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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12화 (12/120)

〈 12화 〉 시작

* * *

엘리사에게 말을 던졌지만, 대답이 돌아오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렸다. 내가 흔들리는 엘리사의 동공을 일일이 따라가지 않았다면 아마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까.

내 말에 의미가 무엇인지는 엘리사도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나와 엘리사의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닌 소니아와 노엘 같은 사람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포함하고 있었다.

어쩌면 회귀한 사실에 관해 물어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여기까진 과도한 상상이지만 혹시나 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엘리사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무언가 사연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무슨."

내 말에 엘리사의 두 눈은 당황스러운 듯 내 눈을 피했다. 내가 눈을 맞추려고 해도 엘리사는 요리조리 피해 갔다. 그녀가 내 눈을 피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엘리사에게 짜증을 내면서 말해버렸다.

"눈 피하지 말고."

엘리사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던 걸까.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와버렸다. 하지만 내가 뱉은 말에 후회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한 느낌이었다.

내 말에 엘리사는 흠칫 놀라더니 드디어 내 눈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 눈은 얼마 가지 못하고 밑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엘리사의 시야는 내 발끝에서 올라가지 못했다. 방금 내가 한 질문이 뭐라고 그렇게 내 시선을 피하는 걸까.

나는 너의 모든 걸 이해해줄 자신이 있는데, 너는 뭐가 그리 두려운 걸까. 나는 네가 있으면 되는데 너는 내가 있는 것 외에 무언가 더 필요한 것 같았다. 얘기하고 싶다고, 눈 피하지 말라고 말하는 게 그리 어려운 거였나?

어째서인지 가슴 한쪽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엘리사가 내 말을 회피하는 것이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소중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사람이 이런 기분일까.

엘리사의 냉담한 태도에 굳어있을 때 엘리사는 나를 지나쳐 기숙사 복도로 나와 나를 등지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굳이 도망을?

이쯤 되면 분노를 넘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소니아와 노엘과 어떤 관계이길래, 회귀 전에 엘리사가 내게 무슨 짓을 했길래 이를 악물고 도망치는 걸까. 엘리사 너는 도대체 왜 나라는 존재를 믿지 못하는 걸까.

내가 그렇게 너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나. 나는 진작에 그녀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내 탓을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엘리사는 전력으로 나에게서 도망가지 않았다. 평소 걸음걸이보다 살짝 빠른 수준의 걸음일 뿐이었다. 그마저도 종종 고개를 뒤로 돌려 나와 눈이 마주치느라 속도는 더욱 느려졌다. 그녀가 전력으로 도망갔다면 나는 이미 그녀의 뒷모습도 볼 수 없었겠지.

잡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걸음을 뗐지만 내 걸음만큼 엘리사의 걸음걸이도 빨라졌다.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나는 걸을 땔 뿐이었다.

뚜벅

내가 한 걸음을 걸으면 엘리사는 두 걸음을.

뚜벅 뚜벅

내가 두 걸음을 걸으면 엘리사는 네 걸음을.

점점 멀어지는 거리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생각을 거듭했다.

어쩌지? 이대로 엘리사를 보내면 두 번 다시는 엘리사와 예전처럼 지내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지? 내 장기가 뭐지?

내가 잘하는 거? 문득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그 생각을 검토하기도 전에 그 생각은 입 밖으로 나왔다.

"엘리사! 여기서 더 도망가면 내 방으로 가서 뛰어내려 버릴 거야."

".....네?!"

내가 생각한 방법은 내 목숨을 이용한 협박이었다. 나한테 잘하는 건 없지만 자살 기도만큼은 웬만한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에게 통할만 한 방법인 이게 유일했다.

그러니 내가 엘리사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이런 방법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방법은 엘리사에게 너무 잘 통해 버리고 말았다. 엘리사 너는 아직 나를 위하는구나.

그 사실이 내게는 큰 위안이 되어 돌아왔다. 내게서 도망치려는 순간에도 내가 자살하는 걸 방관하는걸 원치는 않는 거구나.

두근대는 가슴과 눈치 없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부여잡고 엘리사를 계속해서 설득했다. 더 이러고 있다가는 눈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내 방으로 가자. 네가 나한테 숨기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얘기해보면 안 될까?"

"아가씨…. 하지만, 저는 그럴 자격이…."

