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영애는 왕자님을 양보하겠습니다-86화 (86/86)

〈 86화 〉 일일 데이트 주간 ­에리자­

* * *

데이트의 세 번째 날. 에리자의 차례입니다.

“오늘 하루는 잘 부탁드릴게요, 아그네스 언니.”

“후후, 저도 잘 부탁해요, 에리자.”

어제는 에리나와 단둘이 데이트를 했으니, 오늘은 에리자와 함께 단둘이 만나야겠죠.

사실, 두 사람 중 누구와 먼저 데이트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고민을 했었는데, 에리자가 자진해서 에리나의 다음 날로 하겠다고 먼저 말해주었습니다.

“아그네스 언니, 정말로 에리나를 데려오면 안 될까요……?”

“안 돼요. 오늘은 에리자와 저 단 두 사람만의 시간인걸요.”

그리고 에리자는, 상당히 불안한 표정으로 제게 물었습니다.

저와 단둘이 지낼 수 있는 기쁨보다도, 늘 함께 있는 쌍둥이 자매가 곁에 없다는 것이 더 불안한 모양이네요.

“그, 그렇다면……. 호, 혹시 언니께서 지정하신 오늘 일정이 있으실까요……?”

이전에도 말씀드린 이야기이지만, 저는 일곱 분과의 데이트 계획을 전부 준비해 놓았습니다.

특히 항상 에리나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에리자에게 마음고생을 시킬 수는 없으니. 제가 마련한 계획대로 걱정 없이 놀게끔 해드려야겠죠.

“일단 오늘은…….”

제가 오늘의 계획에 대해서 입을 여는 순간, 에리자의 눈빛을 보고 말았습니다.

“…….”

아, 에리자가 준비한 무언가가 있는 표정이네요.

……저와 데이트하는 날만큼은 쉬게 해주고 싶었는데, 이미 준비해버렸으면 어쩔 수 없겠네요.

오히려 이 상황에서 에리자의 계획을 망쳐버리면 더 슬퍼하겠죠.

“미안해요, 아직 일정을 정하지는 못했어요.”

제 대답에 에리자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준비한 일정으로 아그네스 언니를 안내해드려도 될까요!”

“네, 부탁드릴게요, 에리자.”

어제보다는 조금 더 믿음직스러운, 에리자와의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에리자가 저를 처음으로 데려간 곳은, 귀족 거리에 있는 한 식당이었습니다.

“여기는…….”

네, 어제 에리나와 함께 가려고 했다가 실패했던 그 식당이네요.

아무래도 쌍둥이이다 보니, 발상 또한 비슷한 것 같습니다.

“어제 에리나……아, 아니! 이전에 에리나와 함께 온 적이 있는 식당이에요. 아그네스 언니에게 반드시 소개해드리고 싶어서 모시고 왔어요.”

오늘도 마찬가지로 줄이 길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어제보다는 줄이 적고, 오늘이라면 실패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에리자라면, 만약 어제와 같은 일이 생긴다고 해도 능란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그래요. 에리자가 준비해 준 곳이니까 기꺼이 기다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줄의 맨 뒤로 가려는데, 에리자가 제 손을 잡았습니다.

“아니에요, 아그네스 언니.”

제가 착각한 모양이네요. 에리자가 준비한 가게는 다른 가게였던 모양입니다.

쌍둥이라고 같은 가게를 생각했을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넘겨짚고 말았네요.

에리자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며 팔이 끌려 도착한 곳은, 긴 줄의 앞부분입니다.

“여기에요, 아그네스 언니.”

“자, 잠시만요, 에리나? 여기는 줄의 앞부분이잖아요! 새치기하는 건…….”

“안녕하셨습니까, 아그네스 님.”

제가 에리자를 훈계하던 도중, 줄을 서 있는 사람 중 한 명에게 인사가 돌아왔습니다.

“……어, 레나?”

에리나와 에리자의 사용인인, 레나입니다.

