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30화 (30/120)

〈 30화 〉 질투 그리고 술

* * *

여차저차 시장에서 여러 물품을 다 산후 우리는 옥탑방에 도착했다. 시장에서 간단한 군것질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옥탑방에 도착할 때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우리가 샀던 물건들은 마당에 놔두고 우리는 방 안에 들어갔다.

방의 불을 켜자 내가 기억하고 있던 방의 모습이 드러났다. 작은 방이지만 짐이랄게 별로 없었던 탓일까 휑하니 비어있는 방의 모습은 조금 쓸쓸해 보였다.

나는 익숙하게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엘리사도 아직은 조금 어색해 보였지만 방에 들어와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빠르게 짐을 챙기고 밖으로 나가 상을 필 준비를 하러 나갔다. 반면 소니아와 노엘은 현관에 서서 멍하니 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야, 아니 이게……. 하…….”

소니아는 입가를 매만지며 할 말을 삼키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표정이 내 생각보다 심각해 보였기에 나는 입을 닫고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노엘 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노엘은 방을 쭉 살펴보더니 나를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쏘아보기 시작했다.

“친구야, 이렇게 좁은 데서 살면 불편하지 않아?”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안정감이 있어서 오히려 좋아.”

“친구야, 벨리타 가문이 망했니?”

“잘나가고 있거든?”

노엘은 내 대답을 듣고 뭐가 그리 어지러웠는지 이마에 손을 갖다 대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면서 한쪽 팔꿈치로 소니아의 팔을 툭툭 치기 시작했다.

“.....뭐 어쩌라고.”

“뭐라고 말 좀 해봐. 아무리 다른 사람이라지만 이게 말이 돼?”

“나도 모르겠으니까 저리 꺼져봐.”

소니아는 노엘을 현관에서 밀어내어 집에서 내쫓았다. 그러더니 신발을 벗고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

“정말 이런 조그마한 곳에서 사는 게 괜찮냐?”

소니아의 말에는 의문과 걱정이 동시에 들어있었다. 그 사실에 기쁨이란 감정이 들었지만 티를 내지는 않고 조용히 소니아의 물음에 대답했다.

“어. 나는 너무 넓은 집보다는 이렇게 작은 집을 더 좋아하거든.”

“......그래. 그러면 다행이네. 그래도 여기는 너무 좁으니까 이번 연도 까지만 살아라.”

소니아는 내 머리를 벅벅 쓰다듬었다. 소니아의 이런 손길은 익숙해졌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었다. 소니아는 곧이어 앉아있던 침대에 풀썩 눕더니 팔을 머리 쪽으로 올려 벽에 손을 닿게 했다.

“뭐해?”

“집들이 선물.”

소니아가 벽에 손바닥을 갖다 대자 벽에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여러 색으로 바뀌어 가며 나타난 마법진은 여러 번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마법진에서 뻗어나가는 선으로 된 회로들이 집을 감싸 안았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소니아를 따라 침대에 철퍼덕 누웠다. 여러 방향으로 나아가던 회로들은 이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뭘 해준 거야?”

“간단한 방어 마법. 이제 이 방은 웬만한 충격에는 다 견딜 수 있을 거야.”

소니아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내용은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이 짧은 시간에 방어 마법을 시전했다고? 소니아의 마법은 볼 때마다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본 마법 중 가장 마법 같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주의할 점은 없어?”

“딱히 없긴 한데…. 문을 안에서 잠가놓지 않으면 그냥 문 따고 들어올 수 있으니까 문단속 잘하라는 정도. 방안에서 침입자를 제지하는 마법은 너무 위험해서 안 넣었어.”

주의할점도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되기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몸을 옆으로 틀어 소니아에게 감사를 표했다. 역시 주인공이라 그런지 마음이 따뜻했다.

“고마워. 너한테는 항상 도움만 받네.”

“..........아니, 아니야.”

소니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내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내가 기분이 상할만할 말을 했나 하고 내가 했던 발언을 되짚어봐도 딱히 문젯거리가 될 것은 없었기에 내 의문은 깊어져 갔다.

“소니아아…. 왜 그래….”

소니아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소니아를 재촉해봤지만 소니아는 묵묵부답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 고개를 돌리게 해 얼굴을 보고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방금 집들이 선물을 준 사람에게 그러기는 미안했기에 애꿎은 옷깃만 계속해서 잡아당길 수밖에 없었다.

소니아와 미묘한 신경전이 꽤 지났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엘리사가 보였다. 평소답지 않게 노크 이후에 문을 열 때까지의 간격이 짧았기에 내 몸은 반응하지 못하고 누워있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저녁 준비는 힘들었는지 엘리사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다.

