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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32화 (32/120)

〈 32화 〉 나무 아래에서

* * *

“.....안녕 소니아.”

“하아, 안녕 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소니아는 한숨을 쉬며 내 팔을 잡고 날 일으켰다. 소니아가 날 일으켜 주었지만 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계속해서 픽픽 쓰러지기 일쑤였다. 결국은 소니아가 한쪽 손으로 내 허리를 잡아 지탱해주고 나는 엘리사의 몸에 기대게 되었다.

소니아는 한쪽 손으로 우산을 들고 있었기에 양손을 쓰지 못했다. 나는 거의 끌려가듯이 그녀와 골목길을 걸어갔다.

소니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내 다리로 걸으려고 해봤지만 헛발질만 해 오히려 그녀에게 민폐가 될 뿐이었다. 젖어 있는 내 옷 때문에 점점 젖어가는 소니아의 옷가지를 보고 있으니 죄책감은 더해져만 갔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하하……. 미안…….”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더없이 초라한 내 모습을 되짚어보니 처량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비에 홀딱 젖은 채로 미아가 돼서 친구에게 구조받는 꼴이란. 내 인생에 이 정도로 비참한 기분을 느껴보는 건 손에 꼽았다.

“웃음이 나와 지금?’

“아야야야야……”

소니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짜증을 내며 말했다. 동시에 내 허리를 잡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갑자기 가해진 힘에 나는 별 의미 없는 신음만을 흘려댔다.

“아파… 소니아…”

“닥쳐.”

내 항의를 한 단어로 일축한 소니아는 꿋꿋이 골목길을 걸어갔다. 말은 그렇게 해도 팔에 힘을 빼준 데에서 소니아의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한참을 가도 도착할 수 없었던 대로변을 소니아는 10분 만에 도착해 버렸다. 평소에 길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주변 사람을 보니 나는 지독한 길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니아는 나무 아래에 있는 벤치에 나를 앉혔다. 나는 시체처럼 의자 위에 풀썩 쓰러졌다. 소니아는 혀를 한번 차더니 다리를 굽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워낙 사람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성격이라 눈알을 이리저리 돌렸지만 소니아 에게는 소용없었다.

“후우……. 그래서 네 옆에 붙어 다니던 그 새끼는 어디 있는데.”

“어……. 나도 잘 몰라.”

“뭐?”

내 말에 소니아는 놀란 듯 소리를 높였다. 아카데미를 등하교할 때를 빼면 항상 엘리사와 붙어 다녔으니 소니아의 의문도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동안 엘리사는 나와 함께 있는 게 당연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엘리사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내가 엘리사의 위치를 모른다는 답변을 하면서 나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야, 걸 지금 말이라고—”

소니아는 내게 짜증을 내려다 그만두었다. 내 말이 거짓인 줄 알았지만, 거짓이 아니란걸 눈치챈 것 같았다. 금방 눈치채 주어서 다행이었다. 지금 소니아가 나에게 윽박지른다면 당장이라도 울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내 눈에서 흐르던 눈물은 어느새 멈춰있었다. 소니아를 만나서 그런가. 뭐가 되었든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 모를 수 있지. 그러면 골목길에 왜 쓰러져 있었는데.”

“산책 삼아 들어갔는데 길을 잃어버려서……”

“......어제 노엘이 한 말은 듣긴 했냐?”

“나 납치한 가면녀 얘기 말이지.”

“그걸 알면서 혼자서 골목길로 기어서 들어가냐?”

처음에는 화를 제어하는 것 같았지만 소니아는 나와 말을 섞을수록 화를 참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았다. 나 또한 소니아와의 대화를 거듭할수록 내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소니아는 한동안 내가 했던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가면녀가 내가 헤맸던 곳 근처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막 윽박지르는 게 아닌 논리적으로 내 행동이 얼마나 멍청한 행동이었는지 설명하니 반박도 못 하고 듣고만 있었다.

내가 했던 행동은 그냥 나 잡아가 주세요 하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는 행동이었다. 소니아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죽었거나 가면녀가 잡아갔겠지. 이런 생각을 할수록 소니아에 대한 고마움이 솟아올랐다.

소니아는 숨을 몰아쉬고 고개를 내리다가 내 무릎의 상처를 보았다. 그녀는 이제는 기가 찬다는 반응이었다. 나를 한번 흘겨보더니 내 무릎을 손으로 덮었다.

“읏……!”

무릎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따가움 때문에 몸이 흠칫하고 굳어버리고 말았다.

“무릎은 왜 까지고 지랄이냐.”

소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내 무릎에 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아직 상처 부위에 딱지가 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마법으로도 치유할 수 있었다. 그녀의 이런 상냥함을 느낄 때마다 고마움이 넘쳐 죄책감으로까지 번지는 것 같았다.