“제가 줄을 대신 서 놓았으니, 제 자리에 서시면 됩니다.”

……확실히 ‘새치기’는 안 되지만, ‘대신 서기’까지 금지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다른 귀족분들도 종종 사용하는 방법이니까요.

하지만 레나가 서 있는 위치를 보니, 적어도 한 시간 반은 넘게 서 있었을 것 같은데요.

오늘 에리자와 만난 시간으로부터 3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적어도 저를 만나기 한 시간은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준비성이 철저한 에리자답네요. 제가 계획을 말씀드리려고 했던 순간 당황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겠죠.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즐거운 식사 되십시오, 에리자 님, 아그네스 님.”

“아, 고마워요, 레나…….”

저와 에리자는 레나가 대신 서 준 자리에서 차례를 기다렸고, 5분도 지나지 않아 식당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 지나, 식사를 마치고 에리자와 함께 밖으로 나왔습니다.

“굉장히 맛있는 식당이었네요. 좋은 장소를 소개해 줘서 고마워요, 에리자.”

“처, 천만에요! 아그네스 언니께서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역시 이 가게의 알리오 올리오는 맛있네요. 요즘 바빠서 이 가게에 오지 못했는데, 에리자 덕에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음은 어디로 데려가 주실 건가요?”

“그게…….”

에리자는 주변을 살피다가 조금 당황한 듯, 시선을 피했습니다.

혹시 식당까지만 계획하고, 그 이후로는 계획을 세워놓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정해진 일정이 없다면, 소화할 겸 조금 산책이라도 하면서 생각해보는 건 어때요?”

“아, 아니에요! 일정이 있는데, 그러니까…….”

에리자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항상 모든 준비가 철저하고, 에리나를 닮아 기억력도 좋은 에리자가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러면 잠시 이 근처에서 이야기라도 할까요?”

“아, 네! 그게 좋겠어요!”

에리자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기억날 때까지, 가게 앞에서 에리자와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말주변이 조금 적은 에리자 대신 제가 대부분의 이야기를 주도했지만요.

다른 장소로 이동하려고 해도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식사를 한 가게 근처에서 있으려고 했기에, 저도 이유를 묻지 않고 에리자에게 어울려 주었습니다.

에리자와 이야기를 나눈 지 약 10분 후, 낯설지 않은 실루엣이 저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레나네요.

“아, 레나! 여기에요!”

에리자는 레나를 발견하자마자,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것처럼 기쁜 표정을 지었습니다.

레나는 저와 에리자가 있는 곳으로 서둘러서 달려왔습니다.

양손에는 크레이프를 두 개 든 상태로요.

“에리자 님, 아그네스 님. 실수로 딸기 생크림 크레이프를 두 개나 사버렸는데, 받아주실 수 있으십니까.”

……뭔가 여러 가지가 바뀐 것 같지만, 겪어본 적 있는 위화감이 느껴지네요.

“아, 아그네스 언니! 언니도 받아주세요!”

“……고마워요.”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것 같지만, 구태여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저와 에리자는 서로 딸기 크레이프를 하나씩 들고,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에리자와 함께 크레이프를 먹으며, 공원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마치, 어제 에리나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것처럼요.

“에리자, 에리자는 꽃 좋아하나요?”

“네? 꽃, 꽃이요?!”

“왜 그렇게 당황하고 그래요. 꽃은 별로 안 좋아하나요?”

“아, 아니에요! 꽃 좋아해요!”

좋아한다고 말하는 에리자의 눈은, 빠르게 무언가를 생각하듯이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꽃은 뭐가 있나요?”

“그게, 그게…….”

에리자는 제 눈을 피하며 고민하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습니다.

“방, 방아풀꽃이요! 꿀풀목 꿀풀과 산박하속의 방아풀꽃을 좋아해요! 방아풀꽃은 9월부터 10월 사이에 피는 보라색의 꽃인데요! 세로로 길게 피는 꽃이라서 다른 꽃들과는 다르게 신비롭고 특이해요! 꽃을 포함해서 잎과 줄기를 전부 말려서 복통을 낫게 해주는 약을 만들 때 쓰이기도 하고…….”

