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자각
* * *
“안녕.”
소니아의 첫인사를 듣고 알았다. 소니아는 자스민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소니아와 자스민은 아카데미에 들어오기까지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다. 그러나 지금의 소니아는 자스민을 잘 아는 사람처럼 대했다.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았지만
전부터 생각했지만, 이 세계는 소설 그대로인 세계는 아니었다. 엘리사의 오묘한 태도와 내가 빙의하기 몇 달 전부터 이상해졌다는 자스민,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소니아까지. 위화감이 내 목까지 스멀스멀 기어 오려는 느낌이었다.
“여보세요”
입학식 때만 해도 소니아는 과묵해 보이지만 속에 걱정을 앉고 있는 나름대로 과묵한 주인공 이미지였다. 2학년부터 이상 해지지만 그전에는 딱히 이상한 면은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소니아가 먼저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어야 했다. 그래, 원래대로라면.
“.....야, 내 말 들리기는 해?”
아까도 생각했지만, 이 세계는 내가 알던 세계가 아니다. 그럼 소설 속과 이 세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인물이다. 소니아, 엘리사, 자스민 모두 원작과는 너무나도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인물들의 캐릭터 성이 달라졌다고 생각하기에는 자스민이 내가 빙의하기 몇 달 전에 갑자기 이상해졌다는 게 걸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일까.
“하, 짜증 나게 하네.”
여러 가설이 떠올랐지만, 그 가설들을 증명하기에는 물증이 부족했다. 엘리사한테 물어봐야 하나 근데 엘리사가 나한테 알려주기는 할까 아니 그래도 내가 고용주 아닌가? 그래 엘리사한테 물어보러 가──
“윽….!”
“야, 나 무시해?”
정신을 차려보니 소니아가 오른손으로 한쪽 어깨를 세게 잡고 있었다. 항의의 뜻을 담아 소니아를 노려보니 그녀가 기가 찬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며 손아귀에 힘을 더욱 주었다.
“...아…으…”
그녀의 악력은 10대 소녀 수준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소니아는 주로 마법을 썼지만 근력 운동도 취미로 하던 사람이었다.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은 내 호흡을 거칠게 만들었다. 그녀의 손은 내 어깨뼈를 부러트릴 듯이 압박해왔다.
어깨를 잡히니 제대로 된 앓는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가끔식 나오는 단말마를 제외하고는 나는 입조차 열 수 없었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입을 벙긋거리고 있자 그녀는 내 어깨에 주었던 힘을 살짝 풀어주었다.
“왜 이러세요…….”
“하, 왜 이러세요? 시발년이 미쳤나.”
그녀는 코웃음 치고 손에 힘을 더 주려는 찰나, 위화감을 느낀 것인지 어깨에서 손을 뗐다. 드디어 벗어나려나 라는 생각을 할 때, 그녀는 내 멱살을 잡았다. 그녀의 힘에 끌려오면서 그녀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오게 되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려면 고개를 꺾어야 해서 목이 아플 정도였다.
“야, 나 몰라?”
“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거짓말은 아니다. 내가 소니아를 실제로 보는 건 이게 처음이니까. 소설 삽화로도 딱 한 번 봤을 뿐이니까 죄책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난 피해자니까.
그녀는 내 말이 거짓인지 의심하는 듯이 내 눈을 쳐다봤다. 그 후 내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걸 알고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이내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멱살을 잡던 손을 놓았다.
그 행동하나로 내 목에 채워져 있던 족쇄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체육관에서 나가기 위해 걸음을 뗐다.
“아니, 마지막으로 확인만 해보자….”
그때, 그녀는 오른손을 꽉 쥐고 나를 향해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는 눈을 반응도 못 하고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눈을 꼭 감고 타격을 대비했지만 나한테 가해지는 충격은 없었다. 슬그머니 눈을 뜨자 몇 번이나 봤던 엘리사의 등이 보였다. 엘리사가 소니아가 날린 주먹을 손으로 잡아준 것이었다.
“그 정도만 하시죠.”
엘리사는 담담하게 소니아를 말렸다. 담담한 말과 달리 엘리사의손과 소니아의 주먹은 서로 힘을 겨루듯 부글거리고 있었다. 언뜻 보면 둘의 힘의 차이는 비슷해 보였지만 갈수록 안정되어가는 엘리사와 달리 소니아는 점점 더 떨려가고 있었다.
아무리 소니아가 근력 운동도 한다고는 하지만 무 투 한길만 파는 엘리사를 이길 수는 없었다. 나는 그런 엘리사의 강함에 안정감을 느꼈다. 엘리사만 있으면 어디 가서 맞을 일은 없겠구나.
