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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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햇살은 부드러운 카스텔라 같았다. 따스하고 포근한 햇살은 나를 감싸 안았다.
평소와 달리 거부감 없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방의 전경이 눈에 비쳤다. 기숙사 화장실 정도의 작은 크기의 방에서는 익숙함이란 향기가 퍼져 나왔다.
전생과 그리 달라진 것 없는 풍경에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창문으로는 테오도르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당연한 거겠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테오도르의 풍경에 이질감을 느꼈다.
이질감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감정의 끝이 불쾌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기에 그리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끼며 나는 하염없이 창밖을 쳐다보았다.
한참 동안을 창밖을 바라보다가 엘리사가 보이지 않았다는걸 깨달았다. 일어났을 때 엘리사가 없던 적은 적지 많았지만, 어젯밤 같이 잤기 때문일까 엘리사가 보이지 않으니까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찾아 나서고 싶었지만 이불 아래에 있는 몸은 나른함에 취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이 새 이불이라 엄청나게 뽀송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
나는 이불에서 몸을 들어 올려 침대에 등을 기대고 엘리사가 들어올 문을 바라봤다.
"일어나셨습니까."
내 생각처럼 엘리사는 금방 돌아왔다. 엘리사의 손에는 작은 바구니가 들려있었다. 바구니 안에는 여러 생필품과 아침 식사로 추정되는 빵이 들어있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엘리사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불현듯 어젯밤의 일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떤 아가씨?`
`당신이 벨리타 자스민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어제 이런 말들이 오갔었다고?
물밀듯이 들어오는 어제의 기억들은 내 고개를 이불에 파묻게 만들었다. 아무리 어제 힘든 일이 많았었다고 해도 내가 그렇게 부끄러운 말들을 내뱉었다니.
나는 어제의 기억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 엘리사는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엘리사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방을 정리하고 벽에 있던 식탁을 펴 아침을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엘리사는 어제의 일이 부끄럽지 않은 걸까. 어제의 일이 후회되는 건 아니다. 어제의 대화로 쭉 마음에 달고 살았던 짐들중 하나가 풀린 것 같을 정도로 어제의 대화는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에 아무렇지 않게 얼굴 맞대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엘리사를 볼 때마다 엘리사에게 어리광을 부리던 자신이 떠올라 죽고 싶어진다. 나는 이불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괜찮으십니까?"
이런 내가 걱정되었는지 엘리사는 내게 다가와 물어보았다. 엘리사의 뒤를 보니 어느새 아침상을 다 차려놓았다는 걸 알았다.
"아…! 괜찮아. 별일 아니야."
"그런가요."
내 형편없는 대답에도 엘리사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에게 `너는 어제 있었던 일이 신경 쓰이지 않아?`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은 떨어지질 않았다. 내가 유난 떠는 걸 수도 있지.
생각을 정리하고 침대에서 나와 식탁 앞에 앉았다. 엘리사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식탁에는 갓 구운 토스트와 계란, 그리고 베이컨이 우릴 맞이하고 있었다. 미국식 아침 식사 같은 풍경은 아침으로 딱 맞는다고 할 수 있었다. 음식들은 방금 조리되었는지 아직 따끈따끈했다.
"어…. 직접 요리한 거야?"
"네. 빵을 제외하고는 1층의 주방을 잠시 빌려 요리했습니다."
"그래? 미안하네…."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에게 더 좋은 식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냐, 이 정도면 차고 넘치지."
실제로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내가 혼자 살 때는 아침 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으니까.
엘리사와 함께하는 식사 시간은 조용하고 차분했다. 원래 둘 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어젯밤의 일 때문인지 평소 같으면 즐길 수 있는 침묵이 지금은 사슬이 되어 내 목을 조여오는 듯 했다. 나는 머리를 굴리고 굴려 엘리사에게 말을 걸 껀덕지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엘리사. 오늘부터 당신이라고 부를 거야?"
"아…."
생각해보니 엘리사는 오늘 한 번도 나한테 아가씨라고 부르질 않았다. 어젯밤부터 엘리사는 나를 아가씨라 부르지 않고 당신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엘리사가 말했던 아가씨라는 호칭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기분 좋은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엘리사는 연신 헛기침을 하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살짝 붉어진 볼은 엘리사가 긴장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직 당신을 뭐라 불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평소대로 아가씨로 괜찮은데?"
"정말…. 아가씨로 괜찮으신가요?"
엘리사의 생각보다 나는 아가씨라는 호칭을 별로 싫어하지 않는다. 내가 싫어하는 건 아가씨란 단어 안에 들어있었던 대상의 모호함이었지 단어 그 자체가 아니었다.
어젯밤 엘리사는 나라는 사람을 그대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이면 충분하다. 중요한 건 단어가 아니란 말이다. 단어의 뜻 같은 건 얼마든지 다른 의미로 덮어 쓰일 수 있다. 얼굴이 몸 전체를 뜻하는 말에서 안면을 뜻하는 단어로 변화했듯이 말이다.
"어제 네가 말한 말이면 충분해. 갑자기 호칭이 변하는 것도 좀 그렇고 말이야. 아가씨면 충분해."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엘리사의 환한 웃음을 나도 마주 보며 웃었다. 이 세계에 온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이제야 출발선에 선 기분이 들었다.
"아…! 엘리사 지금 몇 시야?"
아침을 다 먹고 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문득 아카데미가 생각났다. 아직 방에 시계가 없기에 정확한 시간을 알 수는 없었지만, 평소 일어나던 시간보다는 늦었다는걸 알 수 있었다.
엘리사는 인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아카데미는 휴교한다고 합니다. 등교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휴교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
"상황이 생각보다 위험하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하긴 각종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기숙사가 모조리 불타버렸으니까.
"그렇지만 아카데미 행정실에 한 번 들리셔야 합니다."
"행정실? 거기는 왜?"
"기숙사 화재로 인해서 학생들이 숙박업소를 이용하게 되었기 때문에 숙박비 지원금이 나온다고 합니다."
괜히 아카데미를 갈려고 하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의 불찰이니 바로 지원금을 나눠주다니. 이런 발 빠른 대처는 볼 때마다 놀라게 된다.
"그럼 나갈 준비를 해볼까. 너무 늦게 나가는 것보단 정오가 되기 전에 나가는 게 좋겠지."
"네. 나갈 채비를 하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짐이 대부분 타버려서 준비할 것도 별로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이빨을 닦으니 준비는 끝났다.
문을 열자 휑하니 먼지만 날리고 있는 마당이 보였다. 이곳도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했는데 뭐라고 꾸며볼까.
예전부터 나만의 마당을 갖고 싶었지만, 현실의 벽에 막혀 이루지 못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이루게 될 줄이야.
"엘리사."
"네. 아가씨."
"아카데미에 들렀다가 마당에 놓을 것들 좀 사가지고 오자."
"좋은 생각이시네요. 그럼 나중에 시장가에 들르도록 하죠."
엘리사와 약속하면서 아카데미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선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은 내 걸음을 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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