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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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괜찮은 척 했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속이 울렁거렸다. 평소 걷던 거리의 풍경이 이상하게 왜곡되어 보였다. 마치 술에 취한 것같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울렁거렸다.
나를 보는 사람들의 악의와 의심을 받는 것에는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마주칠 때마다 정반대라는걸 깨닫게 된다. 갈수록 익숙해져 가는 게 아니라 곪아가는 중이었다.
원래 나란 사람에게 사람과의 관계는 불편하고 버거운 것이었다. 엘리사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왔지만, 이 이상은 아직은 더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가장 힘든 건 그들이 보는 건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나`라는 사람이 아닌 원작 소설의 소니아를 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내가 아닌 자스민을 향해있지만, 악의와 비난은 온전히 나의 몫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나는 자스민이 저질러버린 죄를 그대로 받아내고 있었다. 어쩌면 자스민의 몸을 차지해버린 대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 게 아닌가.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아까부터 얼굴색이 좋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엘리사는 자꾸만 휘청거리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내 어깨를 잡은 채로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왜 나 같은 거랑 같이 다녀주는 걸까. 그냥 주인이라서? 하지만 이미 자스민을 버렸는데…….
죄책감일까. 그러나 죄책감이라기에는 원작의 자스민에 죄책감을 느낄 부분이 딱히 없었을 텐데. 엘리사가 떠나게 된 건 자스민 자신의 잘못이 원인이었는데 말이다.
엘리사는 지금 누굴 보고 있는 걸까.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지만 우울해질 뿐이었다. 지금은 그냥 그녀와 내가 마주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가씨!"
옆을 바라보니 내 어깨를 치며 말하고 있는 엘리사가 눈에 비쳤다. 그러고 보니 엘리사가 내게 말을 걸었었지.
마음 같아서는 힘들다고, 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 위에서 엘리사를 걱정시키기 싫었다.
"아……. 괜찮아. 조금 피곤했나 봐."
"......."
엘리사는 내 대답에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참는듯했다. 그 모습을 보니 괜스레 미안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엘리사와 잡고 있는 오른쪽 손을 앞으로 당기면서 엘리사에게 움직이자고 전했다. 여기서 더 늦어지게 되면 땅바닥에서 노숙을 해야 할 수도 있었기에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엘리사는 짧은 한숨을 쉬고 나와 발을 맞추어 걸어갔다. 나는 다운된 기분을 애써 끌어올리며 여관을 찾으러 여행을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남은 방이 없어서요……."
"갑자기 학생분들이 몰려와서…. 죄송합니다."
"다른 여관을 찾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대충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은 훨씬 심각했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대부분 기숙사를 이용했기 때문에 기숙사가 불타버리자 테오도르의 이름있는 숙박업소들은 전부 만석이 되었다.
심지어 테오도르의 집들 대다수가 계약을 진행 중이라는 말도 들렸다. 기숙사가 다시 지어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하고 그동안 살 집을 사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화재로 우리가 가지고 왔던 재산이 대부분 타버려서 지금은 여관에서 묵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그 여관에서도 묵지 못하게 될 수도 있지만.
한참을 돌아본 우리 앞에 허름한 여관이 보였다. 이 주변이 좀 노후된 동네이기는 했지만, 특히 이 여관은 테오도르의 건물답지 않게 허름했다.
여관 내부는 더욱 처참했다. 벽지는 누가 발톱으로 긁은 것처럼 뜯어져 있었고 바닥의 타일은 군데군데 비어있었다.
"아가씨. 더 찾아보는 게 낮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무리를 하더라도 집을 계약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사는 이 여관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나에게 대놓고 싫다고 말할 정도면 그녀가 얼마나 이 장소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여관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허름한 원룸에서 많은 세월을 보냈기 때문인지 오히려 살짝 그리운 느낌이었다. 무엇을 해도 무리를 해서 돈을 당겨오는 것보다는 나았다.
"괜찮아, 엘리사. 계속 여기서 지낼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여기서 방을 잡지 않으면 진짜 땅바닥에서 노숙을 할 수밖에 없을걸?"
"아가씨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엘리사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나는 엘리사의 등을 툭 하고 치고 카운터에 앉아있는 직원에게 물었다.
"저기 남은 방이 있나요?"
"남은 방이라……. 있기는 하지만 두 분이어서 쓰시기에는 좁을 겁니다."
"일단 그 방을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직원이 보여준 방은 여관의 옥상에 있는 옥탑방이었다. 실평수로 5평이 될까 말까 한 방은 보자마자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원룸 생활 때 살던 방이랑 규모가 너무 비슷해서 순간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두 명이 눕기에는 살짝 모자란 침대, 작은 책상과 의자, 좁아터진 옷장, 창문에서 나오는 태양 빛에 반사되어 보이는 떠다니는 먼지들까지. 뭐하나 안 그리운 게 없었다.
"남은 방이라곤 이것뿐입니다. 이것도 원래는 창고였는데 오늘 갑자기 손님들이 들이닥쳐서 급한 대로 방을 만든 거라 청소도 안 되어 있습니다만."