“아가씨……?”

엘리사의 차가운 반응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흠칫 떨리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들어온 엘리사는 침대에 누워있는 우리를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소니아는 엘리사의 존재를 인식하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서 엘리사를 제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옆에서 살짝 보인 소니아의 빨간 볼은 소니아가 부끄러워했다는걸 알려주었다. 그 사실에 웃음이 새어 나와버렸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가씨.”

엘리사는 차가운 눈으로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그 모습에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다소곳이 앉았다.

“아…. 그냥 소니아 하고 얘기하고 있었어.”

“침대에 누워서 말입니까.”

“아, 아니 그게……”

어느새 나는 엘리사의 살벌한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변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변명할 것도 없는 일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내 뇌는 변명거리만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아! 맞다. 소니아가 집들이 선물을 줬어. 그걸 구경하고 있었어.”

“집들이 선물이요…?”

“어, 어. 소니아가 선물이라면서 이 방에 마법을 입혀줬거든.”

나는 서둘러 소니아의 집들이 선물로 화제를 바꿨다. 다행히 성공적인 판단이었는지 엘리사의 관심도 소니아의 마법으로 넘어갔다.

“꽤 괜찮은 마법이군요.”

“그치? 이상한 회로 같은 것들이 퍼져나가더라.”

“......그래서 그걸 보시느라 누워 계셨던 건가요.”

“그……런 거지.”

엘리사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내 허리를 감싸 안은 단단한 팔이 오늘따라 나를 옥죄는 듯 했다.

“........일단 나가시죠. 준비되었습니다.”

엘리사는 내 손을 잡고 방 바깥으로 이끌었다. 엘리사의 손을 잡고 나가자 놀라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건 하얀색 소파였다. 틀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짙은 나무로 되어있었고 매트리스는 새하얀 색으로 되어있는 내가 상상하던 이상적인 소파였다.

디귿자로 된 소파 안에는 작은 모닥불이 있었다. 거칠어 보이는 회색 벽돌로 쌓아 올려진 화로는 이 분위기에 퍽 잘 어울렸다. 위에 펼쳐진 하얀색 천막은 하나의 방처럼 안정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근데 이런 가구들을 산 기억은 없었다. 천막과 천막을 지탱할 기둥까지는 산 기억이 있지만, 나머지 가구들은 여기서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소파 옆에는 내가 샀던 바비큐 그릴이 보였다. 그릴 위에는 갓 올려놓은 듯한 고기가 보였다. 노엘이 집게를 들고 있는 거로 봐서 그녀가 굽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소니아는 소파에 앉아 이상한 유리병에 든 액체를 들어 마시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세공이 돼 있었기 때문에 비싼 물건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소니아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슬쩍 눈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원래라면 마음에 상처를 입었겠지만, 이번만큼은 소니아를 이해해주었다.

“엘리사, 저 가구들은 뭐야?”

“아가씨께서 방 안에 들어가 계실 동안 노엘의 집에서 남는 가구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짧은 새에?”

내가 소니아와 방에 누워있던 시간이 꽤 된다고 하더라도 저만한 크기의 가구를 들고 오기란 빠듯한 시간이었다.

“너 혼자 한 건 아니지?”

“......이 정도는 저 혼자로도 충분합니다.”

담담하게 내뱉는 엘리사의 말에 나는 엘리사가 보통 사람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초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엘리사의 운동신경과 근력은 이 대륙에서 손에 꼽을 만큼 뛰어났다.

무거운 가구들을 들고 옮겼음에도 한 방울도 보이지 않은 땀방울이 엘리사의 능력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고마워 엘리사.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쉬고 있어. 나머지는 내가 할게.”

엘리사의 손을 붙잡고 얘기한 뒤에 엘리사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노엘이 있는 쪽으로 달려 나갔다. 엘리사에게 대답의 여지를 주면 괜찮다며 거절할 것이 뻔했기에 대답을 듣지 않았다.

“노엘 이런 가구들을 여기에 놓아도 괜찮은 거야?”

노엘은 곁눈질로 나를 슬쩍 훑더니 이내 다시 고기를 구우면서 말했다.

“어차피 남는 가구들이니까. 그냥 너 가져.”

“아, 아니 그래도…. 그냥 받기는 미안한데…”

“집들이 선물이라고 생각해. 저기서 술 처마시고 있는 소니아씨는 방어 마법을 선물로 줬으니까 나도 뭐라도 줘야지.”

