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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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후에 노랗던 하늘은 까맣게 물들었다. 달과 별은 태양을 대신해 하늘을 수놓았다. 도시의 건물들과 거리의 가로등은 불을 켜 암흑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테오로드의 골목길은 암흑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예산의 한계인지 도시의 가장자리에 있는 골목길에는 가로등이 띄엄띄엄 세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 근처에는 하수도를 처리하는 시설이 있기 때문인지 건물들도 잘 없는 곳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서늘한 바람 불어오는 탓인지 몸이 오슬오슬 떨려왔다. 어쩌면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엘리사와 소니아 때문일지도 몰랐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치자 둘 다 한마디도 없이 눈을 마주치기 시작했다. 소니아는 엘리사를 보자마자 얼굴을 찡그렸지만, 곧 얼굴을 피고 도발하는듯한 미소를 지었고, 엘리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독기에 찬 눈빛으로 소니아를 노려봤다.
둘의 침묵이 마치 폭풍전야 같은 둘 사이에 함부로 끼어들 수 없었다.
"오랜만이네."
먼저 말을 건넨 건 소니아였다. 소니아는 굳어있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차갑게 식은 눈은 환영의 뜻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었다. 엘리사 또한 그것을 알고 눈을 찌푸렸다.
"어째서 아가씨가 당신과 함께……."
"자스민하고는 절친한 사이가 돼버려서 말이야. 방금도 시내에서 알콩달콩하게 데이트를 하고 와서 말이야."
"뭐?"
데이트? 이게 무슨 소리야. 옆을 쳐다보자 썩쏘를 짓고 있는 소니아가 보였다. 저 뻔뻔한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반 친구와 시내 한번 놀러 가서 밥을 먹은 게 알콩달콩 데이트라고?
"진짜야. 뭣하면 직접 물어보던가."
"아가씨……."
충격받았다는 얼굴을 한 엘리사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 엘리사의 얼굴을 보자 미안한 감정이 마구 솟구쳤다.
"아니, 엘리사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밥만 먹—"
한시라도 빨리 엘리사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소니아의 팔에 의해 끌어당겨 지면서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소니아의 품속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소니아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니 소니아의 팔 힘에 살짝 벗어나는 게 고작이었다.
"정말로 밥만 먹었어?"
"당연하지……. 너가 제일 잘 알잖아."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내 기억에는 같이 술까지 먹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뭔 소리야. 술은 너만 먹었잖아. 나는 음료만 먹었고."
"그래? 그런데 너 얼굴은 왜 빨간 얼굴은 아니라는데? 올 때도 비틀대면서 걸었으면서 말이야."
"어?"
확실히 이상했다. 식당에서 음료만 먹고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술에 취한 것처럼 머리가 핑핑 돌았던 건 왜였을까.
"사실 네가 시킨 거 알코올이 들어있는 음료였어. 극소량이었지만."
아니 그런 거였어? 아니 근데 알코올이 들어있다는 느낌도 안 들었는데……. 나약한 몸뚱어리에 한숨이 나왔다.
"그럼 알려주지 그랬어. 알았으면 다른걸 먹었을 텐데."
"내가 왜."
당당한 소니아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저렇게 당당하게 나오니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사실 겨우 그 정도로 취할 줄 몰랐어. 보통 그런 음료는 몇십 잔을 마셔도 안 취한다고."
"........그런 거야?"
"그런 거야."
그냥 내가 술이 엄청나게 약한 거였나. 쪽팔림에 얼굴이 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차라리 소니아가 몰래 술을 먹인 거였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고개를 들어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엘리사는 내가 어찌 되었든 술을 먹었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공허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두려워 나는 서둘러 해명했다.
"아, 아 엘리사. 아까 들었다시피 소니아 말처럼 술을 먹은 건 아니야. 음료에 살짝 섞여 있었던 것 뿐이야. 그, 그러니까 네가 걱정할만한 일은 없었어."
존나 추한데?
가혹한 자기평가가 내려졌지만 엘리사의 눈빛이 더 무서웠기에 꾹 참고 말을 이었다.
"말하지 않고 놀러 나간 건 미안해……. 앞으로는 말하고 나갈께……."
나는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실제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쨌든. 내 진심이 담겨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죄에 엘리사도 화가 어느 정도 풀린 것인지 표정을 풀고 짧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아가씨……."
