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4화 (4/120)

〈 4화 〉 새싹

* * *

이 세계에는 전에도 말했듯 마법이 존재했다. 흔히들 생각하는 마법이 아닌 좀 더 귀찮은 마법이긴 했다. 인간은 마나를 느낄 수 있었지만 마나를 변환시킬 수는 없었다. 이런 인간의 특성 덕분에 이 대륙의 인류는 오랫동안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다.

이 대륙에 마법을 쓸 수 있는 존재들은 엘프와 드워프 같은 종들뿐이었다. 드래곤도 쓸 수 있다고는 하지만 소설에서도 언급만 되지 실제로 이 대륙에 존재하는지는 미지수였다. 존재가 확실하지 않은 드래곤을 빼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종족은 손에 꼽았다.

“......의외로 잘 알고 계시네요.”

“이 정도는 내가 읽던 책에도 적혀있다고….”

어린아이를 바라보는듯한 뜨뜻미지근한 시선에 고개가 저절로 내려갔다. 자스민이 아카데미에 합격할 정도로 공부를 잘 하지 않았나? 왜 이 정도도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걸까.

“엘리사. 아무리 그래도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글쎄요.”

엘리사는 의미심장하게 대답을 뒤로 넘겼다. 더 반문하고 싶었지만 엘리사는 어느새 책을 펼쳐 내게 보여주었다.

“아가씨께서 말씀드린 대로 인간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천 년 전 아이리스라는 마법사가 등장하기 전까지요.”

아이리스. 소설에서도 언급되던 최초의 인간 마법사였다. 그녀는 엘프와 드래곤, 드워프와 데우스 대륙 곳곳을 여행했다고 전해진다. 종국에는 이티니움호에서 인간도 마법을 쓸 수 있게 만든 마법진을 발명했다고 한다.

소설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떡밥처럼 여겨졌기에 많은 독자가 언젠가 아이리스가 이 소설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설의 제목이 설립자, 창립자라는 뜻을 가진 ‘FOUNDER’ 였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는 추측이었다.

일부 독자들은 아예 아이리스의 이야기가 과거 편으로 나올 거라고 믿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거기까지는 뇌절이라 생각했기에 동의하진 않았지만 그런 추측까지 나올 정도로 아이리스라는 인물에 관한 관심이 높다는 증거로써는 흥미로웠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마나를 변환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마법진이라는 거름망을 이용해 마나를 변환시켜 마법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엘프나 드래곤같은 이들이 아이리스를 왜 도와줬을까. 엘프는 인간을 하등생물로 본다며?”

“속설에는 그들이 아이리스를 사랑했기에 그 여정에 동참했다고 합니다만…. 그리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래 동기가 사랑이라니. 옛날이야기지만 허무맹랑하네.”

다른 종족을 깔본다는 엘프가 인간을 사랑하다니. 심지어 인간이 마법을 쓰지 못했을 때는 가축과 다르지 않다는 시선으로 봤다고 하는데…… 도저히 진실 같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 있는 낭만은 진실이기를 희망했다.

그 뒤에도 나는 꽤나 긴 시간 동안 엘리사에게 마법의 역사에 대한 일대기를 수업받았다. 엘리사는 내가 흥미 있어 할 부분을 잘 짚어 내가 수업에 질리지 않도록 해 주었다. 과외 선생님같이 말을 많이 하는 엘리사의 모습은 처음이어서 그런지 신선했고 신기했다.

도서관 창문에 붉은빛이 들어올 때가 돼서야 엘리사의 수업은 끝이 났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었던 수업이었지만 이정도로 긴 시간 동안 듣게 되니 갈수록 집중하게 되었다. 그녀를 알게 된 이후로 가장 많은 대화를 한 것 같아 마음 한편에는 포만감이 차올랐다.

“엘리사…… 배고파…….”

물론 정신적인 포만감 말이다. 과일과 간식을 먹었다고 해도 식사하지 않으니 배가 고픈 건 어쩔 수 없었다. 불쌍한 눈으로 엘리사를 쳐다보니 엘리사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하녀들에게 저녁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판타지 세계의 식사라고 해서 해서 평소 내가 먹던 음식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빵과 달걀을 보면 내가 살았던 원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개연성은 없었지만, 이 소설을 쓴 사람이 대학을 다니던 한국인지였다는걸 고려하면 이 정도면 선방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빵을 입에 물었다. 갓 구운 빵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빵보다는 밥을 좋아했지만, 식사를 가볍게 하고 싶을 때는 밥보다 좋은 선택지가 되어주었기에 만족하며 먹었다.