소니아가 마시고 있는 게 술이었구나…….

노엘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휙휙 저으면서 나를 소파로 가게 시켰다. 순순히 따라 소파에 앉아 옆에 술병을 통째로 들고 마시고 있는 소니아를 보았다. 소니아는 딱 봐도 높은 도수의 술을 물을 마시듯이 마시고 있었다. 저번에 저녁을 먹었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소니아의 주량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았다.

“안녕?”

“......그래.”

소니아는 어느새 평소와 다름없이 내 인사를 받아줄 정도로 마음의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아니면 술의 힘이던가.

엘리사와 노엘이 열심히 노력해준 덕분에 내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접시와 식기를 가져오고 술이 있으니 안주까지 준비해서 루프탑에서의 파티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달은 밝았다. 별들의 빛을 반딧불처럼 보이게 할 정도로.

식사 분위기는 내 걱정과 달리 꽤 괜찮았다. 소니아는 부담이 가지 않는 가벼운 대화 주제를 잘 골랐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던 엘리사도 점점 대화에 참여해갔다.

특히 노엘의 공이 컸는데 분위기가 가라앉을 것 같으면 다른 화제로 넘겨 분위기를 환기하고는 했다. 말 그대로 분위기메이커였다. 나는 노엘을 초대한 것은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며 기분이 좋게 음식을 즐겼다.

두꺼운 고기는 입안에서 녹아내렸고, 색채가 강한 음료는 고기의 기름진 맛을 날려주었다. 술 또한 소니아가 병째로 마셔대는 걸 제외하면 도수가 약한 칵테일이었기에 부담이 적었다.

나와 엘리사는 처음에는 술을 거부했지만 노엘의 계속되는 권유로 벌써 몇 잔이나 마시게 되었다. 엘리사는 주량이 강할 줄 알았지만 나와 비슷하거나 살짝 더 나은 수준으로 약한 듯 했다.

“근데 너희는 기숙사에 불을 저지른 놈이 누구일 것 같아?”

재밌게 대화하던 중 노엘이 한가지 화두를 던졌다. 그동안 수없이 생각했지만 결국 결론은 아직은 알 수 없다고 귀결되던 화두였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 나름의 재미가 있을 것 같은 주제이기도 했다.

“.....아직은 알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알 수 있는 건 뛰어난 마법사라는것 뿐이니까요.”

엘리사의 말은 정론이었다. 이 외에는 이렇다 할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의 범인을 밝혀낼 수 없던 것이니까.

“그래, 겉으로만 보면 그렇지.”

“당신….!”

“..... 말해봐.”

조용히 술을 하마처럼 마시고 있던 소니아는 이 이야기에 관심이 생겼는지 술병을 내려놓고 엘리사를 저지한 채 노엘을 재촉했다. 재촉하고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이상했기에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지만, 별일 아니라며 넘어갔다.

“왜 범인은 테오도르에서 가장 경비가 삼엄한 아카데미에 와서 기숙사에 불을 지른 걸까? 방화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인명피해를 끼칠 수 없다는 건 잘 알 텐데 말이야.”

“묻지 마 방화범이라서?”

술을 마셔서 그런가 머릿속에서 생각만 하던 말이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푸핫, 우리 친구는 가끔씩 뇌가 없는 건지 순수한 건지 모르겠다니까.”

노엘은 잔인한 말을 하면서 내 말을 웃어넘겨 버렸다. 가능성이 적은 이야기이긴 했지만 노엘의 말은 너무나 적나라했다.

기운이 빠져 옆에 있는 소니아의 팔에 몸을 기댔다. 소니아도 별 상관이 없었는지 내 볼을 쓰다듬었다. 내 오른편에 있는 엘리사가 나를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봤지만 애써 무시했다. 미안 엘리사 그쪽까지 가기엔 너무 멀단 말이야.

“범인의 목적은 목표하는 인물을 아카데미에서 나오게 만드는게 목적이겠지.”

“목표가 사람인 걸 어떻게 알아? 다른 것이 목표일 수도 있잖아.”

“기숙사니까. 그곳에서 가장 가치 있는 물건은 사람이거든.”

“.....그럼 그냥 목표로 하는 인물을 빼내는 게 더 쉬운데 방화까지 저지른 이유는 뭐야?”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 그런데 그 인물을 빼내려다가 그 인물의 경호원과 마주칠 경우에는 뼈도 못 추릴 테니까 방화까지 결행하는 거겠지.”

노엘은 엘리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엘리사는 노엘의 권유로 술을 많이 먹은 상태였다. 엘리사는 노엘을 한번 노려보다 이마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엘리사의 상태를 보니 꽤 취해있는 것 같았다.

