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PTSD
* * *
소니아의 침대는 굉장히 컸다. 라지킹 사이즈보다 크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침대 매트릭스의 질 또한 내가 경험한 그 어떤 침대보다 좋았다. 내가 좋다고 감탄했던 벨리타 가문의 본가에 있는 내 침대보다 말이다.
이불 또한 보들보들하고 푹신해서 한꺼번에 껴안으면 인형을 껴안을 때의 감촉과 비슷했다. 이 정도면 침대에 집 한 채 값을 썼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며 빨개진 볼로 머리를 회전시켰다. 내가 위치한 곳은 소니아의 침대 안이었다. 돈을 쏟아부은 것 같은 소니아의 침대 말이다. 그것도 소니아와 같이 말이다.
“.........뭐하냐?”
소니아는 이런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소니아는 익숙한 건지 편안하게 턱을 괴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안다. 내가 이상하게 보인다는 걸. 그렇지만 지금 나는 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부끄러움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소니아아……. 나랑 자자…….’
시발시발시발시발. 그때의 나는 대체 어떤 생각이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아니, 거짓말이다. 내가 이런 말은 한것은 외로움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랑 자자 같은 연인이 유혹할 때 쓰는 말 같은 것을 쓸지는 몰랐다.
대.단.하.다.! 아까의 나!
사실 생각해 보면 나랑 소니아는 그저 친구 사이일 뿐이었다. 설마 친구 사이에 같이 자고 싶다고 한 말을 이상하게 들을 리가 없었다. 소니아가 엘리사처럼 갑자기 나를 덮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소니아는 술을 마시지 않았기에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때 소니아는 내 팔을 툭툭 건드렸다. 나는 뒤집고 있던 이불을 내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턱에 손을 괴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이불을 올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팔로 내가 이불을 올리려는 것을 막았다.
“야,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
“어, 어?”
“너한테 이상한 짓 같은 건 할 생각 없거든? 그냥 곱게 자라.”
그녀는 나를 이상한 놈을 바라보는 것 마냥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저게 정상이다. 보통 여자끼리인데 이런 상상을 하는 놈이 이상한 놈이겠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소니아에게 짜증이 났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내 얼굴을 이보다 더 뜨거울 수 없을 정도로 불타올랐다. 비슷한 사례가 있어서 조심한 건데 친구에게 이상한 놈으로 보인다는 게 너무 부끄러웠다. 나라고 좋아서 이런 상상을 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알고 있어…….”
“그래, 그런데 왜 그렇게 쫄아있어. 마치….”
소니아는 나를 한쪽 손을 들어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은 그동안 나를 쓰다듬었던 손길과 다르게 살짝 엘리사의 손길과 닮아있었다. 손길이 야릇하다는 뜻이었다.
“읏….!”
“곧 잡아먹힐 것처럼.”
그녀의 손길에 나는 눈을 꼭 감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눈을 감고 있던 탓에 나는 그녀가 지금 웃고 있는지, 진지한지, 나를 비웃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흣…….”
눈을 뜨고 싶었지만 지금 나는 내 머리에 느껴지는 소니아의 감촉만으로도 한계였다. 그녀는 내 머리카락을 조물조물하다가 내 귀를 만지작거렸다. 내 고막에는 그녀가 나를 만지는 소리가 일 순위로 들려왔다.
조심스럽고 야릇한 그 손길에는 묘한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엘리사 처럼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내 몸은 생각보다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런 나 자신이 신기하다 못해 이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만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마음 한편에는 불안함이 샘솟기 시작했다.
귓불
목덜미
그리고
“싫어….!”
나는 갑자기 들이닥치는 어젯밤의 기억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이불을 다시 내 머리 위로 끌어올렸다. 푹신한 이불 안에서 나는 엘리사를 쫓아낸 후처럼 떨고 있었다.
어째서?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지. 소니아의 손이 내 가슴 근처에 닿아서? 엘리사가 나한테 했던 것처럼?
“야…. 괜찮아?”
소니아가 말하는 것 같았지만 내 귓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웅웅거리는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그녀가 말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눈꺼풀을 내리고 두 손으로 두 귀를 막았지만 그런데도 소음은 더욱 심해져만 갈 뿐이었다.
소니아와 얘기하면서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나아져서 이 정도거나. 분명히 이 침대 위에는 나와 소니아밖에 없지만 내 위에 엘리사가 올라탄 것만 같았다.
“하…. 하….하악…!”
분명 눈을 감았을 텐데도 내 눈앞에는 엘리사가 보였다. 내 목덜미에 키스 마크를 남기고, 내 손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나를 범하려 했던 엘리사 말이다. 그때의 광경이 다시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것 같았다.
내가 두 손으로 막은 건 귀였는데도 나는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분명 내 목을 압박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텐데. 나는 점점 숨이 가빠 올랐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모두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이 모든 것이 환상이길 바랐지만, 아니 환상이겠지만 나는 떨려오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 몸을 감싸는 불안감은 지금 내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몸에서 나오는 열과 오한은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자스민 정신 차려!”
