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7화 (7/120)

〈 7화 〉 만남

* * *

마차로 테오도르까지는 하루 정도가 걸렸다. 이것도 한 번도 쉬지 않고 갔을 때의 기준이었기에 실질적으로는 넉넉하게 이틀을 잡는 편이었다. 나 또한 출발 시간이 늦었기에 마차 안에서 하루를 지내야 했다.

마차에서 잠을 자는 건 처음이라 걱정했지만 앉아보니 괜한 걱정이었다는걸 알 수 있었다. 마차에 처음 타서 앉았을 때 나는 침대에 있는 것만 같았다. 의자는 내 생각보다 훨씬 푹신했다. 아마 오랜 여행을 위해 이렇게 제작한 것 같았다. 내 뒤에 달려있는 등받이는 뒤로 밀수도 있었다.

엘리사는 내 맞은편에서 눈을 감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가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잠들어 버려 수면시간이 꼬여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엘리사가 자는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어서 그녀의 자는 얼굴을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지금까지 내가 겪은 그녀는 원작과는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자스민에게 별 관심이 없고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던 그녀는 자스민을 누구보다 걱정하고 치유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세계가 정말 내가 알고 있는 소설 속 세계가 맞는 걸까. 단순히 엘리사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인물들도 변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자스민의 아버지이자 벨리타 가문의 영주인 벨리타 가필드는 어디에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엘리사의 말을 들어보면 죽은 것 같지는 않은데…… 이처럼 상황이 원작과는 이미 많이 틀어진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이 사실이 내게 두려움으로 다가왔으나 생각해 보니 내가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자스민 불행의 원인인 소설의 주인공인 소니아는 내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나와 엮일 일도 없었다.

그리고 소설에 적혀있던 이야기와 너무 똑같아도 재미없으니까. 게임을 2회차 돌릴 때면 대부분 1회차때와는 다른 길을 가는 게 국룰이듯이 말이다. 소니아와 그녀의 동료들을 실제로 몰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엄청 깊은 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주치면 인사 정도를 하는 사이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생각을 하니 뇌에서 피로하다는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가방에서 물을 꺼내 한번 마시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엘리사와 같이 잔다고 생각하니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일어났을 때 하늘은 이미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항상 집 안에서만 보던 노을은 어딘가 답답해 보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었다. 허나 지금 내가 바라보는 태양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보는 노을은 그동안 봤던 어떤 노을보다 아름다웠다.

태양으로 갈수록 점점 붉어지는 하늘과 층층이 쌓여있는 구름은 햇빛을 받아 더욱 다채로운 색깔을 뽐내고 있었다. 노을을 계속 보고 있자니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기분이 드는 것만 같았다.

나란 사람이 이렇게 감성적인 사람이었나. 스스로 몰려드는 감정의 파도에 정신을 차리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이대로 계속 보고 있으면 눈물이 흘러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돌렸다. 내 앞에는 엘리사가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 티 없는 미소에 나도 미소로 대답했다.

"안녕?"

"네, 아가씨."

그동안 몇 번이나 한 인사. 그러나 장소의 차이 때문인지 새로운 느낌이었다.

마차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니 점점 마차들이 하나둘씩 많아져 가는 게 느껴졌다. 엘리사를 쳐다보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엘리사는 어딘가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테오도르 왕국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테오도르 왕국은 데우스 대륙에서 가장 큰 호수인 이티니움호 중앙에 있는 섬에 지어져 있다. 소설 상에서도 마법 기술이 매우 발달한 나라라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엘프들의 도시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답고 깨끗했다.

네 방향으로 뻗어있는 흰색의 다리와 금색의 테두리는 푸른 호수의 빛깔과 매우 어울렸다. 섬의 둘레를 따라 흰색의 높은 성벽이 웅장함을 더해주었다. 호수 주위에는 작은 부유 섬들이 떠 있었다. 책으로만 봤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신기함에 넋 놓고 보고만 있었다.

거리의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중심가에는 가로등이 줄지어 있었고, 건물들 또한 규칙적으로 지어진걸 눈치챌 수 있었다.

마차 안에서 짧은 도시 구경을 마치고 아카데미 기숙사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기숙사 내부는 전에 침실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갈하고 단아한 느낌이었다.

