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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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수업은 운동장에서 진행했다. 수업이 운동장에서 진행되는 만큼 복장도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체육복이래서 그냥 반소매일 줄 알았지만, 체육복은 내 생각보다 진취적이었다.
체육복은 내가 전생에 항상 입던 가볍고 통풍이 잘되는 츄리닝같은 질감이었다. 체육복 가슴팍에는 이 도시와 학원을 대표하는 세계수 문양이 박혀있었다. 이건 아카데미의 필수요소인 것 같았다.
유명 업체 같아서 더욱 마음에 쏙 들었다. 흠이라면 사이즈가 좀 커서 옷에 파묻힌 것처럼 보인다는 점? 사실 이불같이 포근해서 그리 나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 정도 흠은 넘어갈 수 있었다.
옷에서 나는 냄새도 새 옷 냄새가 아니라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서 더 이불 같았다. 나는 널찍하게 남는 팔을 얼굴에다 묻고 냄새를 맡았다. 맡을수록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게 너무나 좋았다.
"그렇게 마음에 드냐?"
"어? 어……."
내가 체육복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니까 노엘이 실실 웃으면서 물어봤다. 왜 나만 보면 실실 쪼개는 거랑. 딱히 악의는 없는 것 같지만, 저 시선을 마주 보면 간질간질해져서 큰일이었다.
근데 노엘이 여기 왜 있지? 너무 자연스럽게 탈의실로 와 옷을 갈아입어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늦게 알아차렸다. 나는 떨떠름하게 노엘에게 물었다. 물론 눈을 마주치는 건 무서웠기에 얼굴은 팔에 파묻은 채로 물어보았다.
"근데……. 노엘은 왜 여기 있는 거야? 노엘 반 수업은?"
"아~ 오늘 합동 수업이래. 그래서 너희 반이랑 우리 반이랑 같이 수업 듣는 거야."
"그래? 난 못 들었는데……."
"뭐, 나도 오늘 알았으니까. 못 듣는 것도 당연한 거지."
합동 수업이라니. 원작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가? 첫 전투 수업 때는 그냥 소니아가 먼치킨 짓을 하는 것 빼고는 별말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 지금까지 회귀한 사람만 해도 벌써 4명째인데, 원작 그대로 진행되는 게 더 이상하지. 지금까지 알아낸 게 4명인 거지 더 있을 수도 있잖아? 안 그러길 바란다만. 이 이상 회귀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나는 해탈할 것만 같았다.
체육수업은 다행히도 그늘에서 진행되었다.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교수의 간단한 인사 후 수업이 시작됐다.
"근접 전투란 간단히 말하자면 무기를 사용해 치고받는 행위를 일컫는다."
화려하고 묵직한 갑옷, 내 키를 훌쩍 넘는 크기의 대검.
"하지만 전쟁의 수단이 된다면 단순히 치고받는 걸로는 끝나지 않지."
주름진 피부와 점점 하얗게 물들어가는 흑발.
"때문에 전투는 단순히 치고받는 게 아닌 전투란 평범한 사람의 신체를 병기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내 앞에서 수업하고 있는 교수는 레오나드 월터. 테오도르 왕국의 기사다.
아카데미가 테오도르 왕국 안에 있기 때문인지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테오도르 왕국 출신이 많다. 레오나드 또한 원래는 기사단의 단장이었지만 현재는 휴가를 겸해서 교사를 하고 있다. 휴가를 겸해서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거의 은퇴한 셈이었다.
원작 소설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줘서 팬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미친년 놈들이 넘쳐나는 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한 양심으로 평가받고는 했지. 소니아와도 케미가 꽤나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레오나드는 전투에 관해서 꼼꼼하고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자칫하면 지루할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내용이 워낙 흥미진진해서 그런지 지루하지는 않았다. 마치 엘리사의 수업을 듣는 것 같달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레오나드의 수업을 듣다 보니 어느새 수업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의 수업은 상당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어서 계속 듣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면 학생의 질을 중요시하는 아카데미답게 교수들의 질도 그에 못지않게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이번 수업은 여기까지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묵례했고, 학생들도 박수로 화답했다.
박수가 끝나고 그는 고개를 들고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따로 수련하고 싶은 학생들은 저녁쯤 제3 체육관으로 오도록. 따로 가산점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는 거의 소니아를 쳐다보듯이 말했다. 소니아 또한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4명이 아니라 5명이 되겠는데……. 나는 아파져 오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끙끙대었다. 아니 이 정도면 자스민도 내가 아니라 자스민이 회귀했어야 하는게 아니었을까. 진심으로 머리가 어지러운 게 느껴졌다.