“엘리사. 그거면 돼?”

내 맞은편에 앉아있는 엘리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엘리사는 작은 빵 하나를 반으로 잘라 먹은 이후로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내가 먹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엘리사는 많이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빵 한 조각을 다 못 먹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네. 이거면 충분합니다.”

엘리사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이 먹던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내가 먹고 있던 빵에 다시 집중했다. 가끔 적게 먹고 싶을 때도 있는 거겠지.

빵을 입가에 가져가 씹으려고 했지만, 머리카락이 걸려 그러지 못했다. 책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머리를 묶고 있었지만, 수업을 들으면서 머리가 땅기는 느낌이 거슬려 풀었던 탓이었다.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빵에 머리카락이 계속해서 걸리기 시작하자 열이 뻗치기 시작했다.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아……. 고마워.”

엘리사는 내 불만을 바로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엘리사의 이런 세심한 배려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거라 어색했지만 마음이 따뜻해졌다.

엘리사의 손길로 정리되는 머리카락을 느끼며 빵을 입에 물었다. 빵을 입에 물었지만, 빵의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여자가 되었다는 현실감이 빵의 감칠맛을 대신해서 입에 머물고 있었다.

지금껏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나는 여자가 되었다. 가랑이 사이에 있던 물건을 증거로 2년간 노예 생활까지 했었던 기억이 거짓이라 생각될 정도로 내 기억과 현재 내 몸의 위화감은 점점 쌓여갔다.

그동안은 내가 여자가 된 것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살할 건데 몸이 바뀌건 어쨌건 무슨 상관인가. 몸을 씻을 때도 볼일을 볼 때도 심지어 처음 생리를 할 때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세계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개를 돌려 무시했던 것들이 내 몸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적어도 일주일 내에는 성공하겠지 싶었던 자살이 엘리사라는 장벽에 막혀버렸고, 그러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며 죽음을 기다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침대에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읽은 책과 엘리사의 수업은 허리까지 오던 현실감을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나라는 천이 이 세계라는 바다에 점점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익사할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익사라…… 변기 물에 머리를 박아볼까. 씻을 때는 엘리사가 따라오지만 간단한 볼일까지 따라오지는 않으니까. 이런 어이없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나란 놈은 이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나는 물밀듯 들어오는 현실감이 싫었다. 눈을 감고 편해지고 싶은 나에게 현실감이라는 놈은 눈을 뜨고 상황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흉부에 달린 덩어리를, 한 달마다 싸대는 피를 보라고 말이다.

빌어먹을 놈.

“아가씨 괜찮으신가요?”

눈을 뜨니 엘리사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았던 것 같았지만, 말끔히 정리된 머리카락을 보니 내 생각이 틀렸다는걸 알 수 있었다.

“아아…. 뭐, 그런 편이지.”

내가 먹던 빵을 내려다봤다. 좀 전까지만 해도 활발하던 식욕이 어느새 죽어버렸다. 빵을 입에 대기도 싫어지자 나는 그릇을 밀고 일어났다.

“엘리사. 입맛이 없어서 그런데 치워줄래?”

“네…. 아가씨.”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이불을 덮고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불을 머리까지 덮은 채로 누워버리고 싶었지만, 배가 더부룩해질 걸 알기에 등받이에 기대는 거로 만족했다.

원래는 식사 후 도서관에서 가져온 책을 읽으려고 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하던 대로 굳게 닫힌 창문을 바라보며 시간을 죽이고 싶었다. 눈을 감으면 이 악몽이 끝나지 않을까. 몇 번이나 되뇌인 생각이지만 오늘은 간절하게 외쳤다.

엘리사는 평소처럼 조용히 의자를 끌고 와 침대 옆에 놓고 앉았다. 침대에 기대있는 나와 내 옆에 앉아있는 엘리사.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평정심을 잃어버린 게 원인이었을까.

“아가씨.”

엘리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게 들어왔다. 그녀는 전쟁의 나서는 군인처럼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웃겨 미소가 지어졌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한번 해봐.”

엘리사의 질문은 대충 예상이 갔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했기에 대답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 뒤에 내가 물어볼 또 다른 질문이었다.

“아가씨께서는 어째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예상된 질문. 그러나 엘리사의 말에 들어있던 자스민을 향한 탄식과 원망은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살고 싶지 않아서. 이 정도는 알고 있지 않았어?”

“그게…… 당신의 대답인가요….”

“엘리사. 나야말로 물어볼게.”

나는 심호흡을 하고 엘리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내가 자살하려는 것을 막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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