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해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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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기참. 내가 시장가를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느낀 감상이었다. 이곳에 장사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미소를 짓고 활기찬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그들은 손님을 왕처럼 정성스럽게 대했다.
사장이 손님을 정성스럽게 대하니 시장가를 방문하는 손님들의 기분도 좋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 곳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의 소리와 근처 벤치에 앉아있는 손님들의 웃음소리는 하나의 배경음처럼 녹아들었다. 가볍게 내려앉은 햇빛은 시장풍경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었다.
기분이 들떠있는 나와 달리 내 옆에 있는 둘은 딱히 그렇지 않아 보였다. 내 왼편에 있는 소니아는 평소처럼 얼음같이 차가운 표정이었다. 엘리사는 앙다문 입을 보아하니 소니아와 함께 쇼핑을 온 이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평생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도 내가 주도적으로 주제를 이끌어 본 적은 없었다. 친구 하나 없이 살아왔던 내게 분위기메이커 역할의 왕관은 너무나 버거웠다.
하지만 엘리사에게는 미안하게도 나는 이 둘이 조금 더 사이가 좋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소니아도 시장가에 같이 오게 했다. 소니아와 엘리사 둘 다 나와 앞으로 계속 얼굴을 마주 보며 지낼 사이인데 이 둘의 사이가 진전되지 않으면 곤란했다.
지금처럼 냉전같이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분위기를 띄어보려고 하는 짓을 계속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한 명한테 말을 걸면 나머지 한 명은 아예 대화에 끼지도 않을려 하는 그 모습을 생각하면 난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일단 소파부터 사러 갈까."
".....? 너 그곳에서 얼마나 있으려고 그런 것부터 사냐."
"한 1년간은 있지 않을까?"
원래는 잠깐만 있을 생각이었지만 하룻밤 지내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루프탑 바를 갖는 게 일생의 목표 중 하나였는데 이렇게 금방 포기해버리기는 아쉽기도 했고, 테오도르의 기후를 생각해보니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옥탑방의 단점이 사라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낭만이 있지 않은가. 화려한 저택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감성을 거기서는 숨 쉴 듯 느낄 수 있었다. 옛날 자취방의 느낌이 풀풀나는 장소를 쉽게 떨쳐낼 수는 없었다.
"미쳤나. 그 정도 돈을 받았는데 그냥 거기서 그대로 산다고?"
소니아눈에는 스스로 좁은데 틀어박히는 미친년처럼 보이는 것 같지만. 남들의 시선으로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지.
"한번 와서 봐봐, 네가 생각하는 그저 그런 옥탑방이 아니야."
사실 맞는 거 갖긴 하는데 그냥 넘어갔다.
"너도 오면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
"........갔는데 바뀌지 않으면 네가 살고 있는 곳 날려버린다."
"에, 에엑."
소니아는 서늘하게 말하며 나를 노려봤다. 내가 기가 찬다는 눈빛으로 보고 있는 소니아를 보니 눈이 자동으로 내려갔다. 아니, 근데 내가 사는 집인데 왜 자기가 뭐라 그러지.
걱정을 해주는 거니 고마우면서도 그 걱정이 부담되기도 했다. 누가 보면 내 부모님인 줄 알겠어 아주. 소니아도 그 말을 이후로 내 쇼핑 계획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거리 위를 거닐면서 쇼핑을 할 물품들부터 생각했다. 옥상 앞의 빈 곳을 루프탑으로 변화의 첫걸음은 소파였다. 처음에는 의자만으로도 만족할 생각이었으나 지원금의 액수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 정도의 액수를 받는다면 조금만 더 사치를 부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바닥은 마룻바닥으로 되어있으니 깔끔한 하얀색 소파면 잘 어울리겠지.
시장가 끝에 있는 가구점은 고풍스러스러운 분위기일 것이라는 내 예상과 달리 깔끔하게 되어있는 모던 스타일로 되어있었다. 내 앞에 수많은 가구가 진열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내 생각보다 가구의 수가 많지는 않았다.
비어있는 공간이 많은 거로 봐서 최근에 많이 팔린 것 같았다. 그 위에 일렬로 가지런히 달린 조명은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화려하면서도 유려한 음색의 음악은 고급스러운 백화점에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여러 가구를 둘러보던 중 내 마음에 드는 소파를 발견했다.