긴장이 풀린 것인지 팔을 아래로 늘어트리고 있는 엘리사를 보니 죄책감이 눈덩이처럼 끝도 없이 불어나는 게 느껴졌다. 엘리사에게 미안한 마음에 엘리사쪽으로 갈려고 걸음을 옮기는 순간 소니아에 의해 제지되었다. 이쯤 되면 슬슬 적응될 것만 같다.
"왜에……. 또."
"어딜 가려고."
그렇게 말하는 소니아의 얼굴은 너무나 진지해서 오히려 내가 당황할 정도였다. 엘리사의 얼굴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독점욕인가? 누굴? 나를? 왜? 여러 의문이 나를 휘감았지만 나는 그 어떤 질문에도 그럴듯한 답을 낼 수가 없었다.
"엘리사한테 가겠지……. 왜 그러는데……."
"나랑 단 둘이 기숙사로 가면 되지."
"엘리사는 어쩌고……."
"내버려둬 우리 뒤를 알아서 따라오겠지."
소니아의 빨개진 볼은 그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엘리사에게 그녀의 말을 이해해줄 인내심 따위는 없었다.
인내심이 다한 것인지 엘리사는 뚜벅뚜벅 엘리사쪽으로 걸어가 나를 잡고 있는 소니아의 손을 쳐내고 나를 자신쪽으로 끌어왔다.
"......엘리사?"
"아가씨. 기숙사로 가죠."
그렇게 말하는 엘리사는 자상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단호하기도 했다. 나는 자동으로 고래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 날 두고 어딜 가려고."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이 남아있었죠."
기분이 상한 소니아는 엘리사와 나를 멈춰 세웠고, 엘리사 또한 도발을 무시하지 않았다. 엘리사와 소니아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오른쪽 주먹을 바스러질 듯이 꽉 쥐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둘이 싸움이라도 날까 봐 싶어 나는 서둘러 둘 사이를 중재했다.
".........그냥 둘이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될까?"
콰앙—
물론 내 말 따위는 둘에게 별 효과도 주지 못했지만 말이다. 나는 둘 사이를 중재하는 건 포기하고 골목길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 보면 진정되겠지 뭐, 절대 내 말을 무시해서 화난 건 아니다. 절대로.
선공은 엘리사였다. 엘리사의 모습이 사라짐과 동시에 소니아에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소니아가 소환한 마법진에 막혀버렸다.
......마법진 엄청 예쁘네.
둘이 싸우는 모습은 사실 잘 보이지도 않았고 그냥 중간중간 보이는 마법진의 모습만 기억에 남았다. 마법진의 모양은 사람마다 모양을 달리했다. 처음에는 양피지에 그려진 공용 마법진을 사용하지만 마나로 마법진을 그리는 수준이 오면 자신만의 마법진의 모양이 나타난다. 각자의 모양에는 나름의 뜻이 있다는 것 같은데 소설에서 뜻을 따로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내 마법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역시 자스민이랑 같은 모습일까. 다른 모습이면 좋겠는데. 자스민의 마법진 모양은 악마 소환진 같이 끔찍했다고 묘사됐으니까. 이왕이면 멋지고 예쁜 게 나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둘의 싸움은 끝날 줄을 몰랐다. 아무래도 도심 속이라 둘 다 힘을 조절하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승부가 안 나는 느낌이랄까. 어느새 시간은 새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끝날 줄 모르는 둘의 승부를 보다가 푸념을 떨었다.
"언제끝나냐 이거……."
"그러게 말이야."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옆을 바라보니 가면을 쓴 여자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지? 갑자기 닥친 일에 머리를 굴려보지만, 그녀가 누군지는 알아낼 수는 없었다.
"왜 그렇게 놀라?"
그녀는 내 반응이 재밌는지 깔깔 웃더니 내게 얼굴을 들이밀고 질문을 건넸다.
"흐음……. 근데 너 나, 본적 없니?"
"아뇨, 없는데요."
이 질문도 몇 번이나 받아보니 슬슬 익숙해져 버렸다. 이 세상에는 자스민을 아는 사람이 많을 걸까. 내 진정성 있는 대답에 가면녀는 혼자서 뭐라 뭐라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얘 꼬마야. 언니랑 같이 갈래?"
"싫은데여."
당당한 유괴범인가. 내 단호한 거절에 그녀는 다시 혼잣말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 위험해 보이는데 저 둘한테 알려야 하나?
"아! 그래. 강제로 데려가면 되는구나!"
"뭐요?"
내 대답에 싱긋 웃은 그녀는 내 입을 잡아 끌고 가자, 어째서인지 내 의식은 그와 함께 암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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