"아가씨.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엘리사. 이미 해가 다 지고 있는데 다른 곳을 갈 수도 없잖아."
"............"
"여기가 싫으면 소니아한테 가서 재워달라고 해야 하는데 괜찮아?"
"큭! 그건……."
소니아를 언급하니 엘리사의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그래도 엘리사 입장에서는 소니아한테 도움받는 건 싫겠지.
"엘리사. 조금만 여기서 지내자 알았지?"
"알겠습니다……."
"음, 정하신 건가요?"
"아, 네 여기서 묵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손님. 옥상은 자유롭게 사용하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뭘요. 이런 방이라도 사용해주신다면 저야 좋죠. 아, 참. 청소도구는 옷장을 열어보시면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직원은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한동안 묵게 된 방을 쭉 둘러보았다. 하숙집 같네.
최근에 자던 벨리타 가문의 본가나 아카데미의 기숙사에 비할 바도 못 되는 열악한 환경이지만 내 입가는 호선이 그어졌다. 말 그대로 오히려 좋았다. 이런대서 버둥대는 게 나답지.
나는 옷장을 열어 청소도구들을 꺼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일부를 건네주고 청소를 하자고 재촉했다.
"엘리사. 이제 청소나 하자. 잘 때는 깨끗한 곳에서 자야지."
방이 작아서인지 청소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바닥과 책상, 창문 틈새를 깨끗이 청소하고 창문까지 닦았다. 베개와 이불 같은 경우는 직원분이 새것을 주셨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남은 짐을 풀고 나와 엘리사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방을 찾으려고 한참을 돌아다니고 방 청소까지 했으니 몸이 자연스럽게 나른해졌다. 깨끗해진 방에서 나오는 성취감때문에 이런 나른함도 좋았다.
"아가씨, 청소하시는 게 익숙하신 것 같은데 어디선가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혼자 20년 이상을 살다 보니 몸에 익었어. 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귀족영애가 청소를 잘하는 건 이상하긴 하다.
"아……. 그게 노엘의 공방에서 몇 번 해봤거든."
"흐음……. 그러신가요."
엘리사는 작은 한숨을 쉰 후 작은 손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엘리사는 꺼내보라는 듯이 내게 그 상자를 건넸다. 남색의 작은 상자는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상자를 여니 내가 골랐던 목걸이와 처음 보는 반지가 들어있었다. 은색의 반지는 평범해 보였지만 반지의 표면에 처음 보는 이상한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절대 반지에 적혀있는 글귀 같달까.
내가 고개를 들어 엘리사를 쳐다보자 엘리사는 기다렸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목걸이는 전에 아가씨가 고르신 것이고 반지는 제가 따로 준비했습니다. 목걸이에는 아시다시피 프로테고라는 마법이 들어있습니다."
"반지는 뭔가 기능이 있는 거야?"
"반지는……. 아가씨가 마법을 익히시는 데 도움을 드릴 겁니다."
마법을 익히는 데 도움을 준다니. 마나를 더욱 쉽게 다룰 수 있게 해주는 걸까. 나는 일단 엘리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엘리사는 내게 이런 귀한 선물들을 주는데 내가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한스러웠다.
"정말 고마워. 뭐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줘.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뭐든지 해줄게."
"아닙니다. 저는 아가씨가 건강하게 지내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엘리사는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가 자스민에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금 그녀가 말하는 게 거짓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나도 저렇게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할 수 있을까. 나만을 보는 사랑만을 원하는 지금의 나는 그러지는 못할 것 같지만.
"목걸이를 차기에는 시간이 늦었기에 지금은 반지만이라도 끼워드리겠습니다."
엘리사는 조심스럽게 내 오른손을 들어 올려 오른손 약지에 조심스럽게 반지를 끼워주었다. 반지를 끼워주는 엘리사의 손은 긴장되었는지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걸 느끼니 나도 괜스레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내 손가락 사이즈는 이미 조사를 했는지 내 약지에 쏙 들어갔다. 꽉 조이지도 헐렁하지도 않은 나와 원래부터 한몸이었던 것 처럼 편안했다.
반지를 끼자 몸이 조금 더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주먹을 쥐었다. 펴보고 팔을 흔들어보니 몸이 전보다 가벼워진 것 같았다. 나중에 아카데미에서 마나를 움직여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해는 모습을 숨겼고 까만 밤하늘이 펼쳐졌다. 침대 옆에 있는 창문으로 보는 밤하늘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아가씨. 이제 주무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래야겠지? 내일 아카데미를 가야 될 것 같기는 하니까."
기숙사가 불타버린 거지 아카데미가 불탄 건 아니기에 수업 자체는 정상으로 진행될 것 같았다. 확답을 듣지는 않았지만.
침대의 이불을 펴서 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엘리사는 의자에 앉은 채로 담요를 무릎에 덮었다.
"엘리사 뭐해?"
"잘 준비입니다."
"같이 자는 거 아니야?"
"...........네?"
엘리사의 멍한 표정에 되려 내가 놀라버렸다. 아무리 주인과 하인의 관계라지만 이불로 한 개밖에 없는 이 상황에 그냥 의자에서 자라고 하라고?
