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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2화 (2/120)

〈 2화 〉 도피의 끝

* * *

다시는 뜨이질 않길 바랐던 눈꺼풀은 깃털처럼 가볍게 들어 올려졌다. 악몽이기를 빌었다. 아쉽게도 악몽이라기에는 떨어질 때의 고통이 너무나 생생했지만 말이다.

몸을 일으키고 담아두었던 한숨을 뱉었다. 분명 죽을만한 높이에서 떨어졌지만 내 몸은 그런 것치곤 대단한 상처는커녕 후유증도 남지 않았다.

눈을 뜰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지만, 막상 눈을 떠 몸을 일으키니 탈력감이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몸을 가누는 것조차 느려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또 뛰어내릴 것을 우려한 걸까 창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단순히 닫혀있는 게 아니라 잠금장치까지 몇 가지나 해놓아서 보기만 해도 막막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저 감금 장치들을 보면 내 자살소동이 이 저택에서 큰 충격이었다는걸 실감할 수 있었다.

내 옆에 있던 메이드의 표정 또한 차갑게 굳어있었다. 나에 대한 원망이 작게 섞여 있는 시선은 괜히 내 가슴을 찔리게 했다. 주된 감정은 원망이 아닌 안도감이었지만.

나는 굳어있는 표정과 달리 속에 여러 감정이 요동치고 있는 그녀에 관심이 생겨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메이드는 허벅지에 올리고 있던 손을 꽉 쥐었다. 분노…. 아니 슬픔인가? 이 여자의 표정은 꽤 읽기 힘들었다. 그러나 내 인사가 그녀에게는 큰 물결이 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 여자는 내가 떨어졌을 때의 참상을 그대로 목격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아까 원망의 시선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그녀는 꽤 시간이 지난 후에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혹시 이 창문을 열어줄 수 있나요?”

“........어째서 말입니까.”

그녀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내게 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초연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뛰어내리려고요.”

“아가씨…….”

흔들리는 애써 동공을 억제하며 나를 타이르듯이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애처로워 보였다. 이 몸의 주인은 그녀와 어떤 관계이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몰려드는 흥미로움과 의문, 그리고 자그마한 질투심을 가지고 그녀 쪽으로 몸을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은 메이드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현실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밝은색의 금발은 그녀를 황족이라고 해도 믿게 할 정도로 화사했다.

이 몸의 얼굴도 어디 가서 꿀리진 않는다고는 생각하지만, 저 얼굴에 비하면 태양 앞에 반딧불일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금이 가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 아니, 뭐라고 불러야 하지………. 됐나.”

“나에 대해 알려주지 않을래?”

이 세계에 온 지 꽤 긴 시간이 지나갔다. 앙상했던 가지에는 푸른 살이 붙었고 차가웠던 바람은 점점 온기가 더해져 가고 있었다. 두꺼웠던 이불은 안에서 이불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얇아졌다.

이 세계는 내가 읽었었던 수많은 책 중 하나인 `FOUNDER`라는 제목의 소설 속이었다. 작가가 1부를 끝내가던 중 연중했던 웹소설이라 나름대로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한창 인기가 절정이었을 때 말없이 연재가 중단되어서 댓글 창이 난리가 났었지. 나중에 가서는 5700자짜리 항의 댓글로 댓글 창이 가득 찼었던 게 기억에 남았었다.

그 소설 속에 나는 벨리타 자스민이라는 악역 영애의 몸 안에 들어와 있었다.

벨리타 자스민. 소설 초반부에 나오는 악역 중 하나였다. 악역 영애라는 타이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성격이 나쁜 귀족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설 초반부터 소설의 주인공에게 계속해서 시비를 걸던 자스민은 1학년 말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인생이 180도 뒤바뀌게 된다. 자스민을 따르던 추종자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자스민은 주인공의 노예가 되어 이 소설의 개그 포인트가 되어버린다.

이렇듯 처음에는 단순한 개그 포인트였다. 그러나 1부가 끝나갈 무렵부터 자스민이 그녀가 저지른 악행에 비해 너무 많은 불행을 겪고 있다는 동정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스민은 사실 불쌍한 아이일 뿐이고 주인공이라는 미친놈에게 걸린 것 뿐이라는 것이다.

완전 틀린 말도 아니었던 것이 주인공의 캐릭터성 또한 많은 변화를 거쳐 소설 마지막 즈음에는 미친년이라고 해도 딱히 이견이 없을 정도였다.

반쯤은 장난인 주장이었지만 나 또한 자스민에게 동정의 감정을 품었던 사람 중 하나였기에 지금 내가 자스민의 몸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이 세계가 소설 속 세계라는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내 목표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이 세계가 소설 속 세계든 뭐든 나는 어서 이 삶을 끝내고 싶었다. 그렇기에 나는 자살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동안 참 큰 노력을 했었다.

아사, 독사, 압사, 추락사, 질식사, 액사, 사사, 폭사 등등…….

