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거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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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멈출 새도 없었다. 마치 떠나가는 지하철처럼 쏜살같이 날아갔다. 애초에 입학식 이후 첫 등교일까지 기간은 짧았기에 더욱 그렇게 느낀 걸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첫 등교일은 코앞까지 다가왔고, 나는 시간을 멈출 수 없었다.
입학식 날 소니아와의 첫 만남 이후, 나와 엘리사의 관계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첫 만남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엘리사가 나한테 거리를 두는 걸 생각하면 그때보다 더 심할지도 몰랐다.
엘리사는 입학식 이후로 겉으로는 평소처럼 행동했지만 그건 표면적인 행동이었다. 일단 나와의 대화 빈도가 현격히 줄어들었다. 평소에도 수없이 하던 잡담도 그날 이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표정 변화도 마찬가지였다. 전에도 가끔 미소를 짓긴 했지만, 요즘은 엘리사의 미소를 본지 한참이 지난 것 같았다.
엘리사는 마치 죄인처럼 굴었다. 나는 좀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신경을 쓸 정도를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엘리사는 입은 열지 못하면서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 모습이 웃겼지만, 이제는 제발 좀 대화라는 것을 하고 싶었다.
마치 주인과 메이드의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기분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엘리사에게 말도 걸어보고 했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내게 더욱 거리를 벌렸다. 그 꼴을 보고 나는 엘리사에게 다가가는 걸 그만두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이 관계가 여기서 더 망가지는 게 두려웠었다. 엘리사와 약속을 한 이후 엘리사는 나와의 거리감은 거침없이 좁혀갔다. 누군가와 이 정도의 관계를 구축해 본 적은 없었기에 나로써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사실 이 정도면 괜찮은 게 아닐까. 그날에 엘리사에게 질문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여러 후회가 밀물이 들어오듯이 들어왔지만, 그 바닷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후회라는 이름에 바닷속에 젖어가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처음으로 생긴 소중한 관계였기에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천천히 망가져 가는걸 보고만 있었다. 그러면 안 됐다. 이대로 기다리면서 망가져 가는걸 볼 바에야 뭐라고 해봐야 했다.
웃긴 점이라면 그 와중에도 내 자살 시도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점일까. 내가 창문을 열고 테오도르의 풍경에 빠져있을 때 엘리사가 창문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는걸 봤을 때는 실소가 터져 나올 정도였다.
거울을 봐 교복을 입은 모습을 점검했다. 교복은 언뜻 보면 정장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얀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마이는 튀지 않고 단정해서 맘에 쏙 들었다. 왼쪽 가슴팍에 달린 세계수 모양의 금색 브로치는 훌륭한 액세서리였다.
사실 이티니움호 중앙에는 원래 세계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 터지고 세계수가 쓰러지자 세계수를 기억하고자 지은 도시가 지금의 테오도르다. 그래서 지금까지 세계수 모양은 테오도르를 뜻하는 문양이 되었다.
이티니움호 주변에 있는 부유섬들이 세계수의 잔재라는 설도 있었지만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것들을 보면 아직 이 세계에는 아직 내가 모르는 것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나중에는 이런 것들을 알아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지금은 먼 미래였다. 내게는 먼 미래보다 내 옆에 있어야 할 메이드를 되찾는 게 더 중요했기에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작은 손가방을 가지고 등교하는 아침은 생각보다 산뜻했다. 일찍 눈을 떠서인지 다른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학교 안에서 시종을 데리고 다니는 건 권장되지 않기에 혼자서 등굣길에 올랐다. 지금은 이런 교칙이 감사할 뿐이었다.
아카데미의 정문 앞에 아름답게 핀 꽃들이 있는 화원은 향기까지 완벽했다. 아카데미의 화원에 있는 꽃들은 종자 개량을 통해 다른 꽃들보다 향기롭다고 했었나. 직접 맡아보니 실제로 다른 꽃들보다 아름답고 향기도 좋았다.
엘리사가 있었으면 뭐라 했을까?
아니다. 이런 생각은 아직 해봤자 손해지.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었다. 일단 엘리사와 얘기를 하는 게 먼저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한 달 동안은 기초교육을 듣는다. 그 후, 자기 적성에 따라 마학과, 전투학과, 교양과목들 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한 달은 중요한 기간이다. 나 또한 교양과목은 정했지만 마학과중에서 어느 곳을 갈지는 정하지 않았기에 이번 한 달이 매우 기대되었다.
