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암전
* * *
눈을 뜨자 보이는 건 고풍스러운 침실이었다. 검정과 보라색계열에 침실은 앞서 말한 대로 고풍스럽지만 서늘한 느낌이 내 목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고스로리를 입으면 잘 어울리겠네.
"어때? 내 침실이."
"뭐……. 예쁘네요."
나름대로 솔직한 심정을 밝히자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녀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내 몸을 들어 침대 위에 올려놨다. 그러더니 자신도 그 옆에 걸터앉았다.
"옮지. 착하지? 여기 가만히 앉아 있으렴."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일순간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깎인 과일들을 쟁반에 든 채로. 그녀는 쟁반에 놓인 과일 몇 개를 내 입에 넣어주며 맛있냐고 물어왔다.
그녀의 정체가 뭘까? 원작 소설에서 이런 공간이동 같은 능력을 자유자재로 쓰는 사람이 있었나? 아 과일 맛있네. 애초에 화려한 문양의 가면을 쓴 여자가 소설 속에 나온 것 같지도 않은데. 나름 원작 소설을 꼼꼼히 읽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그녀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일단 나를 해칠 생각인 것 같지는 않으니까 대화하면서 알아가야 하겠지. 그동안 비현실적인 사건이 많아서 그런지 이 정도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나는 나름의 뿌듯함을 느끼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를 왜 끌고 오신 거죠?"
"음……. 일단 호기심?"
"호기심이라고요?"
"그래, 그 말대로. 원래는 작업을 치는 와중에 밖이 시끄러워서 나가본 거였거든? 그런데 그러다가 네가 누군지에 대해서 호기심이 생겨버려서 말이야."
가면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녀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건 절실히 느껴졌다. 내가 뭐라고 다들 나를 궁금해 하는 걸까. 아, 내가 아니라 자스민인가. 이제는 이것도 헷갈린다.
"이름은 벨리타 자스민. 아카데미 신입생이지?"
"ㄴ, 네……."
"엘리사라는 이름의 메이드가 있고."
"........."
"분명 같은 사람인데 말이야. 왜 다른 사람 같을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아까까지는 화기애애 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숨을 쉬는 것 마저도 힘들어져 가고 있었다. 험악해지는 게 아니라 차가워진다고 해야 하나?
어느새 그녀가 보여주었던 활발함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녀의 말투는 차갑고 무뚝뚝했다. 갑자기 일어난 변화에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거칠어지는 호흡 때문에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을 아주 싫어하거든? 특히 거짓말이 두 번이나 반복되면……. 절대 용서하지 않아."
그녀의 손은 내 머리카락과 몸을 쓸면서 말을 이었다. 이 일련의 과정은 엄청나게 고혹적이어서 아찔한 기분이었다.
"그러니 꼬마야, 한 번 더 물어볼게."
그녀는 내 몸을 툭 밀쳐 침대로 밀어트렸다. 그녀의 기백 때문일까, 내 몸은 변변찮은 반항을 하지도 못한 채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내 위에 올라타 날 내려다보며 질문했다.
"넌 누구니?"
콰앙—
둘의 싸움은 고요했지만, 격정적이었고 치열했다. 자스민의 생각대로 둘 모두 힘을 조절하고 있었지만 대충 싸우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탓인지 둘의 승부는 결착이 나지 않고 있었다. 엘리사의 주먹도 소니아의 마법도 서로에게 유효타를 내게 할 수는 없었다.
둘의 공격이 수없이 부딪치고 나자 둘도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엘리사는 숨을 고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에 있는 소니아의 도발에 넘어가벼러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던 그녀의 주인인 자스민을 찾기 위해서였다.
"아가씨?"
`또 어딘가로 가신 걸까`
그렇게 생각했으나 주위를 아무리 돌아봐도 자스민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상해. 아가씨가 어딘가로 걸어가신 거면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는데.`
"왜 그래? 갑자기."
"아가씨가 사라졌어."
"뭐?"
소니아는 농담하지 말라는 듯 코웃음을 쳤으나 직접 둘러보니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가씨가 잘못되면 넌 각오해."
"하, 이제는 책임 전가까지 해? 지랄하지 말고 네 주인이나 찾아. 지도 도발에 넘어가서 헬렐레했으면서 뭘 잘했다고."
"......"
소니아는 주변을 탐지해봤지만 자스민을 찾지는 못했다. 대신 이상한 마나의 흐름이 비틀려있던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자스민이 앉아있었던 그 자리였다.
"하, 좆같은 쥐새끼가 있었네."
엘리사또한 같은 걸 눈치를 채고 소니아와 자스민이 앉아있었던 곳으로 걸어갔다.
비틀려 버린 마나의 흐름. 평범한 마법은 마나의 흐름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 정도로 비틀린 흐름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도시 안에서라면 더더욱.