정말 수많은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해 보았지만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렸다. 처음 떨어지고 나서 몸에 상처가 없길래 운이 좋은 줄 알았지만, 몸에 상처가 없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저기서 내가 먹을 과일을 깎고 있는 백금발의 메이드 엘리사 때문이었다.

자스민의 메이드인 엘리사는 처음에는 소설에서 비중이 없었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그녀의 정체에 관해 떡밥이 던져지던 인물이었다.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작가의 연중으로 영영 알 수 없게 돼버렸기에 그녀를 처음 볼 때의 의문은 아직도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분명 소설에서는 마법에 재능이 없는 몸이라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치유마법을 다룰 줄 알았다. 내 몸에 상처가 남지 않았던 것도 모두 그녀의 치유마법 덕분이었다.

게다가 원래부터 묘사되었던 그녀의 신체적 재능이 합쳐지니 내 자살 시도 같은 건 너무나 허무하게 막혔다.

이 방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창문을 모두 닫아 버려 내가 떨어지려는 걸 막고, 조금이라도 날카롭거나 뾰족한 위험한 물건들을 모두 치워버렸다. 주방에 들렸을 때는 내가 주방 기구에 손을 대는 것도 막을 정도였다.

계절이 바뀔 동안 계속 시도한 자살은 여러 결과를 낳았다. 나 자신은 무력감에 무기력증에 걸렸고, 엘리사는 내가 행동을 할 때마다 극도로 예민해져 버린 결과를 낳았다.

내 유일한 목표이자 소원은 자살이지만 그 목적이 막혀버리니 내 몸에는 무기력함이 가득 차게 되었다. 무기력에 찌든 내 몸은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어지게 만들었다. 시간 대부분을 눈을 뜰 때마다 보이는 천장과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을 정도였다.

이대로 가만히 죽음이 오길 기다려야 하는 걸까. 내게 얼마 있지 않은 즐거움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과 간간이 하는 엘리사와의 대화였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존댓말을 했지만 엘리사가 너무나 불편해하는 게 눈에 보여 말을 편하게 하기로 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엘리사의 예민함은 나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독했다. 단순히 주인이어서 그러는 게 아닌 어떠한 죄책감이 덧씌워 져 있는 것 같다고 생각될 정도로.

고개를 돌려 과일을 깎고 있는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깎은 과일은 말끔했지만 가끔 힘이 주체가 안 되었는지 깊이 패인 흔적이 보였다.

원래는 깎은 과일 옆에 포크가 있어야 했지만 내가 포크로 목을 찌르려다가 실패한 이후로 내 손으로 먹거나 엘리사가 먹여주게 되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웠지만, 인간은 적응에 동물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나중에는 익숙하게 받아먹게 되었다.

"엘리사"

"....네 아가씨"

"과도 좀 주지 않을래? 과일을 깎고 싶은데."

"안 됩니다."

“너무하네……”

몇 달간의 흔한 대화 패턴이었다. 그래도 전에는 고민 정도는 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단칼에 거절할 정도였다. 장하구나 엘리사.

엘리사가 과일을 깎고 있을 동안 나는 과일을 손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씹을 때마다 아삭거리는 식감과 퍼져나오는 단맛은 중독성이 있었다.

아삭—

한동안 내가 과일을 먹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엘리사도 과일을 다 깎았는지 과도를 집어넣고 나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아가씨."

"어? 왜?"

엘리사가 먼저 말을 꺼내다니 이건 꽤 드문 경우였다. 평소 엘리사는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하루에 10마디도 하지 않을 만큼 조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대를 품으며 엘리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방 밖에 나가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어….?”

이어진 얘기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 말이었다. 엘리사는 내가 이 방 바깥으로 나갈 때는 사납게 꼬리를 올린 고양이처럼 경계 태세로 변화했다. 바깥에서는 자신이 예상할 수 없는 변수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라나.

그럴 정도인 엘리사가 밖에 나가보라고 하다니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몇 주 동안 아가씨께서 한 번도 방 바깥에 나가지 않으셔서……”

“아아…. 그렇긴 하지.”

엘리사의 말대로 나는 몇 주째 이 방에서 나가지 않은 중이었다. 이유는 아까도 말했던 무기력 때문이었다.

아마 몇 주 전 유리병으로 내 머리를 내려쳤는데도 이 방에서 깨어났을 때부터였지. 이번에는 확실히 죽겠다 싶었지만 깨어났을 때는 내 머리 위의 작은 혹을 제외하면 어떠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었다. 그때의 허탈감은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

“괜찮겠어?”

나는 엘리사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는 도발이라기보단 뭐랄까…. 아무튼 엘리사의 저런 걱정을 받으니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네. 무슨 일이 있어도 아가씨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엘리사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는 짙은 사명감이 배여 있었다. 그 사실이 쌉싸름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고개를 털어 잔 생각들을 털어내고 나는 침대의 이불을 걷고 어디를 갈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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