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계획을 말했습니다
* * *
“일단, 니콜라스 왕자님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해봤자 의미 없을 것 같네요.”
마리가 니콜라스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만약에라도 파혼이 성공하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니콜라스 왕자님에게서 파혼하고 도망칠 수 있을 만한 곳은, 파노스 왕자님과 결혼하시는 것 정도밖에 없을 것 같네요.”
“네? 파노스 왕자가 갑자기 왜 나와요?”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의미로 물어보았는데, 오히려 마리 쪽에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니콜라스 왕자님을 제외하면, 아그네스 님에게 연애 감정을 품은 사람 중 가장 유력한 사람은 파노스 왕자님이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파노스 왕자가 왜 저한테 연애감정을 품고 있냐고요.”
“……네?”
마리가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네요.
“뭐, 파노스 왕자가 아주 어렸을 때는 저를 좋아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요. 하지만 원래 사랑이라는 것은 커가면서 바뀌는 것이잖아요. 지금 파노스 왕자는 원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리아나에 홀딱 반해 있으니까요.”
“파노스 왕자님이……아리아나 님에게……네?”
“원작에서의 파노스 왕자는 원래 아리아나와 약혼자 사이였으니까요. 어쩌다 보니 두 사람의 약혼은 무산되었지만, 좋아하는 감정은 그대로 남아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잖아요.”
“단순히 그것만으로 파노스 왕자님이 아리아나 님을 좋아하신다고 단정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이유야 더 있죠. 매년 아리아나의 생일에 맞춰 프레타리아까지 먼 길을 행차하는 것, 아리아나와 조금 더 만나고 싶은 핑계를 만들려고 아스토리아 기초학교를 개교한 것, 학생회에서 서기를 맡아 부회장인 아리아나의 옆자리에 앉은 것까지 모든 것이 파노스 왕자의 아리아나에 대한 감정을 증명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매주 편지를 주고받으시고, 승마부의 활동도 단 두 분께서만 하시지 않나요?”
“그 정도는 조금 친한 친구끼리도 하는 거잖아요. 설마 저와 파노스 왕자가 단순히 남자와 여자라는 이유로 같이 있으면 무조건 연애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고지식한 사고방식을 갖고 계신 건 아니죠?”
“혹시 파노스 왕자의 자체가 맘에 안 드신다는 건…….”
“네? 온갖 영애들의 우상인 파노스 왕자가 성에 안 차면 얼마나 눈이 높은 거예요. 잘생기시고, 키도 크시고, 신체 능력도 좋으시잖아요. 성격이 조금 능글맞기야 하지만요.”
“…….”
마리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제 아셨죠? 파노스 왕자가 저를 좋아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요.”
“아직은 모르겠지만……다른 건 알 것 같네요.”
마리가 어째서인지 손을 이마에 갖다 대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니콜라스 왕자님과도 결혼하지 않고, 파노스 왕자님에게 보호를 받을 생각도 아니라면……남은 것은 아그네스 님께서 직접 앙겔로풀로스 가문을 이으시는 것밖에 없으시겠네요.”
“그건 또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국내에서 가장 세력이 큰 니콜라스 왕자님과 파노스 왕자님의 세력을 피해서 아그네스 님이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앙겔로풀로스 가문을 직접 이으시는 방법밖에 없으실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앙겔로풀로스 가문은 제이스가 물려받는 것으로 결정되어 있잖아요. 저를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줬다 뺏는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싶으신 거예요?”
“하지만 그것밖에 남은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굳이 제이스 님과 당주 자리를 놓고 경쟁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설마, 앙겔로풀로스 가문에서 분가하라고요?”
“아니요, 아그네스 님께서 의동생이신 제이스 님과 혼약하시고, 함께 앙겔로풀로스 가문의 유지를 이으시면 됩니다.”
마리가 던진 말에, 잠시 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아, 아하하하하하하!”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뭐가 그리 재밌으신가요?”
