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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35화 (35/120)

〈 35화 〉 침대

* * *

벌레들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늦은 새벽, 나는 아직도 잠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 잠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오늘은 좀 특별하다고 할 수 있었다.

“흐으………”

내 옆에서 연신 뒤척이고 있는 자스민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딘가 불편한 듯 계속해서 몸을 뒤척이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내 옷을 잡고 있는 왼손은 절대 놓지 않는 것이 어린아이 같아 인상적이었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손과 몸은 그녀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처음 이런 현상을 보였을 때는 곳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으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자 처음에는 싫어하는 듯 했지만, 곳 내 손길에 익숙해진 것인지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항상 이런 표정이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의 머리칼을 계속해서 쓸어넘겼다.

그녀가 괜찮아질 때까지.

이런 행동으로 그녀가 밝아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녀가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게 된다면 그걸로 괜찮았다.

그녀는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점점 더 내 쪽으로 안겨왔다. 이제는 왼손뿐만이 아니라 오른손마저도 내 옷깃을 잡았다. 처음에는 그녀의 손을 떼어낼까 생각했지만,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을 생각하니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내게 달라붙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달라붙는 게 너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다면야. 못할 것도 없었다.

오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비에 젖어 죽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죽음을 몇 번이나 경험한 사람의 눈빛이었다. 전쟁터에서 노장들에게 심심찮게 보이던 눈빛 말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의 눈빛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벌써 몇 번의 죽음을 눈앞에서 경험한 눈빛이었다. 그런 눈빛을 한 인간을 내가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벨리타 자스민. 나는 너를 알 수 없었다. 회귀했더니 예전의 모습은 어디 가고 나약한 사람의 모습이 되더니, 이제는 전쟁터에서 구른 노장의 눈빛을 하는 너를 말이다.

너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다른 것들은 대부분 내 예상대로였다. 미래의 기억이 있는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죽은 것도 아닌 자스민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달라졌다는 소문을 듣고 나는 연기라고 생각했다. 그년은 회귀를 했다고 본성이 고쳐질 년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녀를 처음 만나고 처음 느낀 감상은 그녀에게 한 번도 느낀 적 없던 순수함이었다. 내가 그녀를 압박했을 때의 반응도, 꼴에 하인이라고 지킨다는 엘리사의 반응도 내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내가 알던 ‘벨리타 자스민’이 아니었다. 한번 회귀한 세계에서 내가 모르는 것은 극소수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중 가장 의문 덩어리였던 자스민에 대해 알고 싶었다.

비록 회귀해서 내 실력이 녹슬었다고 해도 마법의 경지는 언젠가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스민과의 관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호기심을 가지고 자스민에게 접근했다.

그녀를 압박했음에도 그녀는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사실이지만 나는 더욱 그녀를 압박했다. 그럴수록 그녀가 다른 존재라는 게 확실시될 뿐이었지만.

그녀는 이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 세계에 섞이기에는 너무나 순수하고 어렸다. 나만 보면 몸을 움찔거리면서 쭈뼛거리는 모습을 보면 누구든지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부스럭—

자스민은 이제 얼굴을 내 몸에 박은 채로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리 편해 보이는 자세는 아니었기에 자세를 돌려주려고 했으나, 의외로 강력하게 내 몸에 붙어 있어 그러지 못했다. 저 마른 몸매에 이 정도의 힘이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자스민의 몸을 돌리는 것은 포기하고 그냥 내 자세를 그녀가 편히 잘 수 있게 돌려주었다. 이렇게 몸을 뒤틀면 내가 자는 게 불편해지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오늘 잠자리에 드는 것은 포기했다.

내가 몸을 돌리니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때마다 가슴에서 고동이 들려왔다. 불쾌하지 않고 편안하고 기분 좋은 고동이었다. 왜 이러지. 그 누구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느낌인데.

고민은 무의식의 저편으로 던져두고 나는 그녀가 이렇게 된 원인을 생각했다. 원인은 간단했다. 엘리사. 그 빌어먹을 광견 년이 저지른 짓이었다.

자스민에게 메이드란 새끼가 한 짓을 생각하면 기가 찼다. 너무 소중하다는 듯이 말할 때는 언제고 자스민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것을 보면 토가 올라왔다. 가면녀가 납치해서 그녀의 목을 조를 때보다도 말이다.

