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부끄러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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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니콜라스가 앙겔로풀로스에 방문하신 날의 일입니다.
“아그네스, 다음 주말에는 빠지면 안 되는 무도회가 있는 거 알지? 반드시 내가 얼마 전 선물해 준 드레스를 입고 참석해.”
그 화려한 드레스를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파란색 드레스에 금색 자수가 한가득한 드레스였죠.
“내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을 따서 만든 드레스니까, 아그네스가 입고 누가 봐도 내 여자라고 여길 수 있게.”
내, 내 여자라니…….
“아, 네……알겠어요, 니콜라스.”
“표정이 좋지 않네. 혹시 예비 왕자비 신분으로 참석하는 게 부담스러워?”
“그, 그럴 리가요. 지금까지도 잘 참석해 왔었는데요, 뭘…….”
지금까지는 니콜라스가 ‘좋아하는 척’을 하려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것들이 진짜 애정 표현이었다는 걸 깨닫고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렇지? 그게 아니면, 혹시 열이라도 있어? 요즘 아그네스 몸 상태 관리를 잘 못 하던 것 같은데…….”
니콜라스는 갑자기 제 쪽으로 다가와 얼굴을 가까이하고 손바닥을 제 이마에 가져왔습니다.
“자, 잠시만요! 가까워요! 가깝다고요, 니콜라스!”
“이마에 손을 대는 정도는 예전에도 몇 번인가 했었잖아…….”
하루는, 파노스와 승마부 활동을 하던 중 생긴 일입니다.
“영애님, 자세가 조금 뒤틀리셨습니다. 조금 더 허리를 꼿꼿이 펴주세요.”
“아, 네, 네엣!”
평소처럼 파노스가 제 자세 교정을 위해 허리와 등에 손을 뻗었는데, 너무 의식한 나머지 소스라치게 놀라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놀라시나요? 혹시 제 손이 이상한 곳에 닿았습니까?”
“아, 아니에요! 파노스는 언제나처럼 제 자세 교정을 해주고 계실 뿐이니까요. 딱히 이상한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어요!”
이런 신체접촉이, 사실 의도되었다는 거죠……어차피 아리아나를 노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의식하지 않았는데, 막상 의식하니 꽤 적극적인 신체접촉 아닌가요?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저, 갑자기 달리고 싶어졌어요! 헬렌! 빨리 가요! 달려요, 빨리!”
지금까지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달아오른 나머지, 헬렌을 타고 서둘러서 파노스에게서 도망쳤습니다.
“영애님?! 어디까지 가십니까?!”
아리아나가 방문하는, 어느 두 번째 요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그네스 님, 오늘은 저번에 맛있게 드셨던 과자를 가져왔어요!”
“아, 고마워요, 아리아나.”
다행이네요. 아리아나는 딱히 의식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제나 아그네스 님께서 맛있게 드셔주시니 보람이 있네요.”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아리아나는 여자아이이기도 하고, 또 친한 친구라는 이미지가 강하니까요. 앞으로도 부담 없는 관계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그네스 님을 작게 만들어서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어요.”
“콜록, 콜록! 크헤엑!”
그렇게 생각하며 간식을 먹던 중, 아리아나의 적극적인 애정 표현에 그만 놀라서 두근거렸습니다.
“꺄악, 아, 아그네스 님?! 괜찮으세요?!”
“괘, 괜찮아요……잠시 사레가 들린 것뿐이라…….”
드물게 제 일정이 빈 날, 제이스가 제게 말을 꺼낸 날입니다.
“아그네스 누나, 새로운 물약에 필요한 재료가 있어서 그러니 같이 외출하시지 않겠습니까.”
“아, 네. 같이 가요, 제이스.”
역시 제이스는 가족이라서, 부끄럽거나 두근거리지 않네요. 제이스와는 평범하게 누나 동생 관계로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
“오랜만에 아그네스 누나와 둘이 나가는 외출이라서 즐겁습니다. 마리 씨가 동행하기는 하지만요. 아그네스 누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 잃어버릴 수 있으니 손을 잡고 걷도록 합시다.”
“네, 그렇게 해요.”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제이스의 손을 잡았는데, 어렸을 때보다 크고 길쭉해진 제이스의 손을 의식하니 제이스도 조금 남자다워졌다는 느낌이 드네요.
제이스는 제 손을 잡고 난 뒤,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붉혔습니다. 잠깐, 생각해 보니 제이스와 둘이 외출한다는 상황은 설마…….
“……제이스, 혹시 저와의 외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하시는 건 아니죠?”
“무, 무슨 특별한 의미 말입니까.”
“저와 데, 데이트라던가, 그런 생각을…….”
“…….”
“부, 부정해주세요! 제이스?!”
언제나처럼, 솔론 자매가 정산 회의를 하고 난 날의 밤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그네스 언니, 체온이 따듯해요…….”
평소와 같이 에리나는 제 품에 안겨들었는데, 어째선지 말하는 게 조금 부끄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요…….
“그, 그런가요, 에리나?”
“이렇게 누워 있으니, 아그네스 언니의 심장 박동이 느껴져요…….”
게다가 에리자도, 바짝 붙어서 굉장히 적극적인 말을…….
“에리자? 너무 많이 붙은 게 아닌가요?”
“지금까지도 이렇게 꼬옥 붙어서 잤는걸요…….”
“아그네스 언니, 저희가 불편해졌어요?”
“아, 아니에요! 두 사람과 같이 자는 건 언제나 환영이죠!”
에리나와 에리자가 상처받을까 봐, 서둘러서 부정했습니다.