“아하하, 그, 그야 당연히 마리가 한 농담이죠. 하마터면 이해하지 못할 뻔했네요. 재미있었어요, 마리.”
“……제가 방금 했던 말의 어느 부분이 웃긴 것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마리는 굳이 자신이 했던 농담을 제게 설명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야 당연히 제가 제이스와 혼약한다는 부분이죠. 아아, 너무 재밌었어요. 조금 기분이 우울했었는데, 마리 덕분에 괜찮아졌네요.”
“대체 그 부분의 어디가…….”
“제이스는 이미 에리나나 에리자를 좋아하고 있는데, 저와 혼약할 리가 없잖아요.”
“……우선 말씀드리면, 제이스 님은 아그네스 님을 좋아하고 계십니다.”
“물론 좋아하겠죠. 하지만 그것은 가족이니까 소중하게 여기고 싶다는 감정이잖아요. 저도 부모님이나 제이스는 좋아해요. 하지만 그것이 평생의 반려로 삼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제이스 님이 에리나 님이나 에리자 님을 좋아한다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근거라면 엄청나게 많죠. 일단, 원래 세계에서는 제이스가 에리자의 약혼자였어요. 그리고 에리나와 에리자가 방문해서 저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제가 연구실을 빌려서 두 사람과 무언가를 할 때마다, 제게 질투를 느끼고 항상 사이를 가로막거든요. 그런 게 한두 번이 아니라 수십 번이거든요. 마리도 몇 번 본 기억이 있을 텐데요.”
“반대로, 에리나 님과 에리자 님을 질투해서 아그네스 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막는 것은 아닐까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제이스는 제 남동생이잖아요. 대체 누나를 연애 대상으로 삼는 남동생이 세상 어디에 있다는 거예요.”
“…….”
“저도 제이스가 지적인 외모에, 자상하고,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면 멋있어 보인다는 것은 인정해요. 만약 남동생이 아니었으면 연애 감정을 가졌을지도 모르죠. 조금 무뚝뚝하기는 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매력도 있고요.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남동생으로 봐 온 기간이 길다 보니, 솔직히 이성으로 보는 것은 힘들어요. 그건 아마 제이스가 저에게 갖는 감정도 마찬가지겠죠.”
“잠시 제이스 님을 위로하고 와도 될까요.”
“제이스의 연구를 방해하지 마세요.”
지금 제이스는 제 부탁으로 한창 출산에 도움이 되는 물약을 연구하고 있을 테니까요. 괜히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가 집중이 흐트러지면 안 되잖아요.
“그럼 제이스 님과의 혼인으로 앙겔로풀로스 가문의 유지를 이으시는 것도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신변을 보호하실 생각입니까.”
“프레타리아로 갈 거예요.”
“프레타리아요?”
마리는 의문스럽게 물었습니다.
“프레타리아에 있는, 아리아나가 마련해 준 비밀 별장에서 지낼 거예요.”
“하아…….”
마리가 갑자기 피곤해졌다는 듯한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렇다면, 아그네스 님은 결혼하지 않고, 프레타리아에서 아리아나 님과 남은 평생을 지내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죠, 프레타리아에서……네, 아리아나랑요?”
“네. 아리아나 님을 선택하셔서 남은 평생을 지내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리가 이상한 이야기를 해서 되물었습니다.
“아리아나와 남은 평생을 지낸다는 이야기는, 갑자기 왜 나오는 거죠?”
“그야 아리아나 님은 아그네스 님을 사랑하고 계시니, 아리아나 님의 별장에 들어가신다는 것은 곧 아리아나 님을 반려로 삼겠다는 이야기…….”
“그 전제부터가 잘못됐잖아요. 아리아나는 니콜라스를 좋아하는데 왜 저를 반려로 삼으려고 하겠어요.”
“……아리아나 님이 니콜라스 왕자님을 좋아하신다고요?”