`갑자기 사라진 자스민, 비틀려 버린 마나의 흐름. 의심이 가는 인물은 몇몇 있지만 특정할 수는 없어.`
소니아는 범인을 생각하고 있을 때 엘리사는 불안감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자스민을 내버려 두고 도발에 넘어간 자신을 자책하면서 자스민을 되찾을 방안을 생각하자 하나의 방법이 떠올랐다.
"너 아가씨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지?"
"허어, 그건 왜 물으실까."
"인정하기는 싫지만, 마법에 관련해서는 너만 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드니까."
"그래, 네 말대로 할수는 있지. 근데 내가 왜 해줘야 하지?"
소니아는 엘리사를 바라봤다. 엘리사는 발끈했지만, 자신을 진정시키고 소니아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넌 아가씨의 친구니까."
"허어. 아까는 친구라 하니까 발작하시더니 이제는 친구가 맞다?"
"....읏! 그건 당연한 반응이었다는걸 알잖아. 지금은 네가 아가씨를 좋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알겠으니까 굽힐 수밖에."
"뭐, 니가 어떻게 행동했든 구하긴 했을 테지만."
짧게 읊조린 소니아는 여러 개의 마법진을 동시에 소환하면서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엘리사는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미처 억누르지 못한 죄책감을 씹으면서.
"케엑, 컥."
내 위에 올라탄 가면녀는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질문을 하지 않자 그녀는 기가 찬 헛웃음과 함께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녀는 날 한 번에 기절시키지 않았다. 내가 기절할 때 즈음에는 손에 힘을 잠깐 풀었다가 다시 힘을 주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엘리사한테 외출할 거라고 말이나 해둘걸. 자살을 하고 싶었다지만 이런 식의 타살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흐윽…."
"꼬마야 아직 버틸수 있지?"
그녀의 손이 다시 내 목을 조른다. 뇌에 산소가 부족해지자 온몸에 힘이 빠져 팔을 들어 올리는 것 조차 불가능했다. 점점 흐려지는 시야는 내가 이 몸이 얼마나 무기력해졌는지 알려주었다. 시야는 첫눈같이 새하얀 색으로 번졌다. 고통스럽지만 고통스럽지 않다. 저 미친년은 내가 뭘 했다고 나한테 그러는 걸까. 그녀의 손에 힘이 빠지는 순간 이 고통은 전부 사라지고 쾌락만이 남는다. 왜 한번에 안 죽이는 거지? 그러니까
"커억, 컥"
백색으로 뒤덮였던 시야는 암전 후에 흐릿하지만, 앞이 보일 정도로 되돌아왔다. 내 위에서 목을 조르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는 것 같지만 아쉽게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 편하고 행복했다. 벌써 몇 번이나 졸리는 걸까. 질식 플레이를 하는 이유가 이거였나.
"...............................얘 꼬마야 내 말 들리니?"
"아……. 흐으…."
"별문제 없나 보네. 잘 들으렴."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내 입에서 흐르는 침을 슥 닦아준 뒤에 손을 다시 목에 가져다 대고 살짝만 힘을 주었다. 내 생명에 위협은 되지 않지만, 위기감은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실제로 내 몸은 그녀의 손이 내 목에 닿자마자 흠칫 떨려왔다.
"마지막 질문이야 꼬마야. 넌 뭐니?"
무감정하고 싸늘한 말투. 그 안에 남아있는 일말의 호기심이 날 지금까지 살아있게 만든 거겠지. 어차피 내가 진실을 얘기한다고 하더라도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궁금한 거라도 물어볼까…….
"가면 벗어주면 안 돼요?"
"뭐?"
"얼굴 보고 싶어요."
내 말에 그녀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깔깔웃는 그녀의 웃음에는 짙은 광기가 배어있었다. 그냥 말하지 말걸 그랬나.
"그래, 안될 건 없지. 어차피 곧 죽을 건데 그렇지?"
"그럼요. 얼굴 좀 본다고 닳지는 않잖아요."
"......정말 끝까지 재밌는 아이네."
질식놀이를 하도 많이 하더니 평소에 생각으로만 했던 말들을 필터 없이 바로 뱉어내게 되었다. 어쩐지 모르겠으나 그게 저 미친년한테는 잘 통한 모습이지만.
"영광으로 알렴. 내 맨 얼굴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거든."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가면에 손을 대서 가면을 벗으려고 한 찰나
"아가씨!"
"자스민!"
내 말을 더럽게도 듣질 않던 둘이 마침내 도착했다. 사실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둘의 목소리가 들리자 내 눈에서는 조금 눈물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하아, 아쉽게도 방해꾼이 와버렸네."
"그러게요. 얼굴을 못 봐서 너무 아쉽네요."
"흐르는 눈물이나 닦고 말하지 그러니. 뭐, 기회는 많으니까 말이야. 그럼 다음에 보자고 아가씨."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꼬마가 아니라 아가씨인가……. 나쁘지 않네. 나는 나에게 안겨오는 엘리사의 품 안에서 쓰러지듯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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