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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고 싶은 악역 영애님-1화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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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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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그의 책을 읽은 후부터 나는 내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저울질을 해오고 있었다. 몇십 년의 세월 동안 낯설기만 해 내게 부조리로 다가왔던 이 세상과 말이다.

그는 부조리한 이 세상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반항은 삶을 끝까지 이어나가는 것이라 말했다.

그 말에 감명 받았던 한 명의 독자는 지금 서울의 야경을 배경 삼아 건물의 옥상에 자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지쳐버렸다. 비루한 인생을 어찌저찌 여기까지 힘겹게 끌어왔지만 더는 끌어갈 힘이 없었다.

고아로 자라 20대 중반에 대기업 사원까지 올라갔으면 충분하지 않은가.

왼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에서 진동의 울림이 느껴졌다.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환한 불빛은 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매달 말일 팀별로 지출결의서를 취합하여……….]

잠금을 풀어 대충 문자를 훑어보고 다시 전원을 껐다. 안 보는 게 좋았을까.

짧게 되뇌며 건물의 끝자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별조차 보이지 않는 새까만 하늘 아래 통유리로 되어있는 건물들은 환한 불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 밑에는 옷깃을 여미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옆에 지나가고 있는 차들은 무심하게 그들을 지나쳤다. 무채색의 차들의 소리는 이 도시를 가득 메웠다.

그 소리를 듣고 있다가 왼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건물 아래로 던졌다.

손에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던 크기의 핸드폰은 점점 작아져 하나의 점으로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핸드폰이 떨어져 박살이 났음에도 도시에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한 발짝 더 끝자락으로 나아갔다.

이제는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허공이었다. 평소에는 느껴보지 못한 전율 때문인지 심장이 점점 크게 뛰었다. 마치 무서운 놀이기구 타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래를 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은 길거리는 무서웠지만, 고개를 돌려 도시의 야경을 보는 게 더욱 두려웠다.

한 발짝.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한 걸음이었다. 이 도시의 모습이 반전되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건지 인지하기도 전에 내 머리는 이 세계의 법칙에 따라 아래로 돌진했다.

눈을 떴다. 아니 떠졌다고 해야 할까. 분명 다시는 눈이 떠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눈을 감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눈이 뜨였다. 컨디션은 오랜 잠에서 깬 것 마냥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의 침대와 방은 고급스러웠다. 아니, 고풍스럽다는 표현이 더 알맞다고 해야 할까. 창밖에는 잘 정돈된 정원이 보였다. 눈을 아프도록 찔러오는 햇빛은 내가 떨어지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걸 짐작하게 했다.

내가 떨어지기 전에는 분명 초가을이었던 것 같지만, 창밖에서는 살이 에이는듯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얼굴에서는 따뜻한 방 안의 공기와 창문에서 불어오는 공기가 막 부딪히고 있었다.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가는 기분은 내 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정원이 보이는 각도로 볼 때 이곳은 꽤 높은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변화한 주변 환경에 당황의 연속이었다.

“아가씨…….”

옆에서 들린 소리에 옆을 돌아보자 백금발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메이드복의 차림을 한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기쁘지만, 어딘가 침울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아까부터 무언가 이상했다. 이 환경도 ‘나’도. 침대 옆에 엎어져 있던 손거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기 있습니다.”

메이드복을 입은 그녀는 내게 손거울을 갖다주었다. 손거울에 비친 사람은 내가 아닌 흑발의 금안을 가진 신비한 느낌의 소녀였다. 내가 지으려는 표정을 모르는 사람이 똑같이 따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신기하면서도 불쾌한 경험이었다.

………...저 소녀가 `나`라는 걸까. 갑자기 몰려드는 현실감은 온몸에 소름이 돋게 했다. 현실을 감당하지 못해 도피한 결과가 어딘지도 모를 세계로의 전이라니. 신이 있다면 손뼉을 쳐주고 싶을 만큼 완벽한 조치였다.

손거울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사후세계라기엔 너무나 현실감이 넘쳤고 대한민국이라기에는 너무나 넓고 고풍스러웠다.

어쩌면 이건 두 번째 기회일지도 모른다. 첫 번째 삶과 달리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기회 말이다.

나는 부드러운 이 소녀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어디인지도 모를 곳에서 두 번째 삶이라.

“......아가씨…?”

나는 이불에서 빠져나와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두 번째 삶이라니. 내게는 기회가 아니라 저주일 뿐이었다. 이곳이 어느 곳이든 간에 더는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내게 필요한 건 두 번째 기회가 아니라 영원한 안식이었다.

"..........□□□!!!!"

뒤에서 울부짖는 메이드의 소리를 뒤로하고 다시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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