“아카데미 밖에서라면 그 인물을 가지고 있는 채로도 도망갈 수 있었겠지만, 기숙사 안에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지.”

“그러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기숙사에 불을 지른 거야. 그 인물을 아카데미 밖으로 꺼내기 위해서.”

“..........”

소니아는 노엘의말이 끝나자 병에 남아있던 술을 모조리 입속에 털어버리고 한숨을 쉬었다.

“범인은 그 인물에 엄청난 집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겠지. 아, 최근에도 어떤 학생을 집착을 보인 사람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한 노엘은 씩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꽤 상쾌해 보였다.

“여기까지 오면 목표가 누구였는지, 범인이 누구인지 알 것같이 않아?”

……여기까지 오면 모를 수가 없었다. 범인의 정체와 그 범인이 집착하는 목표의 정체까지 말이다.

얼마 전 내가 납치되었을 때 만난 가면녀. 그녀는 처음 나를 봤을 때부터 나에게 이상한 집착을 보였다. 엘리사와 노엘 덕분에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아직인 모양이었다.

“너는 이런 걸 어떻게 알아낸 거야?”

“나만 알고 있던 게 아닌데?”

“어?”

“네가 기대고 있는 소니아부터 네 메이드까지 전부 알고 있던 사실이었어.”

소니아는 이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반응을 하지 않고 썰어놨던 고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엘리사는 이 이야기에 당황한듯했지만 술에 취해있어서인지 초점이 잘 맞지 않아 보였다.

“뭐, 얘네들한테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니니까. 다 네가 모르는 게 좋다고 판단했을 뿐이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마.”

“어……. 뭐 지금이라도 알려주면 나야 고맙지.”

이 사실을 그때부터 알았으면 지금까지 계속 불안에 떨었어야 했을 테니. 어찌 보면 고마운 일이었다.

“다행이네. 이제 알았으니까 조심히 다녀.”

노엘은 그렇게 말하며 칵테일을 들이켰다.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녀는 손뼉을 한번 치고는 분위기를 바꿨다.

“자자 그럼 이제 이런 칙칙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아까처럼 잡담이나 하자. 집들이 파티인데 우울한 얘기만 하는 건 좀 그렇잖아?”

노엘의 주도로 분위기는 아까와 같이 편안하게 바뀌었다. 엘리사는 아직 마음이 편치 않은지 취한 채로 흐느적거리며 내게 미안하다고 말해왔다. 내가 다가가서 괜찮다고 말해주니 미소를 지으며 소파 등받이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혹시 잠드는 건가 싶었지만, 그녀의 눈꺼풀은 내려가려는 징조조차 없었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나도 술을 많이 먹은 탓인가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소니아의 팔에 기대던 몸은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중력에 몸을 맡기다 보니 어느새 내 머리는 소니아의 무릎에 올려져 있었다.

“....뭐하냐.”

“소니아야 몸이 무거워…….”

내 말에 소니아는 별말을 하지 앉고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내게 시선을 잠깐 주더니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맞은편에 있는 노엘이 웃음을 참는 게 짜증이 났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얘한테 마공학과에 추천한 게 너라며.”

“아, 맞아. 얘랑 잘 어울리지 않아?”

“하아…….”

소니아와 노엘은 마공학과로 대화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틀어 소니아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왜에….?”

“.......힘들어서 그래. 다른 과보다 조금 더.”

“힘들긴 하긴 하지. 월등히.”

“넌 닥쳐.”

마공학은 단순히 마법뿐만이 아니라 과학까지 결합한 학문이기 때문에 그녀들의 말대로 난이도가 높았다. 하지만 이런 부분은 오히려 내게는 호재였다. 나는 원래 학구열이 있는 편이었기에 난이도가 높은 학문일수록 더욱 흥미로웠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이야, 자신감은 맘에 드네.”

노엘은 내 이런 다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누워있는 내 입에 과자를 집어넣어 주었다. 소니아또한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행복하네……

집이 넓었다면 둘 다 자고 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저 옥탑방에 4명이 누울 공간은 없었다. 어찌저찌 낑겨서 들어가면 잘수 있을 것 같기도 했지만 그러면 아침에 찾아올 허리통증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새벽이 되기 전에 둘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가기 전에 대부분의 뒷처리를 해 주어서 나와 엘리사가 정리할 부분은 별로 없었다.

