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지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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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북적이던 등굣길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오늘 안에 들리기만 하면 되니 사람들이 많이 갈린 것 같았다. 아니면 이미 대부분은 왔다 갔다거나.
한낮에 한산한 거리를 걷는 건 기분이 들뜨게 했다. 테오도르의 날씨는 대부분 온화하기 때문에 어느 때나 거리를 걷는 게 싫지 않았다.
교문 근처로 다가가자 한쪽의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방향을 보니 기숙사가 있던 방향 같았다. 올라오는 연기는 줄어들었다지만 지금까지 타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흥미로웠다.
"엘리사. 기숙사에 잠깐만 들려보지 않을래?"
"시간도 여유가 있으니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루 만에 다시 찾은 기숙사는 화재로 인해 내가 알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져 버렸다. 상당히 높았던 기숙사는 이젠 높이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뼈대가 버텨주어서 그런 거지 남은 뼈대들도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위태했다.
기숙사 중앙에는 아직도 조그맣게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운데에 있는 불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일렁 거리고 있었다.
기숙사 주변에는 위험이라 쓰여 있는 경고판과 테이프가 둘러져 있었다. 테이프가 둘러진 선 너머로 손을 뻗어보려 했지만, 이상한 막 같은 것에 막혀 도중에 막혀버렸다. 마법인가?
"간단한 보호 마법이군요. 테이프에 작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 목걸이에 들어있는 마법 같은 거네."
"비슷합니다. 허나 강도는 목걸이 쪽이 훨씬 강합니다. 저 테이프는 양산하기 위해 위력을 대폭 낮춘 물건이니까요."
어쩐지 보호막치고는 약해 보였는데 양산을 위해 성능을 저하한 버전이구나. 이런 마 도구를 양산할 수 있다니. 테오도르의 위상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되는 계기였다.
"테오도르 중심에 있는 아카데미 기숙사에 불을 지르다니. 누가 저지른 짓일까?"
"현재로서는 매우 뛰어난 마법사 라는 것 외에는 딱히 증거가 없는 게 안타까운 일이네요."
"그러게. 그런데 그렇게 뛰어난 실력을 갖춘 마법사가 한다는 게 기숙사 불태우기 같은 걸까. 그것도 사상자도 없게끔."
이게 내가 가진 가장 큰 의문점이었다. 마법으로 가장 유명한 테오도르 아카데미의 보안을 다 뚫고 한다는 게 고작 기숙사를 불태우는 거라니. 재능 낭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원작 소설 속에 기숙사에 대해 무언가 큰 비밀이 있었나 생각해봐도 큰 비밀 같은 건 없었다. 세계관 설정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라 특별한 유물 같은 것도 없었다.
"사상자가 없던 건 의도한 것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무슨 소리야?"
"아무리 실력이 좋은 마법사라고 해도 이렇게 큰불을 일으키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아마 며칠 동안은 철저하게 준비했겠죠."
만약 기숙사가 평범한 목조주택이었다면 준비시간 같은 건 필요 없었겠지만 애석하게도 기숙사는 보호 마법으로 떡칠이 되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고 한다.
기숙사 마법진을 무력화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이 방법은 도중에 들킬 가능성이 있기에 이 방법은 거의 쓰이질 않는다고 한다.
"하긴 불나기 전까지는 이상한 점도 못 느꼈으니까."
".......마찬가지로 마법을 시전하는데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 조건을 충족하는 시간대는 아카데미의 수업 시간이겠죠."
"한마디로 확실한 방화를 위한 선택이었다는 거였다는 거지 딱히 인명을 신경 쓴 건 아닌 거네."
나는 아직도 타고 있는 화염을 물끄러미 보다 몸을 돌렸다. 내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 봤자 알 수 있는 건 없다. 이런 무거운 생각을 하기보단 좀 이따 시장가에서 무엇을 살지 생각하는 게 나았다.
행정실의 분위기는 부산스러웠다. 테이블에는 여러 서류가 쌓여있었고 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이 너무 바빠 보여 나는 물어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저기…. 안녕하세요."
나는 가장 앞에 있는 직원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무언가 서류를 작성 중이었기에 옷깃을 터치하는 것도 매우 조심스러웠다.
"아. 재학생이시죠?"
"아, 아. 네…."
"그럼 제 뒤에 있는 책상에 앉아 제가 드릴 서류에 서명해주시면 돼요."
직원은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서류뭉치를 건넸다. 두꺼운 서류뭉치는 보자마자 거부감이 일었다. 이런 서류 덩어리는 회사에 다닐 때 껌 덩어리처럼 떨어지질 않았던 물질이었기에 지긋지긋했다.
더욱 무거워진 것 같은 서류를 들고 책상에 앉았다. 책상에 앉아 천천히 서류를 살펴보니 대부분은 화재가 일어난 것에 대한 사과문이었다.
본교는 이 사태를 통감하느니 어쩌느니 여러 미사여구로 가득 채워진 서류들은 아카데미가 이 사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수 있었다. 나야 별로 상관이 없지만, 아카데미 학생들의 대부분은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니까.
귀족들은 불쾌해하겠지 분명. 이런 정성 들인 사과문도 귀족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함이겠지. 사과문은 대충 넘기고 남은 서류를 들춰보았다. 나머지 서류도 딱히 특이한 건 없었다. 지원금에 대한 서류였는데 내 예상보다 액수가 컸다.