한창 열심히 이야기하던 에리자는, 돌연 표정이 굳으며 다시 고개를 내렸습니다.

“죄, 죄송해요! 이런 재미없는 얘기를 저 혼자 신난 듯이 말해서…….”

“네? 아니에요. 흥미로운 이야기였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 저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아이니까요.”

에리자는 갑자기 자신을 부정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저, 저는……에리나 없이는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아그네스 언니가 지루해하시는 걸 풀어드릴 수도 없어요……. 오늘도 어제 몰래 에리나와 아그네스 언니가 데이트하는 모습을 훔쳐보고, 에리나의 계획을 똑같이 따라 하기만 해서 아그네스 언니를 즐겁게 해드리려고 했어요…….

저는 에리나처럼 두 시간이 넘도록 아그네스 언니를 지루하지 않도록 길게 얘기할 말주변도 없고, 무엇을 하는 게 좋을지 제대로 정하지도 못하니까…….”

확실히 에리자는 항상 에리나와 함께였고, 셋이 모일 일이 있을 때마다 에리나의 말이나 제안에 주도해서 많이 따랐으니까요.

조용히 에리자의 제안을 따라가기만 하던 에리자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항상 에리나가 치는 사고를 제가 수습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저는 에리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아이예요. 에리나는 비록 수습을 못 할 뿐이지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지만, 저는 시작조차도 못 하는 아이예요…….”

“그렇지 않아요, 에리자.”

울고 있는 에리자의 눈물을 닦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뭐든지 완벽하게 하고 싶은 에리자의 심정은 이해해요. 하지만 누구에게나 잘 하는 것과 조금 서투른 것은 있으니까요.”

“네…….”

“그래도 에리자는, 에리자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으니까요.”

“하, 하지만 저는 저 혼자서는 반 사람 몫은커녕 시작조차…….”

“에리나와 같은 이야기를 하시네요.”

“네?”

성격은 다르지만, 그래도 서로를 깊게 의지하고 있었겠죠.

역시 에리나와 에리자는, 어떻게든 서로를 함께 있게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아마 이 세계에서 저뿐일 테니까요.

“에리나와 에리자가 헤어지지 않고, 언제까지고 함께 있게 만들어드릴 거에요. 물론,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것이 가능하다면, 에리자의 고민도 사라지겠죠?”

“그, 그렇지만 만약 다른 분들이 반대하신다면…….”

“에리자는 저에게, 다른 계획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세요?”

거짓말입니다. 다른 계획은 생각하지도 않고 있어요.

하지만 눈앞의 에리자를 위로해주기 위해서라면, 이런 작은 거짓말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아그네스 언니는 저와 에리나를 떨어뜨리지 않을 또 다른 방법이 있으신 거예요?”

그리고, 어떻게든 방법이라는 것은 찾아보면 나오기 마련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악역 영애인 제가, 모두의 사랑을 받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죠.

“저를 믿어주세요, 에리자. 혼자서 고민하고, 전부 짊어지려고 하지 마세요. 어려운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에리자는 에리자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네, 네! 아그네스 언니…….”

하염없이 흐를 것 같았던 에리자의 눈물을,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주었습니다.

“에리자, 어제 저와 에리나의 데이트를 훔쳐봤다고 했죠?”

“그, 그건……죄송해요…….”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제가 지금부터 에리자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도 알겠네요?”

“지금 아그네스 언니가……저에게 할 것이라면……?”

에리자는 잠시 어제의 기억을 회상하다가, 서서히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그리고,

“…….”

조금 떨면서 눈을 감고, 저를 향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저 또한 에리자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천천히 눈을 감고 입술을 맞대었습니다.

“…….”

에리자와의 키스에서는, 에리나와는조금 다른 딸기 맛이 났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