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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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빨라져가는 발걸음을 옮겨 기숙사로 도착했다. 기숙사는 예전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타오르고 있었다. 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모습에 침을 삼켰다.
기숙사 창문에서는 황백색의 화염과 흑색의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특히 2층 창문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암흑과도 같은 연기는 기숙사 건물을 온통 뒤엎어 버렸다. 종종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화염에서 전해지는 열기에 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주변에는 혼란스러워하는 학생들과 그들을 진정시키려고 하는 교수들이 있었다. 교수들은 학생들을 기숙사 근처에 가지 못하게 학생들을 막고 있었다. 허나 교수들도 당황한 건 매한가지인지 그들의 얼굴에서 당황함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가까이 있는 나이가 지긋하신 교수님에게 다가가 물었다.
"교수님, 화재의 원인은 밝혀졌나요?"
"아아. 지금으로써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단다. 일단 타오르고 있는 기숙사 불부터 끄고 나서야 원인을 파악하는 게 가능하겠지. 지금 알 수 있는 건 한가지 실화가 아니라 방화라는 점이지."
"어째서요?"
"기숙사는 마법으로 처리되어있어서 웬만한 불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단다.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타는 건 누군가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한 짓이지."
전에 엘리사도 기숙사 안은 안전하다고 말했었지. 그런 기숙사를 불타게 만들다니 누가 한 짓일까. 누구의 소행인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교수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기숙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기숙사 주변에는 불이 번질만한 것들이 없었기에 교수들도 불의 진화보다는 기숙사가 전소하기까지 기다리는 것 같았다. 아마 평범한 수단으로는 불을 끄는 게 불가능한 거겠지.
엘리사는 가만히 있는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어느새 그녀는 손에 작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아마 저게 우리의 모든 짐이겠지. 올 때 들고오던 짐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그때와 비교하면 실례일 정도로 적은 짐이었다.
"아가씨. 이제 숙소를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엘리사의 얼굴은 어딘가 살짝 초조해 보였다. 아까 봤을 때는 짐이 없었는데도 바로 여관으로 가자고 했고, 지금도 내가 서둘러 여관에 가길 바라는 것 같았다. 평소에 엘리사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런 모습은 이상했다.
엘리사에게 어째서 초조해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주변이 이렇게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바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여관을 일찍 잡는 것에는 찬성이었으니까. 기숙사가 불타버린 지금, 기숙사에 살던 학생들의 행선지는 숙박업소가 될 것이다. 빨리 좋은 숙소를 잡아야지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기 전까지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많은 수의 학생들이 서둘러 남은 짐을 싸고 학교를 나가고 있었다. 엘리사가 초조해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니겠지만 뭐 어떤가. 나중에 도착하고 물어봐도 늦지 않다.
"거기 잠깐,"
엘리사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누군가 나를 잡았다.
"마르셀린……. 교수님?"
아카데미 최연소 교수인 그녀는 나를 찌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원망 가득한 눈빛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나는 그녀의 눈빛에 위축되어 자연스럽게 엘리사의 옷깃을 잡았다.
자스민이 마르셀린에게 끼친 영향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일이었다. 사람의 시점에 따라 가벼운 장난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상당히 큰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허나 자스민이 마르셀린의 앞길을 막은 장애물 중 하나라는 점에는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시작은 자스민을 향만 가벼운 꾸중이었다. 자스민은 수업태도가 그리 좋지 못한 학생이었기에 꾸중을 듣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자신만의 감옥에서 살다 온 자스민에게는 그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때 일어난 어떤 사건에 마르셀린이 연루되자 자스민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나와 다르게 자스민은 사교계에 친분이 있는 귀족들이 많았기에 마르셀린에 대한 질이 나쁜 소문들을 퍼트린 것이다. 마르셀린은 아카데미의 최연소 교수가 된 것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소문을 반겼다.
소문은 바람과 같아 쉴 새 없이 퍼져나간다. 그것이 누군가의 험담이라면 더더욱. 마르셀린에 대한 소문은 사람들을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허나 소문으로 파생된 파급력은 가볍지 않았다. 마르셀린에 대한 평은 시간이 갈수록 떨어져갔고, 소설에서 마르셀린의 트롤쇼가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혐성이라며 마르셀린에 대한 욕도 많았었지.
"기숙사 화재에 대해 뭔가 아는 건 없어?"
고압적인 태도로 내게 물어오는 마르셀린은 팔짱을 낀 채로 날 압박하고 있었다.
난 그녀의 눈을 쳐다본 채로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내 눈은 그녀의 목젖을 향했다.
".......아무것도요."
"확실해? 참고로 말하는데 나는 소니아처럼 사람이 바뀌었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넘어가지 않으니까 확실히 대답해. 네가 한 짓이 아무것도 없다고?"
"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마르셀린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마 그녀의 입장에서는 내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겠지. 아무리 주위에서 사람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가증스러운 연기로 보일 뿐이겠지.
자신을 포함해 많은 사람을 괴롭힌 년이 뜬금없이 일어난 기숙사 화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그녀의 입장에서는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물론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억울할 뿐이었다. 어차피 내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마르셀린은 듣질 않을 것이다.
마르셀린은 어물쩍거리는 내가 짜증이 났는지 내 어깨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녀의 손을 쳐내고 그녀를 쏘아붙였다.
"그만하시죠."
"하, 너는 또 왜 참견이야. 충신 코스프레는 그만두지그래. 너야말로 저년을 죽인……."
"그만하라고."
"읏……!"
갑자기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졌다. 엘리사는 마르셀린의 팔을 잡아채서 힘을 주었다. 마르셀린은 잡힌 팔을 풀려고 했지만 엘리사의 악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둘 우리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이런 비슷한 일이 몇 번이나 있어서 내 평판이 좋은 편이 아닌데 이번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면 내 평판은 바닥으로 치 닫을 것 같았다. 엘리사의 옷깃을 잡아당겨 엘리사에게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
엘리사는 손아귀에 힘을 풀었고 마르셀린은 바로 잡힌 팔을 풀었다. 마르셀린은 나와 엘리사를 쏘아보았다. 나는 이 상황을 끝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만 저는 이 일에 관여하지 않았고, 저는 당신이 말한 자스민과 동일인물이 아닙니다. 제가 의심스럽더라도 지금은 일단 서로 해야할 일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내 입에서 나온 말답지 않게 나름대로 괜찮은 말이었다. 내 말에 내가 감탄하고 있을 때 그녀는 팔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후……. 그래. 지금은 그냥 넘어가지만 네가 방화를 했다는 증거가 나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몸을 돌리고 나아가서 학생들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를 제외한 학생들을 위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내가 그 울타리 안에 없다는 사실이 못내 씁쓸했다.
"엘리사 이제 숙소나 잡으러 가자."
"네……. 아가씨."
나는 엘리사의 옷깃을 잡은 채로 학교를 나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