이번 점심시간에도 나는 노엘과 소니아와 밥을 먹게 되었다. 먹으면서 생각하는 거지만, 저 둘과의 거리가 예상외로 많이 좁혀진 것 같았다. 나는 딱히 의도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소니아는 처음에 심하게 대한 것에 보답 같은 느낌이었고 노엘은 그냥 호기심으로 나와 같이 다녔다.
원래 계획은 조용히 생활하면서 착한 친구들 몇몇하고 밥을 먹는것이 게 계획이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개학식 때 소니아가 나를 때린 게 원인이기는 했다. 그 이후로 나와 소니아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나마 나한테 다가오는 사람은 가끔 있기는 했지만, 소니아와 붙어 다닌 뒤로는 그런 사람도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도 어울리고 싶었지만 소니아와 계속 같이 다니게 된 뒤로는 그냥 포기해 버렸다.
뭐……. 딱히 소니아와 노엘 모두 내가 회귀를 하지 않았다는 걸 안 이후로는 해코지는 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이걸로 괜찮은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건 현실 도피가 아니겠지.
수업이 모두 끝난 저녁. 나는 정원 벤치에 앉아 노엘이 준 과자를 먹고 있었다. 노엘은 다녀올 데가 있다며 자리를 떠서 여기에는 나와 소니아만이 있었다. 둘 다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정원의 바람 소리와 내가 과자를 씹는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감자 칩 같은 모양의 과자는 먹으면 신기하게도 꿀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엄청나게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계속 입에 가져가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고나 할까. 소니아는 폼으로 회귀를 한 게 아닌지 맛있는 과자를 잘 골라 주었다.
그런 날 소니아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지? 설마 과자 먹고 싶어서 그런가?
서둘러 과자봉지를 보니 다행히도 아직 과자가 남아있었다. 이 세계의 과자는 양이 많구나. 소설 작가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나는 소니아에게 과자봉지를 밀었다.
"과자 먹고 싶은 거지? 자."
"뭐?"
내 말에 소니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먹고 싶다는 게 아닌가?
당황해서 어정쩡해진 내 팔을 소니아는 다시 내 쪽으로 돌려보내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많이 먹어라."
투박하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말투였다. 그래서였을까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소니아의 행동에 미소가 지어졌다.
소니아의 양보로 얻은 과자를 다 먹어버리고 쓰레기를 처리하자 소니아가 말했다.
"이제 가자."
"? 어디에?"
"아침에 그 영감이 저녁에 올 사람은 오라고 했잖아."
그러고 보니 레오나드가 거의 소니아를 쳐다보며 말했었지. 무슨 일일까.
"아아……. 그런 말도 했지. 어? 나도?"
"당연하지. 싫어?"
"아니, 싫지는 않은데…."
"그럼 와. 별거 없을 거야."
내가 가도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흔들어 떨쳐버렸다.
"근데 노엘은? 기다려야 하지 않아?"
"알아서 오겠지."
그렇게 말하며 소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체육관 쪽으로 갔다. 나는 소니아와 벤치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노엘이 사준 과자를 먹은 지 1분도 안 지났기 때문에 노엘을 버리고 가기에는 양심에 찔렸다.
소니아와 벤치를 계속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다가 소니아와 눈이 마주쳐버리고 말았다. 소니아는 내가 안 따라오는 것이 불만이었는지 눈매가 날카로웠다. 나는 그 눈빛에 소니아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진짜 미안해 노엘……. 나중에 과자 많이 사줄게…….
제3 체육관의 내부는 개학식 때 보았던 곳만큼 넓지는 않았다. 하지만 곳곳에 세워진 허수아비와 모래판은 수련장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였다.
체육관 내부에는 몇몇 학생들이 먼저 와 있었다. 엄청나게 적은 수이기는 했지만, 그중에 1학년은 우리를 제외하면 2, 3명 정도였다.
소니아는 익숙한 듯 학생들을 가로질러 중앙에 있던 레오나드에게 나아갔다.
"역시 올 줄 알았네."
"그만큼 눈치를 줬으면 안 오는 게 병신이지."
소니아의 무례한 대답에도 레오나드는 껄껄 웃으며 그녀를 환영했다.
"그래서 용건은?"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네. 하지만 친우를 이대로 보내기도 아까운 노릇이지. 어떤가? 오래간만에 겨뤄보지 않겠는가?"
"하,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지?"
"허허 딱히 부정하지는 않겠네."
그렇게 말하며 레오나드는 소니아에게 장검을 건넸다. 둘은 한적한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검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검과 검이 부딪히면서 나는 금속음과 발과 바닥이 맞았을 때 나오는 마찰음만이 공간을 채웠다. 주변에 훈련하던 학생들도 멈추고 둘의 대결을 보기 시작했다.
아니, 나 없어도 상관없었던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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