깔끔한 하얀색 시트에 다리는 밝은색 자작나무로 되어있는 소파는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실제로 앉아보니 적당히 푹신하고 안정감이 있었다.
"엘리사 아 소파 괜찮지 않아?"
엘리사는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아보고 살짝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일단 좀 더 살펴보시고 나서 결정하시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내 생각에는 꽤 괜찮아 보였지만 엘리사는 아직 만족하지 못한 것 같았다. 옆을 바라보니 소니아는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나에 대한 한심함을 담고 있는 눈빛은 내 마음에 상처를 주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애써 그 눈빛을 떨쳐내고 다른 소파를 찾아 나섰다.
그 후로 한참을 더 찾아보았지만 우리들의 기준에 맞는 소파는 찾을 수 없었다. 내 기준에서는 괜찮았던 소파가 여러 개 있었지만 엘리사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나중에는 소니아까지 참견하기 시작하면서 기준은 더욱 까다로워지게 되었다. 엘리사와 소니아는 어째서인지 이런 부분에서는 싸우지 않고 오히려 서로 도와가며 나를 쪼아대었다. 나는 너덜너덜한 마음과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근처 소파에 앉아 둘에게 물었다.
"......이제 그냥 아무거나 사면 안 될까."
"안돼."
"안 됩니다."
"하아…."
한마음 한뜻으로 내뱉고 서로를 보더니, 고개를 돌려버리는 저 둘이 사무치게 미웠다. 저리는 다리를 주무르며 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일정 수준 이상이면 상관없지만, 이곳에는 엘리사와 소니아가 만족할만한 고급스러운 가구가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유는 뻔하다. 기숙사 화재 때문이다.
가구매장 직원 말에 따르면 화재가 일어난 날부터 비싼 가구들이 순식간에 팔려버렸다고 했다. 특히나 오늘 같은 경우에는 오전에 그나마 남았던 괜찮은 가구들도 전부 팔려버렸다고 한다.
그놈의 기숙사에서 일어난 화재 때문에 되는 일이 없었다. 좀 귀찮은 해프닝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째 가면 갈수록 일이 커져만 가고 있었다.
게다가 귀족들의 거지 같은 소비패턴은 처음으로 큰 맘을먹고 큰 시도를 해보려는 계속해서 나에게 엿을 맥이고 있었다. 전생이나 여기나 돈 많은 인간들이 명품에 환장하는 건 다르지 않았다.
"......그럼 적당히 먹을 거나 살까."
맘 같아서는 그냥 적당한 소파 하나 골라서 사자고 찡찡거리고 싶었지만 엘리사만 있으면 몰라도 소니아가 있을 때 그럼 멱살을 잡힌 채로 끌려 나가겠지.
일단은 가구점에서 나가기로 했다. 여기서 있어 봐야 달라질 것도 없고. 저녁 재료도 준비해야 하니까.
가구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익숙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편안한 복장에 약초가 가득 들어있는 봉지를 들고 있는 채로 꼬치를 먹고 있는 그녀는 내 친구이자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노엘이었다.
노엘은 내가 여기서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꼬치를 입에 문 채로 입을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또한 이렇게 운명처럼 만나게 될 줄을 몰랐기에 가게 입구에서 얼어버렸다.
"야, 왜 입구에서 가만히 있어."
"어."
"어."
뒤따라 나오던 소니아와 엘리사도 노엘을 보고 얼어붙었다. 노엘은 아직도 입가에 꼬치를 물고 있었다.
"안녕…?"
"...........너희가 왜 거기서 나오냐?"
어찌저찌 정신을 차린 노엘은 꼬치를 입에서 치우고 내게 사정을 물어봤다.
"아…. 가구를 사려고?"
"친구야…. 그러니까 왜?"
"어…. 방을 구했으니까?"
"어디에."
"여관 창고로 쓰던 옥탑방?"
"우리 친구는 화재 때 뇌가 익어버렸나?"
"........아니 다들 왜 그러는 거야?"
