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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15화 (15/120)

〈 15화 〉 헌팅

* * *

예로부터 마도의 길을 걸었던 자들은 마도의 길만을 고집해왔다. 인간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때부터 일종의 불문율이 되었다.

물론 효율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마법사들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마도의 길을 걷는 자는 천박하게 검을 휘두를 수 없다.`였나? 병신같다고 생각했지만 나 또한 딱히 검을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귀찮았으니까. 가뜩이나 마법을 연구하는 것도 쌓여있는데 검술까지 연마하기에는 너무나 귀찮았다.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도 마도의 길을 걷는 것 만으로도 벅찬 게 현실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전쟁의 여파로 마법의 연구는 끝나가고, 죽여야 할 것들은 넘치고, 이 모든 것들에 짜증이 나고 있었다.

그날도 두 군 간의 대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죽어가는 병사들의 수도 마찬가지였던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날 이었다.

이런 평범한 날에 가슴이 칼에 관통되어 죽어있는 병사의 칼을 뽑아 앞에 있던 적을 썰어낸 게 처음이었다.

항상 원거리에서 마나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죽여왔던 것과 달리 직접 사람이 썰려 나가는 건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연하게도 검술에도 재능이 있던 탓인지 레오나드 영감한테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그 후로 종종 칼을 써왔고 나중 가서는 마법보다 칼을 더 쓰는 날이 있기도 했다.

물론 그 기간이 길지 않았다 보니 정상급 검사의 수준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 말을 다르게

해석하자면 내 앞에 있는 영감을 이기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전에는 그래도 한 번쯤 비벼볼 수는 있었지만 젊어진 지금 영감의 수준은 한 차원 높은 곳에 있었다. 젊어지더니 살판났구만.

영감의 맹공에 점점 밀려나는 게 느껴졌다. 결국, 내 검이 부러짐과 동시에 나는 쓸려나가는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좆같네. 누군가에게 패배해 바닥에 깔린다는 건 언제나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중간에 마법이라도 섞을 걸 그랬나? 하고 생각했지만 그랬다면 이 체육관을 그대로 보존할 자신이 없었다. 회귀하고 나서 여러모로 약해진 탓에 힘 조절도 잘 되질 않았다.

바닥에 누운 채로 넋 놓고 있으니 영감이 걸어와 손을 건넸다. 언제나 헤실헤실 웃으며 다가오는 영감은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뭐라 짜증을 내고 싶었으나 패자인 신세로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쪽팔린 일이었기에 자중했다.

"미안하네. 오랜만이라 주체가 안 돼서 말이지."

"지랄, 웃으면서 웃어대는데 뭘 미안하고 자빠졌어. 적어도 웃지는 말지 그랬어."

손을 탁 치고 일어나 영감을 노려봤다. 저 능글거리는 웃음은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허허, 젊어지니까 하루하루가 이렇게 즐거운 줄 몰랐지 뭔가."

"하아……. 확인은 이쯤 하면 됐을 거 아냐. 그쪽은 몇 명이야?"

"흐음……. 아직 정확하진 않기에 엄청나게 많은 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적다고 할 정도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네."

그놈의 수수께끼는 못 하면 죽는 병이라도 있는 건가. 그래도 이 정도면 대충 짐작은 간다. 아직은 안심할 수 있겠지.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뭐 상관없다. 저 영감이 저렇게 말하는 거면 아직은 안전하다는 것이니까. 아직은

흙이 묻은 옷을 털어내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자스민이 다가왔다. 내가 쓰러졌던 게 걱정되는 것인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번생에 꽤 많이 보았지만, 아직도 자스민이 저런 눈을 하는 것이 적응되지는 않았다. 저 눈의 대상이 자신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녀에게 깔보는 눈빛과 증오의 눈빛은 많이 받아봤지만, 그녀가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쳐다볼 때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회귀하고 그녀를 처음 보고 말을 걸었을 때 그녀가 달라진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증오로 가득했던 눈빛은 사라지고 의문과 두려움이 대신했으니까. 본능은 이미 결론을 도출했지만 내 이성은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나를 모른척하는 것이 짜증이 나 압박을 가해도 그녀는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했다. 그 뒤로도 많은 대화를 나누어 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알던 자스민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알게 될 뿐이었다. 그 사실은 내게 더 큰 의문을 남기게 되었다.

회귀를 한 것도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바뀌어버리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 경우였다. 주변 사람에게 많은 조언을 구해봤지만 하나같이 잘 모르겠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처음에는 그 이유에 대한 호기심으로 접근했지만 내 행동에 대한 반응이 재미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자연스럽게 자스민을 데리고 다니게 되었다. 노엘도 자스민을 재미있어하는 것 같고.

