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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3화 (3/120)

〈 3화 〉 의문

* * *

짙은 갈색의 고급스러운 원목으로 되어있는 책장은 웬만한 건물의 1층 높이만큼 높았다. 책상과 의자 또한 책장의 나무와 비슷한 색감의 나무를 써서 그런지 통일감이 느껴졌다. 이렇게 보니 이 저택이 귀족의 저택이라는 게 피부로 와닿았다.

내가 선택한 장소는 도서관이었다. 아무리 봄이 다가오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은 바람이 차가운 감이 있었다. 그리고 밖에 나가자고 하면 엘리사가 옷을 계속 껴입으라 해서 힘들단 말이지.

될 수 있으면 저택 내부에서 갈만한 곳을 생각하다가 도서관이 떠올랐다. 이 세계에 와서 한 번도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평소 책을 좋아했기에 도서관이라는 장소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다른 후보들은 자연스럽게 지워졌다.

성벽처럼 늘어선 책들은 딱 봐도 분류가 잘 되어있었다. 책장 위에 먼지가 없는 것만 봐도 관리가 잘 되어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마법을 쓸 수 있는 판타지 세계이기에 마법과 관련된 책을 읽으려 했지만, 지금이 생각이 변했다.

나는 역사와 종교 책들이 즐비해 있는 책장 앞에 서서 하나의 책을 뽑았다. 뽑은 책은 ‘헤롯기’라는 이상한 제목의 책이었다. 제목만 보면 누군가의 일대기 같았지만, 책을 펼쳐보니 평범한 역사책이었다.

책을 들고 햇빛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았다. 도서관에는 나와 엘리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아득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햇빛을 등진 채로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내 옆에 있는 엘리사 때문에 잘 집중이 되지는 않았지만.

이런 나를 엘리사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보았다. 아마 원작의 자스민은 책과는 영 인연이 없던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엘리사는 내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은 내가 책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점점 뚜렷 해져갔다. 그녀의 시선에는 꽤 익숙해져 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부담스러운 눈길까지는 아직이었나 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엘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엘리사…… 너도 책을 읽지 않을래?”

“............네?”

엘리사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책에 열중하고 있어 눈치를 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그렇게 대놓고 쳐다보는데 못 알아챌 거라고 생각하는데 더 신기한데 말이지.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할 일도 없을 텐데 같이 책이나 읽자.”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근처에 있는 책장에 다가가 로맨스 소설 하나를 뽑았다. 귀족의 도서관이라 그런지 편히 볼만한 책이 로맨스 소설을 제외하면 많아 보이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 받아.”

“......감사합니다. 아가씨.”

다행히 엘리사는 책에 불만은 없었는지 책을 받아 가고 나서 곧바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을 살짝 구경한 후 나 또한 다시 자리에 앉아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소설에서 나왔던 설정이지만 이 책에서는 이 세계에 대해 더욱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이곳 데우스 대륙은 현재 2개의 큰 왕국과 나머지 소규모 왕국들로 이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현재 위치한 곳은 북부에 있는 브레토니아 라는 이름의 제국이었다. 데우스 대륙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제국 대부분이 냉대기후였다. 일부 심한 북쪽 지역은 한대기후라고 분리될 정도로 차가운 기온을 자랑한다고 한다.

이 책에는 나라들의 설명과 함께 간단한 삽화도 존재했다. 브레토니아 제국의 수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거칠고 투박했지만, 거기에서 오는 야성적인 매력이 존재하는 도시였다. 소설 속에서 삽화가 나온 적은 없었기 때문인지 처음 보는 제국의 모습에 계속해서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브레토니아의 반대쪽에는 엘리시아 제국이 존재했다. 사실 지금은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과거에는 하나의 연합왕국이었다고 한다. 브레토니아의 진격을 막기 위해 연합왕국에서 제국으로 변화를 겪었다고 한다.

건축양식은 온화한 기후와 많은 자연 자원 때문인지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었다. 주로 무채색이었던 브레토니아와 달리 엘리시아 제국의 건물들은 여러 색깔을 조화롭게 사용해 활기참을 더해주었다.

두 국가는 문화와 사회 전반에 걸친 분위기 또한 반대였기에 사이는 좋지 않았다. 실제로 이미 한번 전쟁을 치렀을 만큼 두 국가 간의 사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았다.

이런 폭탄이 지금까지 터지지 않은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소설의 1부 배경이 되는 테오도르 왕국이다.