물론 워딩으로 들었을 때는 이상해 보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바로 뭐라고 할 정도인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었다. 일단 보고 판단해주면 안 되나?
나는 노엘의 인식을 바꾸기 최선을 다해 옥탑방의 장점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며 지금까지의 여정을 얘기했다. 노엘도 대충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그래서 루프탑 바를 만들려고 가구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맞아."
"그런데 네가 같이 다니다니 이건 신기한데?"
노엘은 소니아를 바라보며 씩 웃으며 말했다. 말하며 웃는 얼굴이 자식의 성장을 보는 부모의 얼굴이어서 옆에서 보는 나까지 재수 없다고 생각해 버렸다.
"닥쳐. 그냥 쟤 집에 볼일이 있는 것 뿐이니까."
"헤에. 집에 볼일이 있는데 가구매장까지 따라오는 거야? 나중에 들어도 되는데?"
".......쟤가 같이 들르자고 했으니까 같이 있는 거지."
"이야…. 내가 알던 소니아라는 인간은 칼같이 거절했을 텐데. 내가 다 놀랍다 야. 너 소니아의 손톱을 먹은 쥐 아니냐?"
"....."
소니아는 노엘의 농간에 화가 났는지 오른쪽 손에 마법진이 그려지는 게 보였다. 한 뼘 정도 크기의 마법진에서는 마나가 전기처럼 튀어나오고 있었다.
"라고 할 뻔~"
노엘은 소니아의 마법진을 보고 바로 꼬리를 내렸다. 나도 시장가에서 사고나 나는 건 사양이었기에 소니아를 말렸다. 소니아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화를 삭이더니 마법을 거둬들였다.
"뭐어 어쨌든. 보아하니 가구를 사는 데는 실패한 것 같은데 이제 어떡할 거야?"
"고기를 사러 가게. 고기를 구울 그릴도 사야 하고."
"헤에. 그럼 나도 같이 가자 친구야."
"꺼져 시발련아."
소니아는 내 어깨에 팔을 올려놓은 채로 노엘에게 퇴짜를 놓았다. 옆으로 슬쩍 소니아의 얼굴을 보니 정말로 싫어하는 것 같았다. 내가 소니아여도 싫어할 것 같긴 했다.
노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니아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곧바로 내게 다가와 내 두 손을 잡고 물었다.
"친구야. 이래 봬도 내가 네 스승인데 이렇게 내칠 거니?"
"으…."
분명 노엘의 표정은 절박한 사람의 표정이었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일 뿐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내가 거절하면 무언가 보복이 들어올 것이라는 압박을 하는 것 같았다.
"나한테 가르침을 받으려고 유물을 떼로 갖다 바치는 사람도 있는데 너는 그런 사람에게 무료로 가르침을 받고 있는 거야."
"처, 청소해 주지 않나? 하하…."
실제로 노엘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한 무더기로 있었다. 노엘은 귀찮다는 이유로 모조리 거절했지만. 나도 마음 같아서는 된다고 하고 싶었지만 내 어깨에 실리는 소니아의 압박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해 버렸다.
"괜찮지 않을까요?"
그때, 조용히 있었던 엘리사가 노엘의 편을 들며 입을 열었다.
"이미 한 명을 초대하셨으면 두 명을 초대한다고 달라질 건 없을 겁니다."
"그, 그런가?"
"이야…! 광견이 맞는 말도 하네."
어째서인지 엘리사는 노엘이 우리 집에 오는 걸 막지 않았다. 엘리사와 노엘은 딱히 친한 사이가 아닌데도 말이다.
소니아는 엘리사에게 뭐라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그러더니 팔로 내 어깨를 툭 쳤다. 나보고 결정하라는 건가?
"그럼 다 같이 가는걸로 하자. 한 명만 두고 가는 것도 그러니까."
노엘의 가르침에 엄청난 가치가 있다는 걸 알기에 나는 노엘은 이런 데에서 배제하고 싶지 않았다. 노엘의 말대로 제자가 스승을 저버릴 수는 없으니까.
소니아는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내게 선택권을 주었기 때문인지 결정에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시계를 보니 서두르지 않으면 저녁이 늦어질 것만 같았기에 우리는 서둘러 나머지 준비물들을 사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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