그러나 엘리사는 호락호락하게 넘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채찍질하듯이 자신의 팔을 꽉 조이더니 천천히 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간신히 얻은 기회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겨우 멈추게 했는데…. 나 또한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나는 뒤에 있는 내 방으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여기부터는 도박이었다. 엘리사의 선택에 맡길 뿐이었다.

"아가씨!"

뒤에서 소리치는 엘리사의 소리가 들렸지만 가볍게 씹어버리고 내 방 창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오히려 나는 힘을 얻으며 더 빠르게 달렸다.

엘리사가 환기하고 있었는지 창문은 열려있었다. 눈을 감고 창문 아래에 있는 침대를 발판 삼아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짧은 인생동안 여러 번 몸을 던져봤지만 뛰어내릴 때마다 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인 듯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를 위해 뛰어내리는 게 아니다 엘리사를 위해

닥쳐올 충격에 대비해 눈을 꼭 감고 있었음에도 큰 충격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푹신한 침대 같은 안정감만 들 뿐이었다. 그 감각에 나는 웃음이 지어지는걸 막을 수 없었다.

왔구나. 싱긋 웃으며 눈을 뜨자 역시나 엘리사가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엘리사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한 표정이었다. 엘리사의 표정에 나는 손을 들어 엘리사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은 신선했지만 더 보고 싶지 않았다.

내 딴에는 울음을 멈추라고 한 행동이지만 엘리사는 내 행동에 울컥하더니 내 품에 얼굴을 묻고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항상 든든해 보였던 엘리사의 모습이 위축되어 보였다.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며 그녀에게 말을 전했다.

"올라가자, 엘리사."

기숙사 침대에 엘리사와 나는 마주 보고 앉았다. 우리 둘 사이에 말은 여전히 없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고 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나는 저번보다 기분은 좋았다.

"엘리사."

".......네 아가씨."

짧은 심호흡을 하고 엘리사의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엘리사는 처음에는 나와 눈을 마주치는걸 두려워했지만 저번과 달리 끝에는 나와 눈을 마주쳐 주었다.

"소니아하고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말해줄 수 있어?"

"그건…."

꿀꺽

둘 중 누군가인지 모르는 목 넘김은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아니었을까.

"죄송합니다…. 아직 알려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에엑…."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뭐어. 대충 이럴줄은 알았지만. 창문에 몸 한번 던졌다고 모든 진실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라는 걸 알았기에 엘리사에게 더욱 추궁하지는 않았다.

사실 제대로 알 때까지 내 목숨으로 협박을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엘리사에게 너무 큰 부담감을 쥐여주는것 같아서 부담감이 일었기에 그만두었다. 엘리사가 알려줄 것 같지도 않지만.

"......조금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어?"

엘리사는 `흠흠` 하며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엘리사는 아직 어색했지만 한 발짝 나아가는 것 같았다.

"아직은 전부 말씀드릴 수 없지만, 때가 된다면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짜지? 약속할 수 있어?"

"그럼요, 약속할 수 있죠."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내 손으로 약속도장을 찍었다. 뭔가 초등학생을 다루는 방법 같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으니 이걸로 된 게 아닐까 싶다. 이런 것에 좋아서 히죽거리는 나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았지만 말이다.

"소니아와 그녀의 동료들과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쩐지…. 사이가 안 좋아 보이더라."

"그녀는 용모에 비해 성격은 그리 좋지 못하니까요."

엘리사는 그렇게 소니아의 성격에 대해 한참을 툴툴거렸다. 소니아의 나쁜 일화들을 한참 동안 말하면서 그녀가 얼마나 성격이 나쁜지에 대해 들었다. 엘리사가 이렇게 누군가에 대해 험담을 쏟아붓는 게 처음이었기에 신선한 기분이었다.

그런 행동에 나는 그동안에 어색한 점이 사라진 것 같아 미소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한편으로는 또 엘리사가 나를 멀리하면 그때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엘리사의 두 손을 잡고 엘리사에게 말했다.

"하여튼, 네가 전부 말해줄 때까지는 기다려줄게. 대신 그 외에 이유로 나를 멀리하지 마. 알았지?"

간절한 내 말에 그녀는 `후후` 하고 웃더니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따뜻한 미소를 보니 지금까지 했던 걱정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네, 아가씨. 죽음이 오더라도 아가씨만큼은 지켜보겠습니다."

엘리사의 다짐을 들으며 나는 엘리사를 껴안았다. 엘리사 또한 나를 꽉 안아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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