"소니아 괜찮아?"

얼마나 멍하니 있었던 걸까. 자스민은 내가 가만히 있자 눈뿐만이 아니라 손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내가 머리를 쓰다듬자 처음에는 안절부절못하다가도 금방 내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래, 이 애한테 과거의 자스민을 투영시키는 건 어리석은 짓이겠지. 지금은 내 옆에 있는 친구 정도면 충분하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걱정할 필요 없어."

"호오, 사이가 좋아 보이는군그래."

갑자기 끼어든 노인네만 아니었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알면 알아서 빠져주지, 그랬어."

"아쉽게도 늙은이는 외로움을 많이 타서 말이야, 이런 뜨거운 사랑을 보면 끼어들어 한마디 하고 싶어지지 뭔가.

"........사랑은 무슨."

사랑이라니. 고약한 농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성에게 사랑이라니. 애초에 전쟁에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느낀 적도 없지만.

영감은 나를 보고 혀를 끌끌 차더니 자스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스민은 긴장한 것 같았지만 기특하게도 영감을 당당하게 마주 보았다.

“꼬마 아가씨 안녕하신가요.”

“ㄴ, 네. 안녕하세요……”

“우리 소니아를 잘 부탁드립니다. 솔직하지 못한 아이지만 나쁜 아이는 아니랍니다.”

“누가 네 애야.”

나는 영감의 어이없는 소리에 딴지를 걸었다. 저 영감은 나이를 먹을수록 주책이 느는 것 같았다. 영감은 내 딴지에도 허허 웃기만 하고 있었다. 저 영감을 더 상대하다가는 내 진이 빠질 것 같아 빠르게 인사를 했다.

"하여튼 우리는 간다. 몸조리……. 는 안 해도 될 것 같으니까 알아서 하고."

"허허, 명심하도록 하지. 자네도 심심할 때는 언제든 들리게."

짜증 나게 껄껄 웃는 레오나드를 뒤로하고 출구로 발을 옮겼다. 자스민도 나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스민의 상태가 이상했다. 내가 눈을 마주치려고 하면 고개를 귀신같이 떨어내 시선을 피했다. 내가 또 무슨 짓을 했나? 자스민이 내 눈을 마주치지 않자 기분이 요상해 져서 그 이유를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왜 그래? 내가 뭐 했어?"

"아, 아니. 그, 그냥. 별일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더욱 고개를 숙이는 자스민이 이상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캐물어 봤자 딱히 알려 줄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한바탕 날뛰어서 그런지 몸이 지쳤다.

"저기, 근데 노엘은 어쩌지?"

"아."

자스민의 말에 잊고 있었던 노엘이라는 잊고 있었던 사람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그런 놈도 있었지. 자스민의 말이 아니었다면 평생 잊고 있을 뻔했다. 양심을 따르자면 노엘을 찾으러 가는 게 맞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새끼가 나댄 게 하루 이틀이어야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가버린 건 우리지만 사실 기다리게 한 노엘의 잘못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잠시나마 존재했던 죄책감이 물로 씻은 듯 없어져 갔다. 잘나신 연금술사신데 뭐. 알아서 잘하시겠지.

"어쩔 수 없지. 기다리게 한 걔 잘못이라고 하자."

"???"

내 말에 자스민은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내 말에 거부 의사를 표하지는 않았다. 아마 지금 찾는다고 하더라도 노엘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여기는 거겠지. 그녀의 판단 하나하나가 재미있었다.

어느새 해는 거의 저물어 가고 있었다. 학교도 하교하는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내 뒤에서 따라오던 자스민도 내게 인사를 하고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럼 이만 가볼게……."

"잠깐만."

그런데 내 몸은 그녀의 손을 잡아버리며 그녀가 기숙하게 가는 것을 제지하고 말았다. 나조차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서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어, 어. 왜?"

"아……. 그게."

뭐라 말하지?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와 버린 말이라 그 이후의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어색하지 않을 말을 골랐다.

"같이 시내로 놀러 가자."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마치 싸구려 헌팅멘트 같았다. 브레토이나에 있는 멀대놈들도 이런 뻔한 멘트는 치질 앓았다. 이게 뭐냐 진짜. 내 입이 이렇게 증오스러울 수 없었다.

"음…. 그래!"

그러나 자스민은 시내라는 말에 뭐가 그리 신나는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녀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녀는 아직도 한 번도 시내에 나가보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신이 나는 그녀의 반응에 미소를 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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