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6화 (6/120)

〈 6화 〉 첫 발

* * *

쪽팔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첫 감상이었다. 빌어먹을 창문은 활짝 열려있어 푸른 하늘이 너무나 잘 보였다. 항상 일어나면 엘리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그 사실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금 엘리사를 보면 어제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를 것 같았다. 실제로 내 왼손은 아직도 불에 덴 것 처럼 뜨거웠다. 나는 왼손을 매만지며 숨을 골랐다.

엘리사가 그렇게 대놓고 들이댈 줄 몰랐다. 워낙 표정의 변화가 없고 조용한 사람이었기에 어제도 잔잔한 대화가 오갈 줄 알았다. 몸을 써서 돌격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골든 리트리버 같은 온순한 대형견인줄 알았더니 웬 늑대 새끼인걸 알아버린 기분이었다.

어젯밤 엘리사의 눈은 말 그대로 짐승의 눈이었다. 그녀의 손이 내 몸을 쓰다듬고 그녀와 내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는 정말로 잡아먹히는 줄 알았다. 경애 같은 소리하고 있어.

나는 괜히 툴툴거리며 열린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이라면 바로 뛰어내렸겠지만, 지금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저 말뿐인 약속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보다 나는 엘리사와의 약속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지구에 비하면 여기는 조건이 훨씬 좋지 않은가. 귀족이라는 신분에 흘러넘치는 재력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의 외모도 어디 가서 꿀리는 건 아니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나를 위해주는 타인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했다.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그때 엘리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엘리사의 손에는 물컵이 들려있었다. 나를 보고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엘리사를 보고 나도 마주 보며 웃어주었다. 엘리사의 미소는 어젯밤과 달리 내가 평소에 보던 그 미소였다.

“안녕. 엘리사.”

“네. 아가씨.”

엘리사가 전해준 물컵을 들어 입에 갖다 댔다. 시원한 물은 비몽사몽 했던 정신을 확 깨게 해주었다. 물을 마시면서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이런 계획 같은 건 필요 없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 버렸다.

나는 이왕 할 거라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앞으로의 인생 계획을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 내 신분과 재력이면 원하는 건 대부분 이룰 수 있었기에 그 부분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엘리사. 나는 이제 뭘 해야 할까.”

혼자서 아무리 고민한다 해서는 답이 나오질 않았다. 엘리사에게 내 질문을 넘기니 엘리사도 섣불리 얘기하지는 못했다.

“기껏 살아본다고는 했는데 그렇다고 뭘 하고 싶은 건 아니어서…… 할 수 있는 게 뭐라도 있으면 좋겠네.”

“아가씨. 아카데미는 어떠신가요.”

“아카데미?”

아카데미. 테오도르 왕국에 세워진 교육시설이다. 주로 마법을 가르치며 엄격한 시험을 치르는 걸로 유명했다. 또한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했다. 이터니움 호수 중앙에 있는 도시의 특성 덕분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티니움호수 주변에 떠다니는 부유 섬들은 아직도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저 아이리스가 처음 마법을 사용할 때 이 호수에 무언가 변화가 생겼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만 할 뿐이었다.

테오도르는 원래 도시에서 출발했기에 수도의 이름과 나라의 이름이 같았다. 아이리스가 마법을 발명한 그 도시 말이다. 그만큼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 아카데미는 학생들의 출신은 차별하지 않았지만, 능력만큼은 그 누구보다 차별하는 곳이었다.

원래는 능력에 상관없이 받았다고 하지만 점점 신입생들이 많아짐에 따라 시험이 생기면서 능력주의가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런 만큼 교육의 질은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엘리사. 내가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까?”

“네. 아가씨는 반드시 합격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엘리사는 답지 않게 확신이 담긴 얼굴로 말했다. 엘리사가 저렇게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경우는 없었기에 그 이유에 관심이 갔다. 엘리사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확신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제가 그렇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섬찟 무서워 보였다. 엘리사의 수업은 이미 한번 받아보았기에 그녀의 수업이 재미있고 질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그와 동시에 그녀가 내 사정을 봐주었기에 중간에 끊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엘리사의 모습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마 엘리사라면 나를 아카데미에 합격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할 것이다. 다만 내가 죽도록 힘들것은 명확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다짐했는걸.

“..................그래. 엘리사. 잘 부탁할게.”

남자, 아니, 사람이 한입으로 두말하는 것도 쪽팔린 일이었기에 나는 내 운명을 받아들였다. 재수까지 해 봤는데 이거 하나를 못 버티겠는가.

