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운수
* * *
화려한 역사를 자랑했던 도시는 아이러니 하게도 도시를 만든 인간의 손에 무너졌다. 청청했던 호수에는 사람들의 시체가 떠 있었고, 감각적인 디자인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땅바닥에 흙 뿌려져 있는 가루가 되었다.
불타는 도시 속에 살아 숨 쉬는 존재는 몇 없었다. 그리고 몇 없는 생명체 중 하나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아가씨…."
몇 번이나 되뇌어도 대답을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대답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게 더 어울렸다.
싸늘해진 아가씨의 몸을 아무리 껴안아도 온기가 되돌아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가씨가 돌아가신 건 아니었다. 분명 숨을 쉬고 계시기는 했다. 다만 그 숨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가씨를 껴안은 채로 얼마나 지났을까, 눈앞에 한 존재가 보였다.
"여기서 뭐 하냐?"
툭툭 내뱉는 어투, 재수 없는 걸음걸이. 지금 상황에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상대가 상대이니깐 그러는 것도 있지만.
"아, `그걸` 아직도 들고 있었냐?"
"아가리 닥쳐."
`그거`라니. 어떻게 아가씨한테 그런 말을…! 고개를 들어, 내 앞에 있는 미친년을 노려봤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아가씨가 내게는 우선이었다.
"야. 나한테 왜 화내? 저 새끼 죽인 건 너잖아? 뭘 이제 와서 주인 잃은 개처럼 굴어."
"무슨 소리를…."
"아니야? 쟤를 말리지 않은 것도 너, 내 행동을 방관한 것도 너, 쟤를 버린 것도 너. 맞잖아?"
"윽!,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동안 아가씨에게 했던 행동과 말들을 되새겨본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가씨를 안아드리는 것 밖에 없었다.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저 미친년이 내게 쏘아댔던 말들보다 더 괴로웠다. 나라고 아가씨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던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내가 바란 것은 그저….
새벽 창문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두꺼운 눈꺼풀을 올리게 했다. 무례할 정도로 자정의 뒤를 따르는 새벽은 복잡한 머릿속을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은 나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다.
왼쪽에는 아가씨가 내 팔을 붙잡고 곤히 잠들어 계셨다. 편안히 계시는 모습에 안도감과 죄책감이 몰려 들어왔다.
나 같은 게 아가씨에게 곁에 있어도 되는 걸까. 아가씨를 지키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아가씨가 행복하실수록 죄책감도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차라리 전에 그대로….
아니, 아니다. 당신에게 맹세한 데로 내 목숨과도 맞바꿔서도 당신을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것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 하는 맹세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올려 이마가 보이게 만들었다. 당신을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당신이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분 좋은 포만감에 몸을 일으키니 따스한 햇볕이 날 맞이했다. 따뜻한 햇볕과 불어오는 바람은 내 기분을 더욱 좋게 만들어 주었다.
"헤헤…."
어제 뭔가 한 건을 해냈다는 성취감 때문일까, 계속 웃음이 흘러나오는걸 막을 수 없었다. 그동안 상상으로만 하던 엘리사와의 대화를 해냈다. 더불어 그동안 엘리사와 어색했던 일들도 대부분 청산했다고 할 수 있었다.
뿌드득
가볍게 기지개를 피며 가벼운 스트레칭을 했다.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스트레칭이지만 뭔가 오늘따라 끌리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근데 이마 쪽에서 이상한 느낌이 느껴졌다. 뭐지? 이마를 쓸어보는데 딱히 이상은 없어 손을 내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등교 준비를 했다. 어젯밤에 일찍 잤던 탓인지 컨디션이 좋았다.
지금 시간은 아침 6반. 등교 시간이 9시인 것을 생각한다면 조금은 이른 시간이지만 뭐 기분이 좋으니까. 그리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은 나쁠 건 없는 습관이었다.
"아가씨 좋은 아침입니다."
그때 마침 엘리사가 문을 열고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 엘리사가 가져온 그릇에는 갓 구운 토스트와 소시지, 반숙으로 된 계란후라이가 들려있었다.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조합이었다.
나는 엘리사를 마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엘리사와 간단한 아침을 먹고 등굣길에 올랐다. 아침밥을 먹으면서 나눈 엘리사와의 대화는 화기애애했다. 엘리사와의 관계는 단순히 예전으로 돌아가는것 이상으로 진전되었다. 평소 차가운 느낌이었던 엘리사는 인상이 좀 더 따뜻해진 것 같았다.
아직 회귀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못 들었지만 언젠간 얘기해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본래 기다리는 것 만큼은 누구보다 잘했다. 전생의 인생 대부분을 인내하면서 언젠가 올 행복을 기다렸었다. 결국 오지 않았지만 뭐 어떤가. 다음 생에 더 없이 오고 있는데. 뭔가 부끄러웠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자랑하고 싶었다.
