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자아
* * *
익숙하지 않은 쾌감 속에 허우적거리다 일어나자 보이는 풍경은 나름 익숙해진 기숙사 천장이었다. 혹여나 아직도 가면녀한테 잡혀있으면 어떡하지 라고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기우였던 모양이다. 익숙한 풍경에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내 근처에 있었던 엘리사가 나에게 서둘러 다가왔다.
"아가씨……!"
엘리사의 말에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순간적으로 목에서 따가움이 느껴져서 대답하지는 못했다. 성대를 못이 찌르는 느낌이랄까. 처음 느껴보는 느낌에 당황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엘리사을 향해 손짓하자 엘리사는 헐레벌떡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편찮으신 데는 없으신가요?"
"아아……. 뭐 괜찮네."
사실 목이 따가워 죽을 것 같지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눈물을 아슬아슬하게 억누르고 있는 메이드에게 힘들어 죽을 것 같다는 투정을 부릴 정도로 나는 못되지 않았다. 사실 내가 당한 이유는 엘리사의 책임이 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엘리사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내 실책도 없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흐윽……. 엘리사. 나를 납치했던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어?"
사실 가장 궁금한 질문이었다. 나는 그녀의 맨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전생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뭔가 다르지 않았을까. 그런 막연한 기대감에 던져본 질문이었다. 엘리사의 정확한 대답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어차피 엘리사의 얼굴을 보면 정체는 짐작했는지 하지 못했는지는 알 수 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아가씨. 저희의 능력으로는 아가씨를 구출한 공간에서 아가씨를 꺼내오는 게 제 한계였습니다."
그렇기에 엘리사의 대답은 내 예상외였다. 단순히 엘리사뿐만이 아니라 원작 주인공인 소니아까지 왔는데 정체를 확정하지 못했다니. 아무리 의심해봐도 죄책감에 깊이 빠져있는 엘리사의 얼굴을 보면 또 다른 가능성을 논하는 게 바보갔았다. 어찌 되었든 나를 구하러 온 사람이 아닌가. 나는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서 엘리사의 손을 잡고 싱긋 웃어 보었다.
엘리사는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내 팔에 고개를 파묻었다. 엘리사의 떨리는 소리와 축축해져 가는 팔을 통해 그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물론 이 사건은 그녀의 실책이지만 그 누가 벽에서 튀어나온 미친 가면녀가 사람을 납치할 거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엘리사의 머리를 한쪽 손으로 쓰다듬으며 엘리사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엘리사는 내게서 떨어졌지만 내게 붙어서 울던 게 생생히 기억나는지 빨개진 눈가와 볼을 감추지는 못했다. 나는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정리한 뒤 침대에 걸터앉아 엘리사에게 물었다.
"엘리사,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원래대로라면 그냥 다음 날 아침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너무 쨍쨍히 나를 비추는 태양은 내 희망을 잔혹하게 깨부쉈다.
"아가씨께서 잠드시고 4일지 지나셨습니다."
"4일?"
내 말에 엘리사는 소리 없이 얼굴을 끄덕이며 긍정했다. 4일이라니. 물론 푹 잔 느낌 때문에 상당히 많이 잤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24시간을 한참 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4일이면 몇 시간이지? 96시간? 내가 그렇게 오랜 시간 잠들 수 있는 인간이었던가. 내 목을 정성스럽게 조르던 가면녀의 덕인가. 나는 내 목을 매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내 근처에 있는 손거울을 들어 내 모습을 보았다. 내 모습은 딱히 다르지 않았지만 내 목에 남겨진 상흔은 그날에 있었던 일을 생생히 증언해주는 증인의 역할을 했다. 얼마나 세게 졸렸었는지 내 목에는 그녀의 손 모양 그대로의 멍이 남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은 물론이고 이름도 모르네. 그녀에 대한 건 아무것도 모르지만 엄청나게 걱정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어째서인지 자주 마주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일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손거울에 머리를 박았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 아냐. 아무것도."
안절부절못하는 엘리사가 안쓰러워 손거울에서 머리를 때고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
4일이 지났으면 지금은 이미 수업 중이라는 건데……. 지금 가는 건 무리겠지?
"엘리사 지금 아카데미에 수업 들으러 가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즉답이네.
"아가씨께서는 지금 이렇게 보여도 신체적으로 나약한 상태입니다. 지금 무리하게 수업을 들으러 움직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어, 어? 알았어……."
진지하게 나를 설득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설득되어 버렸다. 물론 나도 진심으로 가겠다고 말한 거는 아니지만 엘리사쪽이 진지하게 말하니까 나도 덩달아 진지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은 이곳에서 하루종일 보내야 하는 걸까……. 본가였으면 이리저리 놀만 한 것이 많았겠지만 삭막한 기숙사는 주변을 둘러봐도 딱히 재밌을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엘리사 입장에서는 4일 만에 깨어난 환자겠지만 나로서는 그냥 푹 자다 일어났을 뿐이다.
"엘리사."
".........."
"엘리사."
"네……. 아가씨."
엘리사는 두 번 만에 내 말에 대답해 주었다. 내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엘리사는 벌써 내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였는지 곤란한 얼굴을 띄우고 있었다.
"나 지루해."
"하지만 아가씨……."
"응?"
"아가씨는 두렵지 않으신가요?"
두럽다라……. 보통 이상한 가면녀한테 납치되어 목을 졸려 죽을뻔한 일을 겪으면 두려워 하는 게 보통이지만 어째서인지 내 안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다른 감정에 비해 희미했다. 어째서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분명 그녀의 손이 내 목을 조를 때 느낀 감정 중에 두려움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아마 내 목숨을 내가 끝내지 못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것이 아니었을까. 자살하려고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외부인의 손으로 내 삶을 마무리하기는 싫었다. 물론 두려움뿐만이 아니라 쾌감과 기대감을 동반했지만, 이 감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파헤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네가 계속 곁에 있을 거잖아."
그러니까, 지금은 이게 내 마음이겠지. 엘리사가 나한테 눈을 떼지 않는다면 두렵지 않다. 그런 마음을 담아 엘리사의 손에 내 손을 얹고 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