금방 정리를 끝내고 방 안으로 들어와서 잘 준비하고 있는데 엘리사가 가만히 내 옆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사는 아까보다는 술에서 깨어서 정리를 도와주었다. 그런데 가끔 나를 보며 가만히 서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말을 걸어봐도 별 반응이 없어서 그러려니 했다.

“엘리사, 이제 자자.”

엘리사는 내 말에 꿈쩍도 하지 않고 자리에 서 있었다. 애가 맛이 가버렸네.

고개를 올려 엘리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엘리사의 얼굴은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간식을 뺏긴 강아지같이 말이다.

평소 감정의 기복이 없는 엘리사의 모습과 달리 지금처럼 내게 뚜렷한 감정을 내비치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엘리사의 그런 모습은 가끔만 보여주는 모습이었기에 내 눈에 오랫동안 남기고 싶었다.

“엘리사… 왜 그래…?”

나는 조곤조곤 말하며 대형견을 쓰다듬듯이 엘리사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윤기가 넘치는 엘리사의 머리카락은 누가 귀족인지 헷갈리게 할 정도였다.

그동안 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것을 알기에 나는 엘리사의 어리광을 받아주었다. 아마 이러는 이유는 내가 소니아한테 기대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편하게 쓰다듬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인지 엘리사의 고개는 점점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엘리사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을 때까지 내려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엘리사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은 엘리사의 고개가 내려옴에 따라 자연스럽게 등 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항상 나를 위해 노력해주는 사람인 걸 알기에 나에게 이런 어리광을 부려주는 것은 오히려 내가 고마웠다. 나는 엘리사의 대답을 천천히 기다리며 엘리사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읏….!”

엘리사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아서인지 부끄러운 소리가 밖으로 나와 버리고 말았다. 부끄러움에 엘리사를 내 목덜미에서 떨어뜨리려 했지만 엘리사는 두 팔로 내가 도망갈 수 없게 단단히 막아두었다. 언제나 포근하게 날 안아주었던 팔이 지금은 나를 가두는 철창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흐, 흐읏.”

엘리사는 나를 도망가지 못하게 잡아두고 내 다리 사이에 무릎을 집어넣으려 했다. 너무나 당황해서 엘리사에게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풀썩

간신히 몸부림으로 엘리사의 품에서 벗어났지만, 반동으로 침대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서둘러 이 방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엘리사는 어느새 내 위로 올라와 있었다.

엘리사가 내 어디에 미혹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눈이 풀려버려 큰일이 날 것 같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엘, 엘리사 이제 그만…. 읏….!”

나를 덮친 엘리사는 내 목덜미를 야릇하게 빨기 시작했다. 저항하고 싶었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심지어 내 위에 올라타 있는 엘리사 때문에 점점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가까스로 든 오른손으로 엘리사의 머리를 눌러 저지하려 했지만 엘리사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강렬해 저만 가는 움직임에 나는 간신히 신음을 참아내고 있었다.

“읏…..흐윽…”

엘리사의 고혹적인 입술은 목덜미에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몸을 버둥거렸지만 내 두 팔을 엘리사가 한 손으로 제압하니 별 방도가 없었다.

목덜미

어깨

쇄골

그리고

“아흑...아…! 엘리사…!”

어디서 나온 힘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엘리사를 밀쳐내 내 몸에서 떨어트렸다. 엘리사는 침대 바깥으로 맥없이 떨어졌다.

엘리사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흔들었다. 눈을 보아하니 이제야 술에서 깬 모양이었다.

“아가씨……”

“이제 정신이 들어?”

공포심과 환멸, 원망을 눌러 담아 말했다. 미안함을 안고 있는 저 눈빛이 보기 싫었다.

그럴 줄 몰랐는데, 그런 사람일 줄 몰랐는데.

휘몰아치는 배신감에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엘리사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가.”

“아가ㅆ—”

“나가라고!”

악에 받쳐 울부짖듯 소리를 질렀다. 모든 게 혼란스럽다. 아까까지만 해도 좋았던 기분은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거칠어진 호흡에 물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제, 제발 엘리사…. 지금은 널 보고 싶지 않아…….”

물기가 찬 목소리로 엘리사에게 애원했다. 입을 열 수록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속은 울렁거려 제대로 된 생각도 할 수 없었다.

“.......”

찰칵—

엘리사가 방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것 같았다. 내 눈은 흘러넘치는 눈물 때문에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으니까.

나는 바람이 빠진 풍선마냥 앞으로 고꾸라졌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계속된 의문들의 끝은 의문으로 끝날 뿐이었다.

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줄이 끊긴 인형처럼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헛된 희망을 품으며 나는 침대에, 이 방에 감정을 토해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