소니아는 상처가 없어진 내 무릎을 보고 손에 묻은 피를 자기 옷에 닦았다. 그녀는 굽혀있던 다리를 펴고 내게 말했다.

“일단 너희 집으로 가?.”

“싫어.”

“뭐?’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와버리고 말았다. 소니아의 말대로 집으로 가는 게 맞는 판단이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내 입에서는 다른 대답이 나와버리고 말았다.

집에 가기 싫었다. 집에 가면 있을지도 모르는 엘리사를 보기 싫었다. 방 크기의 3분의 1을 차지한 침대를 보기 싫었다. 그 침대를 보면 내가 어젯밤 당했던 일이 바로 떠오를 것 같았다. 잔뜩 젖어버린 몸뚱이를 이끌고 옥상까지 올라가기 싫었다.

이게 말도 안 되는 투정이라는 건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본다고 객관적인 선택을 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 내가 떼를 쓰는 것 처럼 말이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가며 나를 도와준 사람 앞에서 떼를 쓰고 있었다. 이 얼마나 쪽팔린 행동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나는 내 의견을 굽히기 싫었다. 사춘기 소녀 같은 행동이지만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었다.

소니아는 내 당돌한 대답에 할 말을 잊어버린 듯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꽤 따가워 나는 한번 그녀를 올려다보고 바로 눈을 내려 깔았다.

“너…. 그 새끼랑 무슨 일 있었냐?”

“하하….”

소니아는 한 번에 핵심을 짚어내었다. 나는 소니아에게 차마 덮쳐질 뻔해서 어색해졌어 라고는 말하지 못했기에 애매한 웃음으로 대체 했다.

“.....그래, 그럼”

기묘한 대치 상황에서 먼저 말을 꺼낸 건 소니아였다. 소니아는 의외로 더 별말을 하지 않고 내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 그 사실이 조금 신기했다. 올려다본 소니아의 표정은 체념한 표정도 아니었기에 더욱.

소니아는 내 옆에 풀썩 앉았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아래로 내렸지만, 그녀는 별로 상관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야.”

“.......어?”

“네가 그 새끼랑 무슨 일이 생겨서 집에 안 들어가려는 건 알겠어. 안 들어갈 거면 오늘 밤은 어디서 자게.”

“..............”

계획 같은 건 없었다. 내게 남은 선택지는 남은 돈으로 잘 수 있는 여관을 알아보거나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방법뿐이었다. 남은 돈마저도 얼마 남지 않아 숙박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네가 집에 안 들어가든 어쨌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소니아는 한번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지금 너를 내버려 두고 갈 수도 없을 것 같다.”

“.....에?”

그 말을 하고 머리를 벅벅 긁는 소니아는 이런 말을 하는 게 부끄러워 보였다.

“니 계획이라는 게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여관을 가는 거거나 길거리에서 자는 거 같은 거겠지”

“......아닐 수도 있잖아.”

“아니야?”

“.............”

“어휴…….”

한심하다는 듯이 숨을 내뱉는 소니아의 행동에 나는 아무런 제지를 할 수 없었다. 엄연한 사실이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그럴듯한 계획을 세워둘 걸 그랬나. 쪽팔리게 이게 뭐야…….

소니아는 내 고개를 돌리게 해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주위의 불빛이 별로 없어 확실하지 않지만 소니아의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던 것 같았다.

“내 집에서 자고 가라.”

“뭐라고?”

소니아의 말은 들었지만, 혹여나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물어보았다. 이제는 소니아의 볼 뿐만이 아니라 내 볼마저도 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그럴 거면 내 집에서 자라고.”

그래. 내가 잘못 들을 리가 없었지. 나는 내 청력에 감탄했지만, 그와 반대로 내 머리는 초토화되기 직전의 상태였다.

“ㅇ, 왜?”

“뭘 왜야. 네가 집에 가기는 싫어하는 주제에 세운 계획은 터무니없으니까 그렇지.”

“그, 그래도……”

“야, 넌 내 집에서 자는 게 싫어?”

싫지 않았다. 소설 주인공의 집은 어떤지 궁금하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좋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부끄러운 기분은 왜일까. 소니아가 이렇게 부끄러워 하니 나까지 부끄러워지는 것 같았다.

“아, 아니…”

“그럼 됐네.”

그렇게 말한 소니아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내 손에 따뜻한 기운이 맴도니 적응이 잘되지 않았다.

“네 집에서 자기 싫다며. 나도 네가 땅바닥에서 자는 게 싫거든. 내 집으로 와서 자.”

분명 친구끼리의 대화일 텐데…. 원래 남자였던 나는 제외 하더라도 지나치게 빨개진 소니아의 반응을 보면 나까지 긴장될 정도였다.

뭐……. 하루만이라면 괜찮겠지…….

“................그래, 좋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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