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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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 흔한 금속을 금으로 만드는 걸 목표로 했던 학문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현대에 이르러서는 다른 금속으로 금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밝혀지기도 했다. 여러 단체에서 조롱과 멸시를 받았지만 결국 그들의 유산은 후대 과학자들에게 전해져 현대 화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 세계에서도 판타지 세계인만큼 당연히 연금술은 존재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확실히 인정된 학문이라는 점일까. 현대에 와서야 가능하다고 밝혀진 금을 만드는 일도 일정 수준에 이른 연금술사들은 금속을 다른 금속으로 손쉽게 바꿀 수 있었다.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되던 현자의 돌도 이 세계에서는 3명이나 제조를 설명했다. 그리고 지금 난 현자의 돌을 제조한 3명 중 하나인 노엘 필립스의 공방에 있었다.
내 키를 훨씬 상회하는 길이의 책장이 사방에 가득했다. 책장에는 연금술 서적으로 보이는 책들이 꽉 차 있고 그 옆에 있는 수납장에는 빈 유리병들이 보였다. 먼지가 수북한 안쪽 창고에는 연금술을 위한 재료들로 가득했다. 방 중앙에 있는 책상에는 여러 시약과 플라스크가 널브러져 있는 게 최근까지 그녀가 실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도서관 같기도 했지만 책상 위에 물건과 타일 돌바닥은 실험실 같기도 했다.
"어때, 친구야. 연금술사의 공방에 들어온 소감이."
노엘은 푹신해 보이는 의자에 앉은 채로 내게 물음을 던졌다. 그녀의 안경은 어느새 체인 안경 줄이 달려 있었다.
그 모습과 이 방의 조화가 그녀가 연금술사인걸 체감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안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장소에서 노엘은 어른 같았다. 물론 회귀를 했기에 실제 나이를 따지자면 17보다는 훨씬 나이가 많을 것이다. 내가 놀란 것은 평소 내가 알던 장난기 넘치는 모습과 달리 공방에서 노엘은 조용하고 섬세했으며 또, 인자했다. 다른 사람처럼 바뀐 그녀의 모습에 나는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마음속 한편으로는 편안해 지는 게 느껴졌다.
"뭔가 웅장한 기분이야. 근데 나는 연금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데 도움이 될까?"
"뭐, 걱정하지 마. 네 생각보다 바쁠 거니까."
노엘은 가볍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바닥에 놓여져 있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와 내 손에 쥐여주었다.
"이제 그걸로 바닥을 쓸어. 창고에 들어있는 재료 쪽은 손대지 말고."
"..........네?"
"뭘 `네`야. 설마 내가 연금술 지식도 없는 사람에게 조수 일을 맡길 리가 없잖아."
"에, 에엑…."
"친구야, 여기 시약 중에는 함부로 건드리면 큰일 나는 것들이 많아서 그래. 청소 끝나면 간단한 거라도 가르쳐줄게."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은 노엘은 책상으로 돌아가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확실히 연륜이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내게 이모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녀가 맡긴 일을 하기 위해 빗자루를 쓸기 시작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청소는 굴러가는 두루마리 휴지처럼 끝이 보이질 않았다. 사실 노엘이 시킨 일 자체는 엄청나게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내 오기가 청소를 막노동 같은 강도가 높은 육체노동으로 바꿔놓았다.
공방의 크기는 생각보다 컸고 그동안 청소도 제대로 되어있지도 않았기에 단순히 바닥을 쓰는 일도 쉽지 않았다. 바닥을 쓸고 마대로 돌바닥을 윤낼 정도로 박박 닦았다. 나는 돌바닥에 내 얼굴이 흐릿하게 비칠 정도가 되자 만족하고 마대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원래는 여기서 그만해도 되지만 숨을 돌리면서 눈에 잡힌 책장과 수납장의 먼지를 보자 멈출 수가 없었다. 저 먼지들은 놔두기에는 내 오기가 생각보다 강했다. 엘리사가 내가 말려도 기숙사를 하루에도 몇 번씩 청소하는 이유가 이런 마음일까. 나는 엘리사의 마음을 좀 이해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으로 행주를 가져오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책장에 있는 책들을 전부 빼내고 먼지를 닦고, 빈 유리병들도 마찬가지로 전부 빼내고 남아있는 먼지를 닦았다. 물론 책과 유리병에 붙어있는 먼지 또한 잊지 않았다.
