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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31화 (31/120)

〈 31화 〉 비

* * *

“아……….”

일어나자마자 어제의 기억들이 머리에 혜성처럼 충돌했다. 술을 먹은 탓일까 꼬인 실타래처럼 기억들이 뒤섞여버렸다.

뒤섞인 기억을 재조합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머리에 양손을 갖다 대면서 어젯밤에 기억을 재조합하느라 애썼다.

어젯밤에는 대부분 기분이 좋은 일이 대부분이었지만 마지막에 있었던 일이 그전에 있었던 기억들에 먹칠했었다.

그동안 생각만 하던 루프탑을 완성했고 소니아, 노엘과 같이 고기도 구워 먹었다. 이렇게 즐거운 일이 많았지만 좋지 않은 기억은 딱 하나였다. 엘리사가 술김에 나를 덮쳐 버린 것이었다.

엘리사의 갑작스러운 행동 덕분이었다. 어젯밤 엘리사의 술주정을 온몸으로 겪고 나니 엘리사와 두 번 다시는 술을 먹고 싶지 않아졌다. 일단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였다. 신선한 공기를 맡으며 심호흡을 하니 점점 침착해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엘리사가 나라는 사람을 그저 경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사회생활 짬밥이 몇 년인데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술을 먹은 엘리사의 저돌성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엘리사가 술이 그렇게 약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소니아처럼 술병째로 들고 마실 것 같았는데 나만큼이나 술이 약할 줄을 몰랐다. 늑대를 키울 거면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내 패착이었다.

어젯밤 엘리사와의 사건이 있기 전에는 기분이 너무 좋았었기 때문인지 엘리사에게 느낀 배신감도 더 커진 것 같았다. 나를 지킨다 어쩐다 했으면서 자기가 위협하면 어쩌겠다는 걸까.

물론 엘리사를 가까스로 떼어내고 나서의 내 반응도 살짝 지나친 감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강제로 덮쳐진다는 감각을 몰랐기에 더 과민반응을 한 것 같았다.

어젯밤의 사건으로 엘리사를 증오하거나 혐오하게 되진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동안 나를 뒷받침 해준 사람이기에 이 정도로 내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당장 엘리사와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러고 보니 엘리사는 어딜 간 거지. 설마 밖에 소파에서 자고 있는 건가? 밖에 문을 열면 엘리사가 있을 수도 있었지만, 가만히 앉아 생각만 하는 것 보다는 나았다.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청소를 열심히 했던 탓인지 어제 파티를 했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소파를 향해 걸어가면서 엘리사를 찾아보았지만 엘리사는 보이질 않았다.

소파에 자그마하게 남아있는 온기를 봐서는 여기에서 밤을 지낸 것 같긴 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엘리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잘못을 저질러 놓고 멀리 떠날 사람은 아니었다.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을것 같지는 않았다. 저번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기에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저번처럼 엘리사와 마추칠때, 자살로 협박을 할까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나 자신의 마음도 준비가 필요했기에 그만두었다.

일단은 우리 둘 다 이런 거리감이 괜찮을 수도 있었다. 지금은 말이다. 소파에 앉아 앞으로의 일을 어떡해야 할지 생각했다. 술을 먹고 난 다음 날이라 그런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저 방 안에서 하루를 고독하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밖에 나가볼까. 방 안에 혼자 있기 싫다는 생각은 외출이라는 수단을 제시했다. 나쁘지 않은 해결책 같았다. 날씨도 나쁘지 않았고 거리를 거니다 보면 내 우울함도 좀 잊히지 않을까.

우선 방에서 종이와 펜을 찾았다. 엘리사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나 내 근처에 있을 것 같기는 했다. 혹시 엘리사가 내가 없어졌다고 놀라면 안 되니까 놀러 간다고 적어두기로 했다.

‘엘리사, 나 밖에 갔다 올게.’

이 정도면 되겠지. 종이를 문고리에 끼워두고 나는 방에서 지갑만을 챙기고 빠르게 집에서 나왔다.

나 스스로 자신의 추진력에 놀랄 정도였다. 스스로 우유부단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은 경험에 따라 변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하루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한들 거리의 풍경이 바뀌지는 않는다.

나는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몸을 이끌고 여러 곳을 거닐었다. 모두 내게 즐거움과 만족감을 어느 정도 주었지만 내 우울감을 날려주지는 못했다. 아니 어쩌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미스티 거리를 거닐면서 마법 도구를 구경해도, 시장가에서 군것질해도, 공원에서 나무 밑에 앉아 도시를 구경해도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혼자인 것에는 이미 적응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동안은 외로움에 익숙해진 것일 뿐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요즘 외로움 대신 따뜻함을 느끼며 살았다 보니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더욱 잘 느끼는 것 같았다.

엘리사의 빈자리가 느껴졌지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금 엘리사를 생각하면 스스로가 비참해질 것만 같았다. 혼자서 노는 방법도 까먹다니. 아싸의 수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공원의 나무 밑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우중충 해진 하늘은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불어오는 칼날 같은 바람은 시원했지만 불안함을 유발하기도 했다.

슬슬 일어나야 하나. 내 아래에는 내가 먹었던 꼬치의 잔해가 남아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원에서 나갈 준비를 했다. 나무막대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손을 씻었다.