“당연하죠. 원작에서도 아리아나는 니콜라스를 좋아했으니까요. 아리아나가 왜 굳이 번거롭게 매주 앙겔로풀로스에 방문하는지 모르세요?”
“그거야말로 당연히 아리아나 님이 아그네스 님을 좋아하시는 것 이외의 이유가 있습니까.”
“아니죠. 니콜라스의 약혼자인 제가 아리아나에게 니콜라스와 이어지게 만들어지도록 도와드린다고 했으니, 그것을 믿고 제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네, 했어요. 니콜라스는 제가 감당하기 어려우니 아리아나가 더 사랑할 수 있을 거라던가, 힘들거나 불가능한 사랑이라도 제가 도와드리겠다고요.”
“힘들거나 불가능한 사랑…….”
“아리아나의 여덟 살 생일 때도, 아리아나를 반드시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
“아리아나와 인간관계를 갖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아리아나에 대해 알아가고 각별한 사이가 된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친구로서 가지는 감정이죠. 아리아나는 예쁘고 착하니까, 제가 남자였다면 반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아…….”
마리는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럼, 에리나 님과 에리자 님에게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아, 그 문제가 있었네요. 화상 치료의 물약 특허권을 가지고 있는 제가 사라져버리면, 두 사람이 운영하는 공방에도 차질이 생기겠죠?”
“……네?”
“서류를 준비해 놔야겠네요. 제가 니콜라스에게 파혼당한 이후, 화상 치료의 물약에 관한 모든 권리는 두 사람에게 증여한다고요.”
“……그것뿐입니까? 에리나 님과 에리자 님이 아그네스 님을 사랑하는 감정에 대해서는 정리하지 않으실 겁니까?”
“저를 사랑……, 아, 동생이 언니에게 갖는 사모하고 동경하는 그럼 감정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런 감정이 아니라…….”
“물론, 저도 귀여운 여동생 같은 두 사람과 헤어지게 되면 슬프겠죠. 그래도 두 사람에게는 제이스가 있으니까요. 제이스가 두 사람을 다 사랑으로 포용해주면, 아마 제게 갖고 있던 감정도 차츰 잊어갈 거예요.”
“제이스 님이 에리나 님과 에리자 님을 사랑으로 포용……진심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가능하고 말고가 아니라, 이미 제이스는 두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니까요.”
“…….”
역시, 게임에서의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을 이 세계의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힘드네요. 그렇게 유능한 마리에게조차도 이렇게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요.
“……정리하자면, 아그네스 님은 니콜라스 왕자님과의 파혼 이후, 아리아나 님이 마련하신 프레타리아 별장에서, 엘렉트라 양을 시종으로 데리고 가서 여생을 보내시겠다는 이야기이신가요?”
“네, 맞아요. 니콜라스와 파혼 이후에는 프레타리아에 있는 아리아나의……잠깐만요. 엘렉트라요?”
“네, 엘렉트라 양이요. 평생 모시게 해준다고 약속하셨잖습니까.”
“엘렉트라는 저를 싫어할 텐데, 따라와 줄 리가 없겠죠.”
“……이젠 놀라기도 지치네요.”
오늘 하루 만에 모든 게임의 스토리를 듣느라 마리가 지친 듯하네요.
“엘렉트라 양이 대체 왜, 아그네스 님을 싫어하겠어요! 그 아이가 아그네스 님에게 보이는 호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으신다고요?!”
“마, 마리? 화났어요, 설마?”
“……죄송합니다. 제 후임에 관한 일이라서 조금 흥분했습니다.”
마, 마리가 제게 화내는 모습 처음 봤어요……. 역시 엘렉트라에 관련된 일이라 그런가요? 항상 침착한 마리가 이렇게까지 화내다니, 역시 엘렉트라네요.
원작의 주인공답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편으로 유혹한 것 같습니다.
“이번만큼은 제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주시지 않으면,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어……‘이번만큼은’ 이 무슨 의미죠?