“아그네스 언니……정말 좋아해요…….”
“이대로 영원히 아그네스 언니의 품속에서 잠들고 싶어요…….”
“하, 하하…….”
“엘렉트라? 오늘은 세신을 하…….”
잠깐, 엘렉트라도 저를 이성처럼 여기고 계신다면, 세신을 맡기는 것은 조금 위험한 거 아닌가요?
“세신 말씀이시죠? 미리 준비했습니다.”
“아, 그게……음…….”
“바라시는 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씀해주세요, 주인님.”
“세신 말인데……오늘은 넘어가면 안 될까요?”
일단은, 아주 조금만이라도 거리를 두는 게…….
“주인님의 백옥 같은 피부 관리를 위해서는, 넘어가지 않는 것을 권장합니다.”
“그, 그렇긴 하지만……마음의 준비가…….”
다른 사람에게 제 몸의 청결을 맡긴다는 게, 원래 이렇게 부끄러운 행위였나요?
“주인님? 마음의 준비라니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말아요!”
……어떡하죠, 저.
어머니의 말씀 이후로, 다른 분들을 이전처럼 대하지 못하겠어요.
지금까지는 저에게 사랑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서 편하게 대해왔던 것이었는데! 모두의 표정이나 행동 뒤에는, 다 제게 다른 감정을 품고 있어서 그랬다는 것을 알고 나니 엄청 부담스럽다고요!
게다가 지금까지 해왔던 자연스러운 대화나 신체접촉도, 이면에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워서 눈조차 못 마주칠 지경이에요.
어떻게든 익숙해지려고 해봐도,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원래대로 돌아가기는커녕 더 심해지고 있어요.
이제 며칠만 있으면 겨울방학이 끝나고, 2학년이 되면 학생회에 동생들까지 입학할 텐데…….
“아그네스 님, 고민이 많아 보이시는 표정이네요.”
엘렉트라가 고향에 내려가서, 오랜만에 제 시중을 드는 마리가 말했습니다.
“네……앞으로가 걱정돼서요.”
“장래에 반려로 누구를 선택하실지에 대한 걱정이신가요?”
“그것도 있지만……요즘 들어 점점 어떤 얼굴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는 평범하게 잘 대해 오셨잖아요. 다른 분들이 아그네스 님에게 반한 것도 다 아그네스 님의 그런 자신감 있는 태도 덕분이고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뻔뻔하게 그럴 수 있겠어요!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다른 사람들이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인다고요!”
“드디어 다른 분들의 무의미한 줄 알았던 노력의 결실이 보이기 시작하네요.”
“게다가 지금까지 집중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아리아나나, 엘렉트라나, 심지어 에리나 에리자에까지 묘한 감정이 든다니까요?! 같은 여자끼리인데!”
“다행이네요, 선택지가 넓어지셨으니까요.”
“그런 게 아니라요!”
자꾸 절 놀리기만 하시냐고요! 사람 속도 모르면서!
“어떡해요! 이대로 2학년을 시작했다가는 다른 분들의 어프로치 때문에 제가 못 버틴다고요! 잘못했다가는 제 쪽에서 먼저 선을 넘어버리면 어떡해요!”
“아그네스 님 쪽에서 먼저 다가와 주신다면, 거절하시는 분은 한 분도 없을 겁니다.”
“그런 것들이 다 부담이라고요…….”
저는 한 번도 제 주변 사람들과 연인이라든지 반려라든지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인제 와서 미래의 배우자 후보라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건…….
“게다가 제 몸은 하나라서, 모든 분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고요……하지만 모두 마음속으로는 자신을 선택해주길 원할 거 아니에요…….”
저는 원래는 악역 영애일 뿐이고, 모두의 사랑을 받을 만한 캐릭터가 아닌데…….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시면 되는 것 아닌가요?”
“네? 어떻게요?”
“일곱 분 모두를 배우자로 받아들이시고, 일곱 분 전원에게 사랑을 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어딨어요!”
“지금까지 해오셨던 일이잖아요.”
이, 일곱 명 전원이라니! 상상했더니 얼굴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마침 일주일은 일곱 요일이니까, 요일을 정하고 한 사람씩 만나는 것으로 하면 다른 분들도 충분히 이해하시지 않을까요?”
“우으…….”
누군가를 선택해서 죄를 짓는 것보다는, 확실히 나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 제가 그런 제안을 꺼내도……모두가 인정해줄까요……? 모두의 사랑이 부담스러운 것은 맞지만, 그래도 미움받고 싶지는 않은데…….”
“아그네스 님의 선택이라면 모두 인정하실 겁니다. 물론, 여러 가지 준비는 필요하겠지만요.”
“…….”
마리의 말을 이대로 따라가도 괜찮은 걸까요…….
“동의하신 것으로 알고, 제가 사전 준비는 마쳐놓겠습니다.”
“주, 준비는 부탁드리겠지만, 무조건 그렇게 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네?”
“그러니까! 제가 힘내서 모두에게 공평하게 사랑을 주는 것도 좋아요!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만 하면 된다는 거잖아요?”
“맞습니다, 아그네스 님.”
“하지만, 만약 한 사람이라도 마리가 말한 제안을 거절하신다면, 저는 다시 진지하게 고민할 거예요! 어디까지나 모두가 동의했을 때만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내,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동의할 사람이 어딨겠어요! 마리도 참 순진하네요.
마리와 함께 잘 풀리지 않을 것이 확실한 계획을 세운 채, 아스토리아 왕립학교의 2학년을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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