원래라면 이쯤에서 집에 가는 게 좋겠지만 아직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왕 밖에 나왔으면 뭐라도 의미 있는 경험을 건져가고 싶었다. 평소에 밖에 잘 돌아다니지 않았기에 생긴 습관이었다.

일단 걸으면서 생각해볼까. 그렇게 결정하고 공원의 후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원을 나오고 어디를 갈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가보지 않았던 곳이든 어디든 상관하지 않고 걸었다. 어디를 갈지는 모르지만 알 수 없기에 더 흥미롭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보통 인생이라는 것들이 그러듯 말이다.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지만.

단순한 변덕으로 시작한 산책은 내 다리가 저려올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발이 닿는 곳으로 갔지만 점점 가보지 않았던 곳에 흥미가 생겼다. 평소 가보지 않았던 골목길이나 으슥한 곳 말이다.

아무리 테오도르의 치안이 좋다고 해도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특히 나 같은 경우에는 나 때문에 기숙사에 불까지 지른 가면녀씨 덕분에 더 위험했다.

그럼에도 나는 주저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어째서일까, 엘리사가 내 곁에 없었기 때문일까, 그냥 생각이 없던 것일까, 아니면 아까 술집에서 마신 술 한잔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그게 원인 같지만. 어두운 골목길에 자그마한 주점은 반칙이잖아. 막 오픈할 때 들어가서 서비스로 과자도 잔뜩 먹었다. 어젯밤에 술을 먹었기에 몸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욱여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목적지 없는 산책을 하던 중 내 머리에 차가운 물기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손을 뻗어보니 작은 물방울들이 떨어지는 중이었다. 손바닥에 물방울들이 통통 뛰듯이 닿는 느낌은 간지러우면서도 그리웠다.

비가 내리려고 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의 내가 맞는 첫 비가. 공원에서부터 하늘이 우중충하더니 결국 구름이 무게를 버티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비를 우산도 없이 맞는 건 얼마 만인지.

어렸을 때 우산을 살 돈도 없어 맞고 다닐 때의 기억 덕분에 나는 비가 올 때면 항상 우산을 썼었다. 홀딱 젖어버린 옷가지와 내려앉은 머리, 내 몸에서 나는 묘한 비 냄새가 나는 지독하게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비를 맞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워낙 오랜만에 맡아보는 냄새인지라 그렇게 싫어했던 비 냄새도 나쁘지 않았다. 가만히 비를 맞고 있으니 해방감도 들고, 말이다. 나는 비를 맞아가며 걸음을 옮겼다.

……...방금 말 취소. 방금 내가 했던 말은 비가 물대포처럼 미친 듯이 쏟아지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잔잔하게 내리던 비는 점점 약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내리는 장대비에 나는 사고가 정지해 어버버 거린 나머지 비로 온몸을 샤워해 버렸다. 해방감은 무슨 피부에 밀착한 젖어버린 옷들은 구속복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비 냄새까지는 아직 괜찮다는 점이었다. 회색 도시 안은 아니어서 그런 것일까.

털썩—

“악! 아야……”

골목길을 빠져나가던 중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버렸다. 원래라면 다시 중심을 잡았을지도 몰랐지만, 물에 푹 젖은 옷의 무게는 내 몸을 가누지 못하게 만들었다.

꼴사납게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것조차 힘겨웠다. 한번 쓰러지니 온몸에 힘이 확 빠지는 느낌이었다.

바닥과 마찰하여 까진 무릎을 잡고 겨우 일어섰다. 젖어버려 천근과도 같은 머리카락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새까매진 하늘은 내리는 비조차 보이질 않았다. 그래도 구름 사이로 삐져나오던 햇살은 자취를 감쳐버리고 달빛은 보이지도 않았다. 안 그래도 처음 가보는 골목길이라 가로등 같은 것도 없었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곳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감을 따라서 대로변으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외곽을 맴돌고 있었다. 나는 테오도르라는 도시 안에서 미아가 돼버렸다.

미치겠네. 나는 지붕 아래에서 비를 피한 채 쪼그려 앉으며 생각했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때문에 내 주위에 뭐가 있는지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만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계속되는 폭우에 주위 온도는 떨어저만 갔다. 젖은 옷 때문에 피부는 얼음장 같았다. 추위에 내 이빨은 딱딱거리는 소리를 냈다. 추워질수록 몸을 말아서 온기를 보존하려 했지만 강하게 부는 바람은 그것마저 앗아갔다.

몸이 차가워질수록 눈은 계속해서 감겨왔다. 손가락과 발가락의 감각이 없어지고 팔다리가 굳어갈수록 이상하게도 내 몸은 포근해졌다. 지금 이 포근함에 넘어가면 안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내 눈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물이 내 눈물인지 젖은 머리카락에서부터 내려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내 몸은 천천히 흐르는 눈물과 함께 차가운 시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럴 거면 가만히 집에 있을걸. 그런 생각이 내 뇌리를 스쳤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데 지금 내 꼴이 딱 그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럴 거라면 어젯밤 엘리사를 막

“.......여기서 뭐 하냐.”

“.............어?”

그때, 내 앞에 나타난건 우산을 쓰고 있는 소니아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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