이 정도 금액이면 테오도르의 번듯한 집의 반년치 집세를 낼 수 있는 금액이었다. 이런 금액을 사건이 터지고 곧바로 기숙사생 전원에게 지급한다고? 심지어 서류 내용을 보면 반년 후에 한 번 더 지급된다고 쓰여 있다.
아무리 아카데미가 테오도르의 지원 아래에 있어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해도 이렇게 큰 금액을 낼 수 있을 정도였나. 옆에 앉아있던 엘리사도 금액을 보고 얼굴을 찌푸린 것 보면 엘리사도 의문점이 생긴 듯 했다.
의문을 뒤로하고 일단 서류에 서명한 후 직원에게 다시 건넸다.
"지원금은 며칠 뒤부터 지급해 드릴 겁니다. 아카데미는 일 주간 휴교하니까 그 전에 한 번 더 오시면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혹시 학과 정하셨나요?"
"네. 정해놓긴 했어요."
"그럼 교무실에 들리시면 신청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일주일 동안 신청 기간이지만 지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인원 제한이 있는 학과도 있으니까요."
"그럼 바로 신청하러 가야겠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살펴 가세요."
직원에게 감사를 표하고 서둘러 교무실로 향했다. 인원 제한이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서두르는 게 좋을거다라는 말을 들으니 걸음이 빨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계단을 올라가 서둘러 교무실의 문을 열었다. 교무실 안은 행정실보다는 정돈되어있었다. 하지만 교수들도 바빠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근처에 있는 교수에게 다가가려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은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학과 신청?"
"어…. 그러려고."
시간상으로 따지면 어제도 보았지만, 어제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일까. 그녀의 얼굴을 보자 반가움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내 볼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소니아 쪽에서 이런 스킨십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내 몸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녀는 내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나를 이리저리 관찰한 후에야 놔주었다.
"다친 곳은 없나 보네."
"어, 어. 다행히 화재가 학생이 없던 시간에 일어나서."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소니아는 별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내게 말했다.
"일단 학과 신청부터 해. 그러고 나서 나랑 얘기 좀 하자."
"......? 그래. 알았어."
나는 그녀의 말대로 교수에게 가서 학과를 신청했다. 교양과목과 마공학. 그때 노엘이랑 얘기했을 때 생각하던 그대로였다.
"그 학과들로 괜찮겠니?"
교수는 내가 마공학이란 학과를 선택한 것에 대해 꽤 놀란 듯 했다. 신생 학과이며 담당 교수 또한 아직 실력이 충분히 입증된 사람이 아니기에 놀라웠다고 했다.
"다른 과는 어떻겠니?"
"괜찮아요. 제가 하고 싶은걸 해보려고요. 죄송합니다."
"아니란다. 괜히 내가 주책이었구나."
나에게는 다른 과를 권했지만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교수와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소니아에게 돌아갔다. 소니아는 귀를 후비적후비적 파고 있었는데 무심한 얼굴로 그런 행동을 하니 퍽 잘 어울렸다.
"...........마공학과?"
"아, 맞아. 나도 마공학에 관심이 생겨서 한번 들어보려고."
"하…."
소니아는 머리가 어지러운지 손을 이마에 갖다 대고 한숨을 쉬었다. 내가 마공학과에 간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다행히도 그런 건 아니었는지 소니아는 곧바로 이마에서 손을 떼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니아는 내 머리를 강아지를 쓰다듬듯이 쓰다듬는다. 소니아에게 한동안 쓰다듬어지면 머리가 마사지를 한 것처럼 시원해진다.
"아가씨에게 용건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저희도 바쁜 몸이기에 서둘러 주시기 바랍니다."
소니아의 손길을 만끽하고 있을 때 엘리사는 나와 소니아 사이에 들어왔다. 나를 쓰다듬고 있는 소니아의 손을 쳐낸 것은 덤이었다.
"이런 씨…."
소니아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욕이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그녀는 놀라운 인내심으로 끝까지 내뱉지 않았다. 소니아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야. 너 어제 어디서 잤냐?"
"여관에서 창고로 쓰던 옥탑방."
"?"
소니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데 그 눈에는 안쓰러움이 들어있었다. 뭔가 불우한 이웃을 보는 느낌이라 괜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 근데 생각보다 훨씬 괜찮아. 마당도 있고 경치도 상쾌해."
"그런 문제가…. 하…."
"하여튼 지금 네가 사는 곳에 한번 가보자."
"뭐하게?"
"확인할 게 있어."
뭔가 소니아는 진지한 용건인 것 같아 거절하기도 미안했다. 그냥 친구가 집들이 온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엘리사는 마음에는 들지 않아 보였지만 딱히 소니아를 제지하진 않았다.
"상관은 없는데…. 옥탑방은 좀 이따 가도 돼?"
"왜."
"시장가에서 마당에 놓을 것들을 사기로 해서. 엘리사랑 시장가를 갈려고 했거든."
"상관없어."
그렇게 얘기하고 우리는 시장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릴, 천막, 푹신한 의자. 여러 물품을 생각할 때마다 시장가에서의 쇼핑이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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