소니아의 주방에 있는 식탁에서 우리는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아침밥은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았다. 둘 다 많이 먹는 편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빵과 우유로 아침을 때웠다. 따뜻한 빵과 차가운 우유의 조합은 때웠다고 표현하기에는 완벽한 식사였다.

그녀는 어느새 빵을 다 먹고 우유를 마시고 내게 물었다. 말투는 가볍게 물어본 것 같지만, 그녀의 눈빛은 절대 가볍다고 표현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어떡할 거냐니…….

………..그러게 이제 어떡하지?

소니아의 물음에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어제 계획은 잠깐 구경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거였지만 계획이 꼬여버렸다. 다시 옥탑방으로 가야 하나?

어제 금방 돌아올 거라고 쪽지를 남기고 여기서 자버렸는데. 엘리사가 걱정하고 있지 않을까? 아니 엘리사가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나는 물기를 털어내는 개처럼 고개를 열정적으로 흔들었다.

아직 엘리사와 마주 볼 자신이 생긴 건 아니었기에 옥탑방으로 가는 것에 거부감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니아의 집에서 계속 신세를 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상관없다고 말한다고 그대로 들러붙어 살 정도로 철면피를 깔며 살지는 않았다. 워낙 나 자신이 남의 호의를 받는 것에 어색함을 느끼는 사람이기도 하고 말이다. 소니아의 배려는 고맙지만, 그 배려는 나 자신을 계속해서 나약하게 만들 것 같았다.

소니아는 내 이마를 톡 건드리며 내게 물었다. 표정을 보니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저기요.”

“아, 아. 어… 뭐라고 했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아직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에 한 번 더 되물어 보았다.

“이제 어떡할 거냐고.”

“아……….”

이제 어떡해야 할지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머리를 싸매며 끙끙거리고 있을 때 소니아가 입을 열었다.

“......고민되면 그냥 내 집에 있어도 돼.”

“어……?”

“너 지금 집으로 돌아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거잖아. 아냐?”

“맞아……”

“그렇게 고민할 거면 그냥 여기에서 있는 것도 괜찮아.”

“그런데 네가 불편할까 봐…….”

“네가 불편하면 어제 같이 자지도 않았어.”

그렇게 말하는 소니아는 부끄러운 듯 빨개진 볼을 손가락으로 긁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녀가 준 호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소니아의 제안은 내게는 너무나 고마운 제안이었다. 지금 나는 집으로 가기 두려운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집으로 가지 않고 여기서 잘수 있게 된다는 건 히든 선택지가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냐. 집에 가는 게 불편하기는 하지만 계속 신세를 질 수도 없으니까.”

나는 소니아의 제안은 에둘러 거절했다. 그녀의 집에서 잠깐 지낸다고 한들 언젠가는 옥탑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차피 돌아가야 할 거라면 지금, 불편할 때 돌아가는 것이 났다고 생각했다.

도피. 유혹은 달콤했으나 그 끝은 언제나 좋지 않았다. 실제로 나 또한 지금 도피한 죄를 받고있는 걸지도 모른다.

옥탑방에서 엘리사와 마주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엘리사가 없을 확률이 더 높기는 하지만.

“.......그래? 그래라 그럼.”

소니아는 대답은 투박하게 했으나 아쉬움이 묻어나오는걸 숨길 수는 없었다. 그래도 소니아가 나를 이렇게 소중히 대해준다는 것에는 언제나 기쁠 뿐이었다. 입가에 걸리는 미소를 느끼며 나는 빵을 마저 먹었다.

식탁을 정리하고 우리는 옥탑방으로 출발했다. 원래는 나 혼자만 갈려고 했지만 소니아는 아직 거리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나와 동행했다.

반짝거리는 고급스러운 거리를 지났다. 길거리에는 어젯밤 비의 영향으로 중간중간 웅덩이가 보였다. 거리에 돈을 많이 썼는지 신기하게도 인도에는 웅덩이가 보이질 않았다.

웅덩이는 달동네 같은 곳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점점 늘어났다. 길가의 웅덩이 중에는 내 생각보다 깊은 것들이 있었다. 소니아가 곁에 없었다면 아마 몇 번이나 빠졌을 것 같았다.

이곳 은 어젯밤 장대비가 내릴 때의 기억을 생각하면 무서운 곳이기는 했으나, 그만큼 내게는 익숙한 곳이기도 했다. 구조가 아니라 분위기 말이다.