테오도르 왕국은 데우스 대륙의 중립국 중 하나이며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마법을 중요시하는 분위기에서 과학을 연구하는 게 특이한 곳이기도 했다.

또한 테오도르안에 있는 아카데미는 수많은 분야에서 인재들을 길러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꽤 어려운 시험을 쳐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학생들의 질에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황족이나 귀족의 자제라 하더라도 시험을 치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었다.

“아가씨.”

집중해서 책을 읽고 있는 와중에 소리가 들려 옆을 바라보니 엘리사가 내 어깨를 건드리고 있었다. 책상을 바라보니 그새 내가 줬던 로맨스 소설은 다 읽은 모양이었다.

“왜?”

내 물음에 그녀는 간식거리가 담겨있는 그릇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손에 묻지 않는 먹거리들이라 책을 읽으면서도 집어먹을 수 있게 한 엘리사의 배려가 돋보였다.

잠시 읽던 페이지에 책갈피를 끼우고 책을 덮었다. 고개를 돌려 엘리사와 마주 보며 과자를 집었다.

입안에서 조각조각 부서진 과자는 내게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과일을 먹을 때 와는 다른 단맛과 과일에서는 맛볼 수 없는 식감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언제 갔다 온 거야?”

“아가씨께서 책을 읽고 계실 때 다녀왔습니다.”

“갔다 오는 사이에 내가 자살하면 어떡하려고.”

나는 떠오른 의문을 바로 내뱉었다. 내 자살을 막으려고 혈안이 돼 있던 엘리사가 나를 혼자 두고 과자를 가지러 간다고?

내 의문에 엘리사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서관에서 나갈 때 바깥에서 문을 잠가두었거든요.”

“도서관 안에서 자살하면?”

“아가씨가 오시기 전에 이미 위험한 것들은 모두 제거했습니다.”

그런 걸 웃으면서 말하지 마……

자랑스럽다는 듯 미소를 띠며 말하는 엘리사의 모습은 어이없었지만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평소에는 표정 변화도 별로 없는 사람인데 이럴 때는 그 나이대 같아서 좋아 보였다.

“아쉽네.”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과자를 입에 갖다 댔다. 아까 도서관을 둘러봤을 때 여기서 자살을 시도하는 건 접어두었다. 애초에 도서관에 온 목적은 독서가 일 순위였기 때문에 별로 상관이 없기도 했다.

“아가씨. 많은 책 중에서 역사책을 보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엘리사의 물음에 난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내가 자스민몸에 빙의됐는데 이 세계에 아는 게 없어 역사책을 읽었어’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냥, 관심이 생겨서.”

그렇기에 이게 최선이었다. 여러 가지 말 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전부 같잖은 변명들이었다. 그런 것들을 내뱉기보단 그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사실 그냥이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어차피 죽을 건데 이 대륙의 나라 같은 걸 알아서 뭐 하겠는가.

그냥.

그냥 이 세계가 궁금해졌으니까. 수많은 책들 속에서 어쩌다 역사책이 눈에 꽂힌 것 뿐이었다. 그러니 내 말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진실이라 하기엔 애매했지만.

“그러신가요….”

엘리사는 내 눈을 지긋이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를 가나 했더니 책장에서 책을 한 권 더 가져온 것 뿐이었다.

그녀가 가져온 책의 제목은 ‘마법의 설립자들’이라는 제목의 역사책이었다. 아까까지 로맨스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나 따라 공부를 하겠다는 건가?

“너도 역사책을 읽게?”

“아뇨.”

엘리사는 의자까지 돌려 나를 마주 보며 앉았다. 엘리사는 갖고 온 책을 자기 무릎에 올려두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아가씨에게 마법의 역사에 관해 알려드리려 합니다.”

“......갑자기?”

엘리사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저 변하지 않는 얼굴 뒤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가씨께서 이 대륙의 역사에 관해 관심이 많으신 것 같으셔서, 부족하지만 제가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

“싫으신가요?”

싫진 않았다.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안 그래도 나중에 마법에 관련된 책을 읽을까 하고 생각하던 차에 이런 제안은 거부하는 게 이상한 제안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엘리사의 의도일까. 엘리사가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대충 짐작은 가지만 글쎄, 겨우 이걸로 해결될 문제 같진 않지만. 한번 어울려주는 것도 괜찮겠지.

“싫을 리가. 오히려 내 쪽에서 고마워해야지.”

“감사합니다. 아가씨.”

“네 목적이 무엇인지는 대충 알 것 같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

나는 그렇게 말하며 책을 펼치는 엘리사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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