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33화 (33/120)

〈 33화 〉 목욕

* * *

소니아의 집에 가기로 결정한 후, 소니아와 나는 바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원작소설에서 그녀는 테오도르의 기숙사에서 살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테오도르 안에 있는 주택에서 지낸다고 한다.

세상이 무너질 듯 내리던 비는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물러가는 구름과 달리 바닥에 생긴 물웅덩이는 아까까지만 해도 비가 내리고 있음을 알려주는 흔적의 역할을 했다.

움직이지 않던 다리도 소니아가 치료를 해준 덕분인지 문제가 없었다. 젖은 옷이 걸렸지만, 그마저도 내 생각보다 빨리 말라가고 있었다. 이것도 마법 덕분인가?

우리는 우중충한 골목길에서 고급스러운 저택이 보이는 조용한 길가까지 걸었다. 가로등도 잘 없던 골목길과는 다르게 일정 거리마다 고급스러운 가로등이 설치돼 있었다. 도로의 포장 상태나 청결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 구역은 대부분 귀족들이나 돈이 정말 많은 상인만 살 수 있는 곳인데…. 소니아가 돈이 그렇게 많았나 싶었지만, 회귀를 했으니 돈을 쓸어 담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지.

소니아의 집은 여기에 있는 웬만한 집보다 큰 규모를 자랑했다. 또한 상당히 최근에 지어진 듯 몇십 년씩 된 주변 집들에 비하면 세련되어 보였다. 소니아는 익숙한 몸짓으로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는 그 뒤를 어미 닭을 뒤쫓는 병아리처럼 열심히 따라갔다.

“.....들어와.”

“어, 어…….”

머뭇머뭇거리며 나는 소니아의 현관을 넘었다. 현관을 넘자마자 상쾌한 공기가 확 풍겨왔다. 비가 내릴 때의 꾸덕꾸덕한 공기가 아닌 상쾌한 공기를 맡으니 불쾌 지수가 확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바닥이 젖는 건 상관없으니까 그냥 들어와.”

소니아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어딘가로 가 버렸다. 어디로 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거실을 가보기로 했다.

거실의 광경은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었다. 거실은 넓고 깨끗했지만 많은 가구가 있지는 않았다. 소니아는 미니멀리스트인가 보네, 라고 생각할만할 정도였다.

소파와 책상, 스피커를 제외하고는 딱히 주목할 만한 것은 없었다. 아 하나 더 있기는 했다. 구석에서 빛이 나는 정체불명의 기둥. 저게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여의봉처럼 생겼는데 군데군데 금이 가 있었고 금 사이로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궁금함에 나는 더욱 앞으로 다가가 그 물건을 알아보았다. 그 기둥으로 다가갈수록 공기가 더욱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아마 이 집에 올 때부터 느낀 상쾌한 공기의 원인이 이 기둥인 것 같았다.

원리가 뭐지? 이 세계에서 내가 보았던 물건들 중에 가장 궁금한 물건이었다. 마법진이 새겨진 것 같지도 않고 이 금속인지 돌인지 알 수 없는 물체의 특성인 것 같지도 않았다. 틈에서 해안가에 치는 파도처럼 일렁이는 불빛은 내 궁금증을 더욱 가중시켜 주었다.

“뭐하냐.”

“아, 소니아. 이거 뭐야?”

마침, 내 뒤에서 소니아가 나타났길래 물어보았다. 소니아는 한번 기둥을 쓱 훑었다. 소니아는 기둥을 한번 만지며 말했다.

“유물. 공기를 정화해 주는 거야.”

“아 어쩐지. 어디서 얻은 건지 물어봐도 돼?”

“........여기서 동쪽에 있는 칼리다 해역에서 뽑아온 거야.”

“뽑아왔다고?”

“....어.”

상당히 날씨가 거칠다고 알려진 칼리다 해역인데…. 그보다 뽑아왔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일까. 말 그대로의 의미인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서 더욱 예측이 안 되었다.

“자, 네가 입을 옷.”

여러 가설을 세우고 있을 때 소니아는 내 앞에 옷가지를 내밀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던 건 뒷전으로 미루고 소니아에게 감사를 표했다. 소니아가 준 옷은 하얀색의 파자마였다. 소니아가 이런 순백의 파자마를 가지고 있다니. 놀랄 따름이었다.

“아…. 고마워.”

“최대한 작은 옷들을 찾아보기는 했는데……. 그래도 좀 클 거야.”

“아냐, 이거면 충분하지 뭘.”

소니아의 뒤를 따라 욕실에 도착했다. 욕실의 내부는 이 집에 규모에 걸맞게 상당히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5명 넘게 들어가도 넉넉할 것 같은 크기의 욕조는 내가 보았던 그 어떤 욕조보다 좋아 보였다.

욕실 안에 있는 수건걸이에 갈아입을 옷을 놔두고 나는 씻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빤히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뒤를 바라보니 소니아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다른 옷가지를 들고 있었다.

“소니아?”

“...왜.”

“손에 든 거는 뭐야?”

“씻으려고 들고 있지 그럼 뭐 어쩌려고 들고 있겠냐.”

?

나랑 같이 씻는다고? 순간적으로 머리의 회전이 멈추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눈은 흔들리고 몸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물론 상황만 보면 여자끼리니까 별로 상관이 없긴 하다. 상황만 보면 말이다.