“어서 오십쇼.”

우리가 들어서자 직원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언제나 참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작은 키와 자글자글한 손과 얼굴의 주름은 그의 나이를 대충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저 정도 먹으면 다들 저렇게 여유로워 지는 걸까.

내 나이도 대한민국에서의 삶을 포함하면 꽤 될 텐데도 내 안에서 여유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내가 앞으로 몇십 년 동안 더 삶을 살게 된다면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될 수 있을까.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우리는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계단에 있는 문을 열 때는 손이 살짝 떨려왔지만 애써 억누르고 문을 열었다. 계단이 변한 건 없었을 텐데 어째서인지 계단이 높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올라와서 주변을 둘러보니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소파와 탁자 위에 펼쳐진 천막의 존재랄까. 어제는 저렇게 펼쳐지진 않았는데. 아마 엘리사가 비가 오는 걸 보고 펼친 게 분명했다.

“그 미친년은 없는 모양이네.”

“......그러게.”

엘리사는 보이질 않았다. 그 사실에 안심하면서도 어딘가 맥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엘리사가 보이면 뭐라 말해야 할지 몇십 가지의 수를 생각했는데 말이다.

옥탑방의 문에 내가 걸어두었던 쪽지는 없어진 상태였다. 아마 엘리사가 가져간 거겠지.

어젯밤 엘리사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 확실시될수록 어제 소니아집에서 잔다는 사실을 알려줄걸, 하고 후회하게 된다. 물론 어제의 나에게는 그럴 정신이 없긴 했지만. 이 생각도 결과론적인 생각이겠지.

문을 열고 방 안을 보았다. 어젯밤과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책상 위의 물건도 접이식 식탁도 달라지진 않았다. 달라진 점은 깨끗하게 정돈된 침구류가 있었다. 정리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광경을 보니 어째서인지 짜증이 몰려왔다.

덮치려고 한 사람이 덮치려고 한 곳의 침구류를 깨끗이 정리한다라…… 뭐, 그럴 수 있지. 순간적으로 짜증이 몰려왔지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럴 수 있지.

침대에 걸터앉아 방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렇게 작고 조용한 공간에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지금 이곳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나와 소니아의 숨소리밖에 없었다. 진짜 아늑하구나 이 공간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제까지는 내가 앉아 있던 침대가 싫었지만, 막상 지금 앉아보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 공간이 싫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 공간을 싫어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이 공간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원래부터 아싸의 습성인지 나는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걸 좋아했다. 그런 나에게 이 공간은 꿈의 공간과도 같았다.

집 자체는 작아도 내가 앉아서 먹고 마실 수 있는 마당이 있는 집은 내가 갈구하던 장소였다. 이런 공간을 일시적으로 멀리할 수는 있어도 계속해서 증오할 수는 없었다. 낭만이 있는 공간 그 자체 아닌가.

그러면 내가 싫어한 건 뭐였을까. 이 침대도 이 공간도 아니면 대체 내가 싫어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엘리사? 나도 처음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날 밤 당시에는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나는 엘리사를 무서워할지언정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엘리사의 무엇을…….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

“어?”

“그렇게 얼굴 찌푸리면 주름 생겨. 얼굴 피고 살아.”

소니아는 인상을 써 주름진 이마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나도 혼자 너무 많은 생각을 했다는 걸 인지했다. 사람을 옆에 두고 이러는 것도 예의가 아닌데.

미안함에 그녀 쪽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딱히 상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말이다. 소니아의 배려에 감사할 뿐이었다. 소니아는 무심한 성격 같았지만 이럴 때는 속이 깊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지금의 소니아는 원작 소설에서 묘사되었던 소니아의 성격과 다른 면이 많았다. 나는 이런 변화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나를 소설처럼, 나를 자스민으로 알았을 때처럼 대했다면 꽤나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지도 몰랐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소니아의 집보다 낮고 볼품없었지만 나는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너무 깊은 생각은 나중에 해도 충분했다.

그래, 지금 이런 생각을 해 봤자 알 수는 없었다. 어차피 방금 생각의 종착지도 잘 모르겠다라는 뻔한 결론으로 흐를 게 뻔하기도 했고.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머릿속으로 아무리 고민해봤자 결론이 나는 경우는 적었다.

감정을 한마디로 정의하려 하는 시도 자체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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