처음 과목은 마법 수업이었다. 오늘 꽤 일찍 일어났기 때문인지 들어간 강의실은 한산했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없었던 탓인지 아직 강의실 안은 차가웠다. 음산한 공기는 내 정신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안 좋은 의미로 말이다.
강의실은 대학 때 다니던 강의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이 소설을 쓴 작가 꽤 좋은 대학을 나왔었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내가 앉을 자리를 찾아 어슬렁거렸다. 교실에 일찍 도착했을 때는 이런 점이 좋았다. 자리를 내가 원하는 곳에 앉을 수 있다는 점 말이다.
나는 강의실 구석에 자리를 차지했다. 사실 앞에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보통 구석 자리에 앉는 편이었다. 대학 생활에서 교수 눈에 띄어봤자 딱히 좋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중앙자리는 너무 시선이 집중될 것 같았다. 그리고 너무 졸린 날에는 몰래 잠을 청하기도 좋았다.
벌써 이런 것부터 생각하는 게 썩 좋은 일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래도 잠이 많았지만, 이 세계로 오고 나서는 더욱 잠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빈 강의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몇 분 동안 미동도 없던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사람에게 주먹을 스스럼없이 날리는 형편없는 쓰레기 주인공 소니 아님이셨다.
소니아의 등장은 의외였다. 원작에서 소니아는 첫 수업 때 5분 정도 지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 소니아는 회귀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올 거라고는 예상을 하지 못했다. 소설에서도 게으르다고 주변 인물들이 한소리씩 하는 인물인데 이렇게 일찍 나오다니.
그 탓에 소니아와 눈을 마주쳐버리고 말았다. 눈을 마주친 순간 바로 고개를 박아 자는 척을 해보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고개를 책상에 박고 있으니 그녀가 내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강의실에 퍼져나갔다.
"호오…."
어정쩡하게 엎드리고 있는 나를 본 소니아는 나지막하게 웃음을 짓더니 쉬더니 내 옆에 의자를 빼서 앉았다. 많고 많은 자리 중에서 어째서 내 옆에 앉은 걸까.
혹시 엘리사가 없으니 맘을 놓고 나를 때리려는 건 아니겠지. 그냥 해본 생각이었지만 뭔가 그럴듯해 보였다. 내 손에 땀이 차는 것 같았다.
내가 엎드린 채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그녀는 무심하게 내게 말을 걸었다.
"야, 깨어 있는 거 알고 있으니까 고개 들어봐."
"........"
"저번에 못했던 거 해?"
"......안녕하세요."
깡패나 다름없는 태도에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면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잠깐 엎드려 있었지만 두 팔이 저려오는 것 이 느껴졌다. 일어나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새벽의 서늘한 공기와 소니아의 고양이상의 얼굴은 너무나 잘 어울렸다.
물론 내 눈에는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로 보였지만. 그녀가 뿜고 있는 압은 나에게 오금이 저리게 만들 정도였다.
"너, 진짜 나 처음 보는 거였나?"
"진짜 처음 봤습니다…."
"하아…."
내 대답에 그녀는 인상을 쓰고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그녀가 언제 돌변할지 몰라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쓸어넘기면서 혼잣말로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입이 너무 빨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근데 너, 왜 이렇게 떠냐?"
“절 주먹으로 치려고 하셨잖아요.”
말할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나는 내 소신대로 말을 꺼냈다. 내 얼굴을 치려고 한 사람에게 떨지 않을 리가 없었다. 두려웠지만 당당하게 말을 꺼낸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래?”
그렇게 말하며 소니아는 내게 얼굴을 갖다 댔다. 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몸을 최대한 뒤로 당기고 눈을 감았다. 엘리사와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았지만, 그때는 설레는 두근거림이라면 지금은 두려움의 두근거림이었다.
소니아는 겁쟁이 같은 내 모습을 보고는 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녀는 무언가에 실망했는지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녀는 나, 자스민에게 무언가 원하는 게 있는 걸까. 여러 의문이 생겼지만 직접 물어볼 정도로 나는 강인한 심장을 지니지 않았다.
"날 아는 것 같지는 아는데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단 말이지…."
"네? 뭐라 하셨어요?"
"별거 아니야."
그녀의 싸늘한 반응에 나도 고개를 돌려 강의실을 쳐다봤다. 어느새 강의실 안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다른 자리로 옮기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꼼짝없이 소니아와 수업을 듣게 되었다.
시간은 첫 수업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