술에 못 이겨 제 주인을 덮치는 하인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술을 먹었다 해도 선이란 게 있는 법이었다. 술은 서로의 선을 말랑하게 만들어줄 뿐이지 선을 없애 주지 않는다. 뭐…. 애초에 믿으면 안 되는 족속들이었다. 그 미친년은 특히나.

자스민이 일어나면 그 미친년하고 떨어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스민이 내 말을 들을지가 의문이었다. 중간중간 엘리사에 대해 말을 걸어봐도 그녀는 그 미친년을 원망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옹호를 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녀가 이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말하는 투를 보면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내가 엘리사와 떨어지라고 말한다 한들 들을 것 같지 않았다.

꼴에 충견 코스프레는 열심히 했나 보다. 자스민이 덮쳐지고 나서도 이럴 정도니, 말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엘리사.”

그녀는 엘리사의 이름을 부르며 내 몸을 더 껴안았다. 내 몸을 껴안는 것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다만 엘리사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볼이라도 꼬집어야 하나 생각했지만 그만두었다. 나를 껴안으면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고 뭐라 하는 건 너무 비참한 행동이 아닌가. 그런 건 질투심이 많은 연인 사이에서나 할법한 행동이었다.

나는 팔을 펼쳐 자스민을 안았다. 내 행동에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이라고 치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별로 깊게 생각하고 싶은 주제는 아니었다.

내 손이 그녀의 등에 닿을 때 그녀의 몸은 살짝 움찔거렸지만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그녀를 품에 안으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 눈을 떠 보니 나는 소니아를 안고 있었다. 내 팔은 그녀의 등을 감싸고 있었고 내 고개는 그녀의 가슴팍에 묻은 채였다. 심지어 내가 원래 베고 있었던 베개는 어디 가고 소니아가 팔베개를 해주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머리를 한참 굴려보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분명 내가 잘 때까지만 해도…… 아니 내가 언제 잠들었지?

생각해보니 내가 잠에 언제 들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젯밤의 마지막 기억이라면 소니아 품속에서 질질 짜려는 걸 힘겹게 참은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 대충 지금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소니아에게는 계속해서 민폐만 끼치는 것 같아 마음 한켠이 무거웠다.

일단 일어나고 싶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만 그녀를 안고있는것이 아니라 그녀 또한 나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니아는 왼쪽 팔로 나를 감싸 안고 있었다. 움직이기 전까지는 그녀가 나를 안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살포시 나를 감싸고 있었다.

소니아를 깨워야 하나, 생각했지만 그냥 이대로 있기로 했다. 팔베개까지 해준 사람을 깨우고 싶지 않았기도 했고, 나 또한 지금 이렇게 서로 안고 있는 게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어났냐.”

그때 내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올리니 눈을 뜨고 있는 소니아가 보였다. 그녀의 눈은 방금 일어난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최소한 1시간은 깨어 있어야 볼 수 있는 눈빛이었다.

“일어나 있었어….?”

“어.”

대답하는 소니아의 목소리 또한 잠기지 않은 걸 보아 깬 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걸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아예 안 잤다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진짜 나 때문에 못 잔 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내 팔베개를 해준 상태로 내가 편하게 잘 수 있게 해준 것을 생각해보면 진짜 그럴 것 같았다. 소니아의 대한 걱정과 미안함이 닿았던 걸까. 소니아는 내 의문에 대답해 주었다.

“............나 때문에 못 잔 거는 아니지?”

“....괜한 걱정 하지 마. 그냥 내가 잠이 없어서 일찍 일어난 거니까.”

“그래……?”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소니아에게 마음의 짐들 중 하나가 줄어든 기분이었다. 그때 소니아는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일어나게?”

“글쎄……”

소니아의 물음에 나는 고민의 시간을 잠깐 거치고 대답했다.

“일단 조금 더 누워 있으려고.”

“그래……. 편하게 누워있어.”

소니아는 그 말을 하고 몸을 틀어 대자로 누웠다. 나 또한 그녀의 팔을 벤 채로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웠다.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침대에 누워 천장을 쳐다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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