엘리사의 수업은 혹독했다. 기숙학원에 있는 것처럼 일어나서 아침 먹고 공부, 점심 먹고 공부, 저녁 먹고 공부라는 지옥의 스케줄을 몇 주 동안 계속해서 진행했다. 처음에는 버티지 못하고 창문으로 뛰어내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내면서 공부를 이어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엘리사는 평소에도 나를 아카데미에 입학시키려고 칼을 갈아놨었는지 예상 문제를 바로바로 뽑아 주었다. 아카데미의 시험문제는 연도마다 많이 바뀐다는데도 엘리사는 굴하지 않고 여러 유형의 문제들을 쉽게 설명해 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남들보다 짧은 시간임에도 시험에 자신감을 가질 만큼 많은 준비를 했다.

아카데미의 시험을 치르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졌다. 아카데미에 가서 시험을 치는 방식과 교수가 오는 방식이었다. 전자는 말 그대로 집적 테오도로 가서 시험을 치는 것이다. 미리 신청하지 않더라도 테오도르에게 가기만 하면 누구나 칠 수 있기에 대부분 사람이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후자는 교수가 시험지를 들고 찾아오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미리 아카데미에 신청을 해야 하고 상당한 돈이 들이었기에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내는 방식이었다. 나는 테오도르에 가서 시험을 치려고 했으나 엘리사의 반대로 이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저택에 찾아온 교수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시험지를 주고 손 시계를 들어 올렸다.

“제한 시간은 3시간입니다……. 그럼 시작하십시오.”

시험의 공정을 위해 나와 교수를 제외한 하인들은 모두 밖에서 대기하게 된다. 마법에 정통한 마법사들이라 웬만한 부정행위는 바로 막히게 된다. 어찌 보면 테오도르에서 시험을 치는 것 보다 압박감이 심하다고 할 수 있었다. 시험 감독과 1대1로 시험을 보는 거니 말이다.

나는 수능을 치는 것처럼 매우 긴장했다. 손과 팔은 덜덜 떨리고 동공은 한밤중에 커피를 마신 것처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내 뒤에서 느껴지는 시험 감독의 시선은 내 어깨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걱정과 다르게 시험은 생각보다 쉬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엘리사가 뽑아 준 예상 문제들이 대부분 맞아들어갔다. 엘리사덕분에 나는 별 힘도 들이지 않고 시험을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결과는 이번 주 내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대충 훑어봐도 합격하신 것 같긴 하시지만 말이죠.”

시험 감독은 곧바로 내가 푼 시험지를 가져갔다. 그의 반응에 나를 몸이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의자에 몸을 맡기고 뻗어있으니 엘리사가 들어왔다. 그녀는 어지간히 내 시험 결과가 궁금했는지 바로 물어보았다.

“아가씨. 시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시험 감독감님 말씀을 들어보니까 사실상 합격인 것 같아.”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한 건 내가 아니라 너지. 네가 알려준 예상 문제들이 대부분 들어맞았거든.”

“..........”

엘리사는 말없이 내 뒤로 와서 내 머리를 쓰다 듬기 시작했다. 그 손길은 너무나 자상했기에 나는 말없이 받아드렸다. 엘리사는 조용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설령 제가 모든 문제를 알려드린다고 하더라도 아가씨의 노력이 없으셨으면 절대 합격하지 못하였을 겁니다. 저는 아가씨께서 자신의 업적에 자신 있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마워. 엘리사.”

시험 감독이었던 교수님의 말씀대로 나는 아카데미에 합격하게 되었다. 이미 교수님의 말씀으로 반쯤 확신했지만, 막상 공식적으로 확인을 받는 것은 또 다른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엘리사는 그 결과를 당연하다고 말은 했지만, 그날 저녁에 차려진 화려한 식사를 보니 그녀도 나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걸 알 수 있었다.

그 뒤에는 아카데미에서 입학 안내서가 도착했다. 많은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대부분이 미사여구였고 중요한 내용은 곧 입학식이니 입학식 전에 아카데미 기숙사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입학식 이틀 전쯤에 출발하려고 했지만 엘리사의 강력한 주장으로 편지를 받은 바로 그 날 마차를 타고 출발하게 되었다.

마차는 이 저택에서 가장 고급스러워 보이는 마차를 탔다. 이 마차는 마법이 새겨서 있어 외부의 충격에 강할 뿐만이 아니라 내부에서 느끼는 흔들림 또한 거의 완벽하게 잡아준다고 한다. 마법적인 처리를 제외하고도 아름다운 외견은 왕족의 마차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와 엘리사를 태운 마차는 내가 입학 안내서를 받은 저녁에 출발하게 되었다. 초반에는 주변의 광경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자 내 눈도 함께 감기게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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