문제는 내가 순도 100% 여자라고 보기에는 살짝 어려움이 있다는 점이다. 평생 여자와는 접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나, 그러니까 자스민의 몸 같은 경우도 거울 속에 비친 몸을 보는데 익숙해지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같이 씻는 거는 부끄러웠다. 특히 소니아라는 인물하고는 말이다. 차라리 엘리사하고……. 이건 아닌가. 어쨌든 나는 완곡히 거절하기 위해 여러 제안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야, 뭐하냐.”

“ㅇ, 어?”

“너 또 이상한 거 생각하고 있지.”

“어………”

소니아는 내게 성큼 다가와 나를 바라보며 나를 압박했다. 그 눈빛이 살벌해 나는 그녀와 눈도 쉽사리 마주치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소니아와 제대로 눈을 마주 본 게 얼마나 되나 싶다.

“그……. 같이 씻는 건 조금 불편해서…….”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악!”

그녀는 내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그녀 딴에는 힘을 조절한 거겠지만 나에게는 그것도 죽을 만큼 아파져 왔다. 이마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는데 맞은 부위가 따뜻한 게 너무나 열이 받았다.

순간적인 고통에 눈물이 핑 돌았다. 씨, 내가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소니아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전에 내 이마에 딱밤을 먹인 손인데도 나는 마음이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도 참 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랑 같이 안 씻을 거야 인마.”

“.......그래?”

“그래. 나는 2층에 있는 욕실로 갈 거야.”

그녀의 말을 들으니 마음 한구석에서 괜스레 짜증이 몰려왔다. 진작 좀 말해주지. 사람을 이상한 놈으로 만드네. 분명 내가 먼저 설레발을 친 건데 도 불구하고 소니아에 대한 짜증이 밀려왔다.

“하여튼 씻어라. 씻고 나왔는데 내가 없으면 이 집이나 둘러보고 있어.”

“그래…….”

소니아는 그 말을 하고 욕실을 나갔다. 소니아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나는 욕실의 문을 잠갔다. 잠그지 않아도 상관없었으나 나는 굳이 잠금장치를 걸었다. 그 후에야 나는 드디어 목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큰 욕실에서의 목욕은 정말 오랜만이었기에 나는 더 없이 만족을 할 수 있었다. 옥탑방과는 물과 수압 차이가 말도 안 됐다. 욕조 안에서의 일분일초가 나에게는 귀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끈적한 빗물로 적셔진 몸을 따뜻한 온수로 쓸어내리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평소에 나는 욕실에 시간을 많이 쏟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 많아서였는지 욕조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소니아가 전해준 파자마는 나에게 조금 큰 편이었다. 손이 안 보일 정도였다. 나는 잠옷은 살짝 큰 사이즈를 좋아하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더 좋다고 할 수 있었다.

파자마를 입고 나와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소니아는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꽤 오랜 시간 있었던 것 같은데 체감상 그런 것 뿐이었나. 거실 소파에서 머리를 말리며 나는 뭘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상관없지만, 이 집에 무엇이 있는지 탐험하고 싶었다. 소니아도 상관없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나는 몸을 일으켜 이 집을 구석구석 탐험하기 시작했다.

거실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소니아는 확실히 미니멀리스트인 것 같았다. 방 대부분은 비어 있었고 침실 같은 경우에도 침대와 옷장 하나만 달랑 있었다. 소니아가 물욕이 없는 사람이라는 게 확실히 체감되었다.

“여긴 뭐지…?”

그런데 한 방은 달랐다. 문을 열자 수많은 책과 그림이 나를 반겼다. 책들은 대부분 마법과 관련된 책이었고 그림들은 옛 신화의 그림이거나 마법진을 그려놓은 그림들이었다. 여기가 소니아의 연구실인가.

깔끔 하다못해 삭막하기까지 한 다른 방들과 이 방은 다르다는 게 확 느껴졌다. 저 많은 책장에도 다 들어가지 못해 바닥에 쌓아둔 책, 책상에 어질러서 있는 종이와 그림들은 나에게 희미한 열기까지 느끼게 해주었다.

소니아가 지금까지 했던 노력이 어떤 것이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로 열심히 한다니 소니아에 대한 존경심마저 드는 것 같았다.

연구실을 조금 더 구경하고 밖에 나오는 순간 소니아와 마주쳤다. 소니아는 내가 이곳에서 나왔다는 것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안녕?”

“.....그래. 집 구경은 다 했어?”

“어어. 집 좋더라.”

“고맙네.”

우리는 거실로 내려가 소파에 앉았다. 소니아는 주방에서 음료수를 만들어 가져와 내게 가져다 주었다. 간단한 레모네이드 였지만 목욕을 하고 먹으니 이보다 더 맛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음료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소니아와의 대화는 꽤 즐거웠는데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미 시간이 늦어 금방 끝내야 했다는 점이었다.

“너 침실 가봤지?”

“어, 침대 좋아 보이더라.”

“네가 거기서 자.”

“너는?”

“나는 여기 소파에서 잘게.”

소니아는 그렇게 말하고 등을 뒤로 눕혔다. 이 소파는 굉장히 푹신하고 편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여기에서 자게 내버려 두는 건 마음이 걸렸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자러 가. 여기서 한두 번 자본 것도 아니거든.”

그녀가 말을 그렇게 해주었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소니아는 이미 나를 위해 충분히 힘을 써주었는데 더 민폐를 끼치기 싫었다. 물론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었다.

혼자 자는 것이 싫었다. 그동안 옥탑방에서 엘리사와 함께 자다 보니 그런 것도 있지만, 오늘 같은 날에 그렇게 큰 침대에서 혼자 잠을 청하는 건 무서웠다. 나는 소니아의 옷자락을 붙잡고 작게 속삭였다.

“소니아…..”

“......나랑 자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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