“제가 왜 엘렉트라를 괴롭혔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죠?”
“엘렉트라 양을 괴롭혀서 증언을 받아내야, 니콜라스 왕자님과 파혼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엘렉트라를 만난 이후로, 철저하게 미움받을만한 행동을 해왔어요.”
조금 무서웠지만, 마리에게 지난 과거를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우선 아스토리아 기초학교 입학 첫날에 있었던 일인데요.”
“화려한 발차기로 위기였던 엘렉트라 양을 구하고 빠져나왔던 날 말씀이신가요.”
“어, 어떻게 마리가 알고 있어요?”
“그 소동을 피우셔놓고 소문이 안 났을 것으로 생각하셨어요?”
“아,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다음이에요.”
저는 확신하고 마리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날 엘렉트라를 끌고 와서, 제 ‘장난감’으로 삼겠다고 선언했으니까요!”
“…….”
……꽤 중요한 이야기였는데, 마리의 표정이 전혀 바뀌지 않네요.
“그게 다인가요?”
“그게 다라니요! 앞으로 엘렉트라의 신변을, 공작 영애인 제 권력을 사용해서 마음대로 다루겠다고 선언하는 극악무도한 짓이잖아요!”
“…….”
마리가 만족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 물론 더 있어요!”
“별 기대는 안 되지만, 어떤 건가요?”
“항상 제 주변에 데리고 다니면서 식사할 때 식사 예절을 비웃거나, 걸음걸이가 고릴라 같다고 모욕하거나, 아무 데서나 하품 좀 하지 말라고 지적했어요!”
“그게 다인가요?”
“또, 또 있어요! 학기 중의 괴롭힘으로는 모자랄 것 같아서, 아예 방학 중에서도 집으로 데려와서 제게 봉사를 시켰어요!”
“‘정당한 보수를 지급하면서’ 말이죠.”
“게다가 아예 학교에서도 괴롭히는 것을 합리화하려고, 아예 학교 전용 시종으로 부려먹었어요!”
“‘한 학기의 학비를 전부 지원하면서’ 말이죠.”
“그런 행동을 3년 내내…….”
“아그네스 님.”
마리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 어떤 괴롭힘도, ‘돈을 주면서’ 하면 괴롭힘이 아닙니다.”
“……그런 거예요?”
“게다가 엘렉트라 양은 진심으로 아그네스 님을 모시는 것을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선임인 제가 곁에서 오랫동안 봐왔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거,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고……실제로는 다를지도 모르잖아요……가령 일부러 미소를 지으며 증거를 차곡차곡 모으고 있다든지…….”
“아그네스 님.”
“제 소중한 후임의 진심을 부정하지 마세요.”
…….
…….
…….
“아그네스 님?”
“꺄악, 죄,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아그네스 님, 정신 차리세요.”
“아, 네, 마, 마리…….”
마리는 엘렉트라를 정말 소중히 여기는군요. 하, 하긴 거의 7년 가까이 제 시중을 혼자 맡았다가 처음 들어온 후임일 테니 사이가 각별하겠죠.
엘렉트라를 부정하는 이야기는 마리 앞에서는 하면 안 되겠네요.
“어쨌든 지금이라도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어……해결이요?”
“네, 해결이요.”
저는 그저 지금까지 마리를 속여왔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앞으로 제 이해자가 되어주시기를 바라서 꺼낸 이야기였는데, 해결이라니 무슨 말씀이시죠?
“엘렉트라 양은 아그네스 님의 시중으로 붙일 것이니 제외하고 여섯, 아니, 에리나 님과 에리자 님은 같이 움직이실 가능성이 크니까 다섯……어떻게든 착각부터 깨닫게 하시고 후보 중에서 아그네스 님이 스스로 결정하시게 만들어야…….”
의미를 물어보려고 했지만, 마리가 너무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려서 차마 방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뭐, 저는 제 나름대로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움직이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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