둘은 야생의 맹수처럼 말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그에 따라 주변에서 우리를 더욱 주목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카데미에서 특별히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에 이 상황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나는 엘리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엘리사도 내 뜻을 알아차린 건지 소니아의 주먹을 내쳤다. 소니아도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아…. 됐다. 둘 다 내 눈앞에서 꺼져.”
“....당신은 달라진 게 없군요.”
엘리사와 소니아는 서로 아는 사이처럼 대화를 시작했다. 갑자기 시작된 둘의 대화에 나는 소외감을 느꼈다. 아니, 무슨 나 빼고 서로 다 아는 것 같아.
“너처럼 달라지는 척을 하는 게 이상한 거지. 광견이면 광견답게 굴어. 충견 흉내 내지 말고. ”
“하…….”
그 말에 엘리사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평소에도 얼굴에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지만 지금처럼 살기가 묻어나오지는 않았다. 나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에 거리감과 두려움이 느껴졌다.
내 감정과는 관계없이 엘리사를 이대로 방치하면 엘리사와 소니아 둘 중에 한 명은 죽을 것 같았다. 소니아는 오히려 흥미로운 듯 그녀한테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엘리사, 가자.”
나는 서둘러 엘리사의 허리를 껴안았다. 이대로 소동이 더 커지면 아카데미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아직 안 나간 학생들은 우리를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최대한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네, 아가씨.”
다행히도 내 말이 먹혔는지, 그녀는 살기를 거두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화를 참아내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아직 행동에서 분노가 묻어나왔다. 엘리사는 소니아 쪽은 보기도 싫은지 고개를 돌렸다.
이런 모습에 소니아는 김이 샜는지 안타까운 얼굴로 혀를 찼다. 내가 알던 소니아는 재수 없기는 해도 전투광은 아니었다. 내 추론이 맞았다면 소니아가 저러는 이유는 단순히 싸우고 싶어서가 아닌 엘리사를 도발하는 것이 목적인 것 같았다.
“야.”
“........저요?”
“그래, 너.”
걸음을 때려는 찰나 소니아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네 옆에 있는 저 새끼 조심해라. 언제 주인을 물지 모르거든.”
네가 더 위험해 보여 미친년아.
차마 이렇게 말하기에는 내 용기가 부족했다. 나는 소니아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이고, 내 옆에 소니아를 죽을 듯 노려보는 엘리사를 끌고 밖에 나갔다. 주변에서 우리를 보는 시선이 너무 따가워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서둘러 아카데미를 빠져나오고 발 닿는 대로 걷다 보니 한적한 공원에 도착했다. 벨리타 영지에 있던 정원보다 세련된 미를 뽐내고 있었다. 진짜 이 도시는 근미래 도시 같이 도시 곳곳에 세련됨이 묻어나왔다.
나는 공원 한쪽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벤치조차 하얀색으로 되어 있어서 현대적인 느낌을 주었지만 지금 내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엘리사.”
“네, 아가씨.”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 대화. 그러나 평소와 다르게 어색한 대화였다. 엘리사는 내가 벤치에 앉기 전부터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그렇기에 직설적으로 물었다. 서로 눈치를 보는 현 상황이 싫었기에.
“아까 그 사람 아는 사람이야?”
“옛날에 마주친 정도 입니다.”
“아가 그 사람은 나를 아는 듯이 말하던데……. 뭐 아는 거 있어?”
“..............”
엘리사는 내 질문 세례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조금씩 오물거리는 걸보면 나에게 아예 말을 못하는 것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엘리사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둘이 서로 잘 아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엘리사의 행동에 악의는 없었다. 엘리사가 이 대답을 하지 않는 건 나를 위한 것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 행동에 배신감이 들지 않냐고 물어보면 그렇진 않았다.
주인인 나보다 소니아와의 비밀이 더 중요한 건가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다니고 있었다. 그럴 리는 없단 걸 알면서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는 어느새 지평선 안쪽으로 숨어버리기 직전이었다. 달은 기지개를 피듯 반대쪽에서 얼굴을 비치고 있었다.
사실 엘리사가 그렇게 말하지 않는 진실이 무엇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아마 엘리사와 소니아는 회귀를 한 것 같았다. 회귀한 시점이 어디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들이 회귀를 한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회귀라니. 그런 마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넘겨버리기에는 걸리는 것이 하나가 아니었다. 입학시험 예상 문제를 대부분 맞춘 것, 치유마법을 쓰게 된 엘리사, 나와 엘리사를 알고 있는 소니아. 이 모든 것들을 이해하게 만드는 건 회귀뿐이었다.
의자에 몸을 기댔다. 많은 잡생각이 내 머리를 스쳤지만 남는 생각한 하나밖에 없었다.
자살하고 싶다….
그냥, 이 생각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