등굣길은 어제보다 일찍 등교했던 탓인지 사람은 보이질 않았다. 나는 이렇게 사람이 별로 없는 풍경을 좋아했기에 만족이었다. 그런데 향긋한 꽃향기가 나는 어제와 달리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껴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등교하고 있던 와중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너 이리 와봐!"
좋지 않은 예감에 눈만 살짝 돌려서 확인해보니 소니아와 노엘이 골목길에서 손짓하며 날 부르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두 명 다 손에 담배를 쥐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렇게 보면 그냥 일진 무리 같았다. 저 둘을 어떡해 세계를 구한 영웅으로 볼 수 있었을까.
회귀했으니까 담배를 피워도 되는 걸까? 그래도 학생 아닌가?
의문을 품으면서도 내 발걸음은 점점 빨라져 갔다. 학교를 소개해준 것은 고마웠지만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소니아나 노엘이 나를 무슨 실험용 쥐새끼 보듯이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무서웠다. 이대로 잡히면 저 둘과 지독하게 얽힐 것 같다는 내 감이 울리고 있기도 했다.
"야, 내 말 안 들려? 우리 본 거 다 보였거든? 오지 않으면 알아서 해라."
시발. 진짜 시발. 오늘 아침까지 기분 좋았는데. 평소에 잘 하지도 않던 욕까지 하면서 나는 그들을 돌아봤다. 으르렁거리며 협박하는 노엘이 이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그래, 까라면 까야지. 군대에 갔을 때의 마인드를 장착하니 그나마 나은 것 같았다.
나는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같이 터벅터벅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수록 생명력이 쪽쪽 빨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 우리 보고도 못 본 척했냐? 우리가 우습냐?"
"아니…. 죄송합니다…."
"죄송한 걸 알면…. 하, 됐다."
소니아는 머리를 신경질 부리며 쓸어올렸다. 아 조졌다. 그냥 바로 갈걸. 그나마 바로 머리를 박았기에 다행이었다. 말대답했으면 뺨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맞았을 거다 분명.
오늘 아침 특히 기분이 좋았던 탓인지 나쁜 일에 안 엮이고 싶다는 바람 때문에 무시한 게 화근이었다.
"정말 죄송해요…. 다음부턴 바로 아는 척 할게요…."
"..... 뭘 또 그렇게까지 하냐. 됐다, 됐어."
바로 사과하니 소니아도 더 화내기는 민망한지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역시 주인공님 담배를 필뿐 마음은 약한 면이 있었다. 그 모습을 즐겁게 보던 노엘은 내게 말을 건넸다.
"어제부터 느낀 건데 너 우리랑 같은 17살이잖아. 불편하고 존댓말 쓰지 말고 말 편하게 하자."
갑자기? 라고는 생각했지만 따지고 보면 내가 이상한 것이긴 했다. 아카데미 학생인 이상 같은 학년끼리는 대부분 반말을 하고 다녔다.
나도 반말을 하려고 했지만, 주변 인물들과의 첫인상이 워낙 강해서인지 자연스럽게 존댓말을 쓰게 된 것이 굳어져 왔었다. 반말한다고 딱히 나쁠 것도 없겠지.
"그, 그래…. 알았어…."
반강제적으로 반말을 하게 되자 노엘은 나와 팔짱을 끼고 학교로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계속 발걸음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소니아도 잘 따라오고 있는 듯 했다.
"근데, 너희 담배 펴도 되? 냄새나지 않아?"
"담배? 지금 내 냄새 맡아봐 냄새나?"
그녀의 말에 그녀의 옷 냄새를 맡아보니 신기하게도 보통 생각하는 담배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향긋한 라벤더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담배 냄새 안 나지?"
"네, 아니 어 ."
노엘은 킬킬 웃으며 자랑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 담배는 내가 만든 거거든. 내가 개량해서 오히려 라벤더 냄새가 나게 했어. 해로운 기능도 없고."
"헤에…."
냄새가 안 나고 유해성이 없는 담배라니, 내 인생에서 상상으로만 존재했던 물건을 실제로 만나니까 신기했다.
"왜? 너도 하나 줄까?"
"아, 아냐. 괜찮아."
노엘은 품속에서 담뱃값을 꺼내 그중에 한 개비를 내게 건넸다.
노엘의 유혹에 혹하기는 했지만 새 출발인데 벌써 어른의 취미를 즐기고 싶지는 않았다.
내 거절에 노엘은 예상했다는 듯이 꺼냈던 담배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 뽐새가 너무나 익숙해 보였기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학교에 벌써 도착해 있었다.
오늘 수업은 전투학. 내가 가장 자신 없는 과목이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학교에 벌써 도착해 있었다.
오늘 수업은 전투학. 내가 가장 자신 없는 과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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