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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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은 야속하게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걸 뼈저리게 느껴왔기에 아쉬움을 남기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뒤를 돌아보니 보이는 것은 후회 뿐이었다.
그럼 이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어차피 후회뿐인 삶이라면 차라리 접는 게 맞지 않을까.
충동적인 물음은 어느새 나를 건물 옥상으로 끌고 갔다. 무서운 것 없이 움직이던 발걸음은 아이러니 하게도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 없는 순간이었다.
시간은 화살처럼 쏜살같이 나아갔다.
노엘의 공방에서 나온 뒤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밀렸던 수업진도는 소니아와 노엘의 도움으로 간신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특히 노엘은 그날 뒤로도 연금술뿐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를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 대가로 종종 노엘의 공방을 청소해주곤 했다.
오늘도 노엘의 공방에서 청소를 해주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노엘이 밥까지 사주었기 때문에 다른 날보다 정성을 두 배로 담고 일하고 있었다. 노엘은 오늘은 연구를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공방에서 쓰는 체인 안경 줄이 달린 안경은 그녀의 지적인 분위기를 증폭시켜 주었다.
그렇게 열심히 청소는 하고 있던 와중 노엘로부터 뜻밖의 사실을 듣게 되었다.
"친구야 이제 곧 있으면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한 달째인 거 알고 있지?"
"어? 벌써 그렇게 됐어?"
"그래, 몰랐던 걸 보니까 어느 과를 선택할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겠네."
아카데미의 신입생들은 한 달간의 기초교육과정은 완수한 후 과를 선택한다. 공통과목이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가르치는 범위가 넓지 않다. 그렇기에 선택한 과에 따라서 장래가 결정된다 할 정도로 선택에는 매우 신중해야 했다. 내일이 과를 선택하는 날이라 내 머리는 그렇게 신중해지지 못했지만.
사실 교양과목은 역사학을 하기로 정해두기는 했다. 원래부터 여러 나라의 역사를 배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역사학과를 보자마자 고민도 하지 않고 골랐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마학과에는 수많은 과가 있다. 그중 하나, 많아 봤자 두 개까지 선택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교양과목은 정했어?"
"역사학으로 하려고."
"그래? 의외네."
".......어디가?"
노엘은 내 물음은 무시하고 읽던 책을 덮었다. 그녀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로 내게 물어보았다.
"우리 친구는 따로 가고 싶은 과는 있어?"
"많아서 문제야……."
"그럼 일단 연금술 쪽은 하지 마."
"엑. 왜?"
노엘한테 들은 수업으로 꿀 빨 생각이었는데…….
"일단 넌 연금술에 재능이 없어."
".....윽! 알고 있거든?"
"그리고 연금술은 내가 교수보다 더 잘하고 잘 가르쳐 줄 수 있거든."
한마디로 연금술은 자신한테 배우니까 다른걸 고르라는 뜻이었다. 노엘의 배려에 나는 감동한 눈빛으로 노엘을 쳐다보았다. 노엘은 인자한 미소로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이제 연금술 쪽은 빼고 네가 고민하는 학과들을 한번 말해봐."
연금술은 어려운 과목이기 때문에 1학년 때부터 배울 수는 없다. 노엘이 말한 연금술 `쪽`이라는 것은 연금술을 배우기 위해 선행되는 약초학과 마법약 수업 등을 가리킨다. 그렇기에 많은 과들이 선택지에서 사라진 것이다.
"천문학, 점술, 고대룬, 마공학정도?"
"..............반으로 줄여봐."
"천문학 하고 마공학?"
"나는 마공학을 추천할게."
마공학. 말 그대로 마법과 과학을 접목한 학과다. 이 대륙에 여럿 있는 마법 학교들 중 이 아카데미에만 있는 과목이었다. 신설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과학에 대한 세간의 인식 때문에 인기가 많이 없는 학과였다. 원작소설에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고.
"의외네. 왜?"
"마공학이라는게 생각보다 쓸데가 많거든. 소니아가 마공학과에 들어간다고 하기도 했고."
"어? 진짜?"
소니아가 마공학과를 선택했다고? 원작의 소니아는 1학년때는 소환마법을 전공했는데……. 이제 와서 원작 그대로 따라가는 게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남았다. 왜 하필이면 마공학을?
"표정을 보니까 꽤나 의외인가 보네."
"어, 어……. 소니아가 이런 데 관심이 있을 줄 몰라서."
"뭐, 자기 말로는 알아볼 게 있다는데 난 잘 모르겠다."
알아볼게. 있다라. 궁금하긴 한데. 나중에 소니아한테 물어봐야겠다. 짧은 고민을 끝내고 노엘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음……. 그럼 나도 마공학과로 할게. 같이 고민해줘서 고마워."
"그래. 듣다가 별로면 내년에 다른 수업으로 갈아타면 되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노엘의 공방을 나와 하늘을 보니 노을이 져가고 있는 하늘이 보였다. 저물어가는 노을을 보니 저번에 시내 거리에서 봤던 음식점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싶었지만 엘리사의 얼굴을 보고 참았다. 혼자 다니면 위험하니까.
테오도르의 치안은 굉장히 좋은 편이지만 나는 내 목을 조르던 가면녀때문에 함부로 혼자서 돌아다니질 못했다. 처음에는 답답했지만, 이것도 적응되니 나름대로 괜찮아졌다.
"아가씨."
"어? 엘리사.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기숙사를 향해 힘차게 걸음을 옮기고 있던 와중 엘리사와 마주쳤다. 보통은 기숙사에 있을 텐데 여기까지 나오다니 별일이네.
"기숙사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기숙사 안에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아가씨를 모시러 왔습니다."
화제라는 말에 몸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원작에는 이런 사건이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건이 늘어갈수록 내 불안함도 같이 커졌다.
"다친 사람은 없어?"
"아직 사상자가 있다는 소식은 없었습니다."
"너는 괜찮지?"
"네. 아가씨."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짓는 엘리사를 보자 그나마 걱정되던 것들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아직 걱정거리는 산더미처럼 남아있었지만.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자야 해?"
".......일단은 여관에서 묵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게 최선이겠네."
"네. 중요한 짐은 챙겼으니 바로 숙소로 가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전에 기숙사에 한번 가봐도 될까? 직접 보고 싶어."
"원하시는 대로."
기숙사를 향해 힘차게 걷던 발걸음은 조금씩 조급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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