의자에서 자다 일어나면 얼마나 힘든 하루가 되는지 알기에 엘리사에게 그런 일은 시키고 싶지 않았다. 침대도 둘이 자기에는 살짝 좁기는 했지만 둘 다 여자기도 하고 내 몸이 왜소한 체형이기도 하니 괜찮을 거다.
"정말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목걸이에 반지까지 나한테 줬는데 이런 것까지 양보받기는 싫어."
"하지만……."
"네가 침대에서 같이 안자면 나도 바닥에서 잘 거야 알아서 해."
그렇게 말하면서 이불을 뒤집어 썼다. 최대한 삐진 톤으로 말하긴 했는데 통하긴 할까.
내 걱정과는 다르게 엘리사는 조금 시간이 흐르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불이 들리는 게 느껴졌다. 부끄러워하며 몸을 반대쪽으로 돌린 채로 누워 있는 엘리사의 모습을 보니 웃음이 번졌다.
그동안 엘리사와 이렇게 가까이서 잠을 잔 적이 많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런 일 때문에 엘리사와 같이 자게 되니 엘리사와 더욱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엘리사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엘리사는 살짝 움찔한듯했지만 내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엘리사, 고마워."
"그동안 내 시중을 들어주고 날 구해주고 멋진 목걸이하고 반지도 줬잖아. 네가 없었으면 난 지금까지 살아있지 않았을 거야."
이 말은 진심이었다. 작금의 상황이 닥칠 때 나 혼자였으면 난 이미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었다. 그날, 엘리사가 내게 조금만 더 살아달라 부탁했을 때. 그 일 때문인지 나는 꾸역꾸역 살아있었다.
내 말을 듣던 엘리사는 몸을 내 쪽으로 틀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은 익숙하지 않아 보인 그 손길이 너무나 따뜻해서 나는 강아지처럼 손길에 몸을 맡겼다.
엘리사는 내 머리를 한참 동안 말없이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살짝 조심스러웠던 손길도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저야말로 아가씨께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지 못했던 행복감을 배우게 된 건 아가씨가 없으셨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훈훈한 분위기였다. 나와 엘리사가 서로 고마운 점을 말하는 것. 그러나 나는 전부터 생각했던 의심 때문인지 웃을 수가 없었다. 이 마음을 눌러보려고 해도 잘 되질 않았다.
"...........어떤 아가씨."
"네?"
"네가 말하는 아가씨라는 게 어느 쪽인 거야? 지금 네 앞에 있는 `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 사람 중에 누굴 말하는 건데."
"나 알고 있어. 소니아, 노엘, 마르셀린, 너까지 전부 나를 처음 봤을 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고 있었던걸. 마르셀린교수는 아직 나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건 투정이자 질투였다. 소설 등장인물이 대부분 회귀한 세계에서 처음부터 나를 있는 그대로 봐달라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푸념일 뿐이다. 소니아와 노엘은 지금은 딱히 나를 자스민에 겹쳐보고 있지는 않지만, 가끔 한 번씩 원래 안 이랬었는데 신기하다는 투로 말하면 마음이 쓰려 왔었다. 그래도 엘리사만은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기를 원했다.
엘리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 앉았다. 나 또한 엘리사를 따라서 침대에 앉았다.
"처음에는 아가씨가 말씀하신 대로 처음에는 아가씨를 그대로 마주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가씨에게 있어서 죄인이니까요."
".........그래?"
"하지만 아가씨가 창문에 몸을 던지신 그 순간부터 제가 알던 아가씨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가 알던 아가씨는 그런 행동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아가씨를 하루하루 모시며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는 아가씨 몸에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달라지셨죠."
순간 흠칫할 수 밖에 없었다. 엘리사 입장에서는 아마 농담이었겠지만 나로서는 내 가장 깊은 비밀을 들킨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순간 괜히 투정을 부렸나, 라고 후회할 정도였다.
엘리사는 내 모습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짓더니 숨을 크게 쉬었다. 엘리사는 내 두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이었다.
"당신이 창문에서 몸을 던진 후부터 당신을 내가 알던 자스민과 겹쳐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당신이 벨리타 자스민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내 두 손을 잡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의 눈은 떨리고 있었고 볼은 사과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 얼굴도 뜨거워져 갔다.
엘리사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내리고 싶었지만, 그 이상으로 엘리사의 눈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만을 바라볼 겁니다. 그러니 당신도 저와 많은 시간을 함께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을 하고 엘리사는 내 오른쪽 손에 끼워진 반지에 입을 맞췄다. 내 얼굴에 열이 확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흔들리는 눈으로 엘리사는 바라보았지만 엘리사는 상기된 얼굴로 웃어 보일 뿐이었다.
정말 지독한 사람이다. 이런 말을 들어버리면 자살 같은 건 뒷전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점점 눈시울이 붉어질 것 같기에 나는 엘리사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엘리사의 팔이 내 몸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따뜻하고 단단한 팔. 그 안에 있으니 캥거루의 주머니 안에 들어간 새끼처럼 안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허름한 여관의 옥탑방에서 우리는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