기숙사는 1인실이었다. 후에 터질 사건으로 인해 2인실로 변하긴 하지만 최소한 1년은 이 방에서 혼자 지낼 수 있었다.

짐을 정리하고 방 밖에 나와 학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카데미 기숙사는 특이하게도 본관과는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 입학식에 참석하려면 미리 움직여야 했다.

아카데미 입구에는 천막을 치고 신입생 입학수속을 진행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입학하게 된 학생입니다."

"아, 네! 이름이 뭐죠?"

내 앞에 단발을 하고 있는 여학생이 대답했다. 둥그런 얼굴은 다람쥐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팔에 노란색 완장을 차고 있는걸 봐서 학생회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벨리타 자스민 입니다."

"벨리타 자스민…. 아! 여기 있네요! 이 서류를 가지고 정문으로 들어가셔서 체육관으로 가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나는 짧게 고개를 숙이고 정문으로 들어갔다.

서류에는 이력서 같이 내 이름과 나이 몇 반인지가 적혀있었다. 학과는 빈칸이었지만.

아카데미에는 수많은 과가 있지만 크게 3개로 구분한다.

마법을 가르치는 마학과.

기본적인 전투를 가르치는 전투학과.

역사학이나 생물학 같은 교양과목.

1학년 때는 각 과목을 모두 들어야 한다. 그 후 2학년부터는 자신이 듣고 싶은 수업을 선택해 듣는 방식이었다. 대학교와 유사하달까.

물론 2학년 때도 모든 과목을 수강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2학년 때부터 서로 시간표가 겹치게 되는 일이 많아지면서 대부분 마학과와 전투학과 중 하나를 선택하고, 교양과목은 하나 정도 수강하는 편이다.

나 또한 2학년 때는 마학과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역사학을 수강할 생각이다. 칼을 써보고 싶다는 로망은 있었지만, 진지하게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나약한 자스민에 몸에 칼은 오히려 독이었다. 역사학 같은 경우는 전생에서도 역사는 좋아했기에 전생을 따라 선택했다.

정문으로 들어서니 깔끔한 내부가 나를 반겼다. 입학식이라 그런지 건물 내부는 방금 청소한 듯이 반짝 빛났다.

이 왕국에 왔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 도시는 중세시대라고는 믿을수 없을 정도로 건축물들의 수준이 뛰어났다. 대한민국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형식의 구조물들은 내가 중세시대가 아니라 근미래에 있는 것 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이런 기분을 더욱 증폭시키게 만든 건 깔끔한 아카데미의 내부였다.

아카데미의 바닥은 하얀색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위쪽에는 넓은 유리천장이 햇빛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웅장한 내부에 잠시 넋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체육관을 찾으러 걸었다.

이 세계는 작가가 썼던 세계였기 때문일까, 체육관은 고등학교 때 있었던 그곳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첨단 시설을 걸어 다니는 기분이었는데, 갑자기 기분이 팍 식어 버렸다. 그나마 도시의 입구부터 통일된 하얀색 벽면 때문에 실망하는 단계까지는 가지 않았다.

체육관 내부에는 학생밖에 출입을 못 해서 엘리사는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체육관안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한 해의 아카데미 신입생은 보통 150명 정도 된다 했으니 아마 그 정도겠지.

나는 내 반 표지판이 있는 곳을 찾아 그 표지판 앞에 서 있는 사람들 뒤에 섰다. 내 주변 사람들은 서로 친분이 있는 건지 서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외딴곳에 위치하고 있는 벨리타 가문 영지때문인지 자스민에게 이런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멍하니 앞에 단상을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단상 위로 누군가가 올라왔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였다. 짧은 수염과 하얀 올백 머리는 신사 같다는 인상을 풍겼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아카데미의 교장인 티리온이라고 합니다."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어나갔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아카데미의 일원으로 여기서 함께 생활하게 될 겁니다."

연설의 내용은 딱히 새롭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집중해서 들으려 했지만, 점점 지루해지자 그냥 신경을 끊었다.

".......다시 한번 아카데미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어느새 연설이 끝나고 학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늘은 입학식 이후 일정은 없기 때문에 학생들은 해산해서 각자 갈 길을 갔다.

나도 기숙사에 가서 쉬려고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안녕?"

차가운 눈빛, 긴 적발, 여자치고 큰 신장은 그녀의 몸매를 더욱 부각시켰다.

소니아.

원작의 주인공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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