“ㅇ, 어, 어?”
“왜 그러는 건데.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 말을 해봐.”
눈을 떠보니 소니아는 내 두 손을 잡고 간절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갑자기 전개된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손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그녀가 잡은 내 손이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소니아에게 붙잡힌 채로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할까 한참을 생각했다. 힘들다고 징징거릴 수도 있었고 신경 쓰지 말라며 화를 내고 싶기도 했다. 자꾸만 들썩거리는 입을 진정시키며 나는 생각을 계속했다.
소니아가 내 두 손을 막아도 내 호흡은 정상으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엘리사가 내 손을 제압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더욱 괴로워질 뿐이었다. 내가 괜찮아지려면 대체 무슨 짓을 해야 할까.
사람의 온기. 지금 나는 사람의 온기가 고팠다. 내가 소니아의 집으로 간 것도 소니아에게 같이 자자고 말한 것도 모두 사람의 온기가 고팠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몸에 힘을 풀었다. 그 상태로 소니아를 향해 쓰러졌다. 소니아와 나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어깨 위에 머리가 올려졌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소니아…….”
“그래, 말을 좀 해봐.”
“안아줘……”
“.........뭐?”
“안아달라고.”
5분 뒤, 나는 소니아와 서로 껴안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큰 소니아의 품에 쏙 안겨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내가 두 손이 잡힌 채로 소니아에게 부탁한 것은 안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엘리사가 나를 덮친 이후 PTSD를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금 전 소니아가 내 몸에 손을 댔을 때 갑자기 일어난 감정변화를 내 머리가 따라지 못해서 혼란스러웠다. 방금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았던 소니아의 손길이 한순간에 기분이 나빠지는 걸 넘어 혐오스러워지기까지 했다. 나를 도와준 사람이라고, 고마운 사람이라고 마음속으로 외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엄살이다. 이건 내가 나약해서 생긴 감기 같은 곧 사라질 병일 뿐이다. 그런 생각을 계속해서 되뇌며 나 자신을 정상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의 끝이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소니아를 꽉 안으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떨쳐내려고 노력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은 내 정신에 이롭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행복하고 기뻤던 기억을 찾아다녔지만 그런 건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소니아를 꽉 안는 것 뿐이었다. 소니아 몸의 감촉이 소니아의 온기가 나를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줄 수 있기를 빌었다. 엘리사가 없을 때 나란 존재가 매달릴 수 있는 존재는 소니아 밖에 없었다.
가족사가 복잡한 소니아라면 나를 이해해 주지 않을까. 그녀에게는 실례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었다.
“.......이제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
소니아는 아까보다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녀가 나에게 이렇게 부드럽게 말하는 건 처음이기에 처음에는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녀의 이런 변화가 눈물이 나게 반가웠다.
“............몰라.”
“그래, 그러면 나아질 때까지 이러고 있어.”
소니아는 너무나도 상냥했다. 내가 그녀의 품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 만큼. 그녀의 자상함을 직접 겪어보니 어째서 많은 악역이 그녀의 매력에 빠졌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빌어먹게도 아름다운 인물이었다. 나는 그녀의 품속에서 한참 동안 안겨있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안 궁금해?”
“궁금해. 하지만 내가 준비가 될 때까지 충분히 기다릴 수 있어.”
…..진짜 그녀는 빌어먹게도 나에게 지나치게 상냥했다. 내가 그녀를 지나치게 의지할 것만 같았다.
“소니아.”
그렇게 나에게 상냥하게 대해주었던 소니아였기에 나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자홍색 눈이 내 앞에 보였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나에게 믿음을 주었던 만큼 나도 힘을 내야 했다.
“사실……”
나는 소니아에게 엘리사와 있었던 일에 대해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옳은 선택인지 엄청나게 고민했지만, 나를 이렇게 도와준 소니아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게 더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니아는 처음에는 흥미롭다는 듯이 경청했지만, 곧이어 엘리사가 나를 덮친 이야기를 할 때에는 그녀 스스로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게 보였다. 나는 소니아의 그런 감정표현이 오히려 내게 힘이 되어 주었다.
너는 내가 당한 일인데도 자기 일처럼 화를 내주는구나. 나는 소니아의 품에 고개를 묻고 나머지 일을 고백했다.
그녀는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내 말이 끝날 때 즈음에는 나를 부스러 질듯이 안아주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았지만 소니아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힘냈네.”
“응………”
소니아는 내 머리와 등을 쓸어내리며 나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그녀의 품 안에서 나오려는 눈물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었다. 지금 울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그녀 앞에서 펑펑 울어 그녀 맘에 짐을 더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눈물을 막기 위해 그녀에게 더욱 밀착했다. 내 눈물샘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액체를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소니아의 손길은 그런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그녀의 따스한 품속에서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잠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