모든 일을 끝냈을 때 내 몸은 액체가 된 것 같았다. 깨끗해진 바닥과 책장을 보니 뿌듯함과 피곤함이 손잡고 내게 찾아왔다. 엘리사 앞으로는 막 어질러 놓지 않을게….
노엘이 앉아있었던 소파에 몸을 맡기고 아직도 연구를 하고있는 노엘을 바라보았다. 청소하면서 좀 시끄러울 때도 있었지만 노엘은 내 쪽에는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녀가 무언가에 진지하게 임하는걸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신기하면서도 존경심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 창문을 바라보니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있었다. 시간이 엄청나게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힘들어서 그런지 실제시간보다 시간은 훨씬 짧게 체감한 것 같았다. 노엘과 약속한 것도 있으니까 노엘한테 연금술에 대해 배우고 싶은데…. 아직 시간은 넉넉하니까 좀만 기다리면 되겠지….
"........야, 일어나."
"으, 으응?"
"친구야, 지금 자면 이따 밤에 힘들어. 일어나야지."
"어…. 어?"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어느새 해는 지평선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노엘은 연구가 끝나고 잠들어 있었던 나를 깨워주었던 것 같다. 오늘 청소가 많이 힘들었나.
"친구야, 너 해가 지기 전까지 기숙사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아! 맞아."
그 말에 기숙사에서 기다리고 있을 엘리사가 떠올랐다. 아 이번에도 늦게 돌아가면 엘리사가 진짜 화낼 텐데. 근데 연금술은 어쩌지.
"연금술은 내일 가르쳐줄 테니까 일단 기숙사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늦게 보내주다가 그 메이드가 미쳐 날뛰는 꼴은 보고 싶지 않거든."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노엘은 내게 어서 가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허둥지둥 돌아갈 채비를 하고 노엘의 공방을 나섰다.
"아, 노엘 깨워줘서 고마워. 내일 보자!"
문을 나서기 전 감사 인사를 전하고 서둘러 기숙사로 향했다. 뒤에서 노엘의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고마운 건 난데 말이야."
그녀, 노엘 필립스는 몰라볼 정도로 깨끗해진 자신의 공방을 돌아보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그녀의 연구가 일단락 되었을 때 그녀는 자기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달라졌다고 해도 본질은 귀족 영애였다. 일평생 청소라는 행위를 자신이 해봤을 리가 전무했다. 그녀도 그것을 알기에 그녀에 대충 바닥만 몇 번 쓸었다고 해도 별 상관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귀족 영애의 솜씨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청소 실력을 보여주었다. 단순히 바닥뿐만이 아니라 책장과 수납장까지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벨리타 자스민. 알면 알수록 신기한 아이였다. 전생에는 악녀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었던 아이가 이번에는 그 누구보다 순수한 영혼이 되었다. 그 광견에는 과분할 정도였다. 스스로 그 사실을 알기에 자스민 곁에 누군가 있는 걸 경계하는 거겠지.
소파에 앉아 쥐 죽은 듯이 잠이 들어버린 자스민은 귀여운 다람쥐 같았다. 잡아먹고 싶다. 순간 그렇게 생각하며 뻗은 손을 멈췄다.
`오늘 많이 피곤했나.`
그녀는 충동적인 욕구를 피로의 탓으로 넘기며 눈가를 지압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어린 꼬마한테 이런 생각을 하다니. 요즘 여러모로 쌓여있던 게 문제였나.`
그녀는 창문을 슬쩍 보고 노을이 진 걸 알자 그녀를 깨우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놔두면 참지 못할 것 같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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