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엘렉트라 멜리나 어느 날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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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주인님의 시종인, 엘렉트라 멜리나입니다.
작년의 일곱 번째 달부터 주인님을 모시기 시작했으니, 벌써 주인님의 시종이 된 지 벌써 열 달 가까이 되어 가네요.
주인님을 사모하기 시작한 기간은, 딱 1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작년의 세 번째 달, 저는 아스토리아 기초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누군가가 어떤 연유로 우리 집에 보내주신, 아스토리아 기초학교의 입학원서와 등록금. 그리고 예쁜 글씨로 쓰인 편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희 집안은학교에 입학할 등록금은커녕, 하루하루를 살아가기에도 굉장히 힘든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믿고 맡기신 영지의 관리인이, 아버지와 협력 관계에 계신 다른 자작과 모의하여 아버지를 함정에 빠트리시고, 막대한 빚을 떠넘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영지 한쪽에서는 큰 산불이 나서,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많은 논밭의 식량과 가축이 죽어 큰 손해를 입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긍정적인 분이셨습니다. 돈은 다시 벌면 되고, 재산은 다시 회복하면 된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사람을 잃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면서, 긍정적으로 다시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하지만, 불행은 연달아 찾아온다고 할까요.
아버지는 사람을 잃는 일까지 겪으시고 맙니다. 그것도 가장 소중한 사람을요.
제가 아홉 살일 때, 저희 어머니이신 카타리나 멜리나는 병으로 돌아가시고 맙니다.
그때 아버지의 모습은……굳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일 년 만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영지의 빚을 갚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셨습니다.
저도 아버지를 위해, 시종을 고용하는 대신 온갖 가사 노동을 하고, 식비를 아끼기 위해 농장에서 직접 밀과 닭을 길렀습니다.
그런 생활을 1~2년 정도 지냈을 무렵 도착한 것이 앞서 말한, 아스토리아 기초학교의 입학원서와 등록금입니다.
발신인도 없고, 오직 흔적이라고는 아주 예쁜 글씨로 써진 ‘아스토리아 기초학교에 입학한 후 남은 돈은 생활비로 사용하라’라는 내용이 적힌 편지뿐이었습니다.
너무 큰 돈과 영문을 모르는 문서를 받고 당황한 저는, 일단 아버지에게 상담을 부탁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스토리아 기초학교’라고 적힌 입학원서를 보시자마자, 눈빛이 달라지셨습니다.
그리고는 편지의 내용대로 저를 입학하라고 종용하셨습니다. 만약 다음 학기 등록금이 다시 배달되지 않더라도, 당신께서 벌어 주신다고 말씀하시면서요.
저는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당시 영지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빚이 남아 있었고.
제가 집안에 없으면, 아버지의 식사를 포함한 가사 업무와 농장을 돌볼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평생의 소원이라며 제게 학교의 입학을 부탁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학비가 없어 장남인데도 아스토리아 왕립학교를 졸업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사교계에서도 고립되고 더욱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저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두 가지의 목표를 갖고 아스토리아 기초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의 소원대로 아스토리아 왕립학교까지 무사히 졸업하는 것.
또 하나는, 예쁜 글씨로 쓰인 편지의 주인을 찾아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아스토리아 기초학교에 저를 입학시키려고 입학원서와 등록금까지 손수 배달하신 것을 보면, 이유는 잘 몰라도 아스토리아 기초학교에 다니는 어떤 영애분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등교 첫날, 저는 누군가에게 발을 걸려 넘어졌습니다.
“어머 어머, 거지 자작 영애, 실수, 엘렉트라 자작 영애 아니신가요?”
“호호, 가난한 자작 아니랄까 봐 흙먼지가 잔뜩 묻은 교복을 입고 오셨네요?”
“……죄송하지만 조금 떨어져 주시겠어요? 말똥 냄새가 심해서 근처에 있을 수가 없네요.”
저를 넘어뜨린 사람은, 일전에 사교계에서 딱 한 번 뵀던, 공작 영애분이셨습니다.
그때도 이 사람은 제 옷차림과 교양을 지적하며, 많은 사람 앞에서 대대적인 망신을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악연은 아스토리아 기초학교에서도 이어져 버렸습니다.
넘어진 제 얼굴에 흙먼지를 뿌리고, 가위를 꺼내 제 교복을 난도질하려는 모습을 보고 저는 절망했습니다.
이곳에서도, 제가 있을 곳은 없다고 생각하면서요.
그리고 가위가 제 교복에 닿으려고 할 때, 한 명의 영애분이 저와 그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았습니다.
“아, 안돼요! 잠시만요! 그만두어주세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영애분은, 온몸으로 공작 영애의 괴롭힘을 막아주셨습니다.
제 미래의 주인님이셨습니다.
그분의 등은 작았지만, 어째선지 넓고 듬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제 팔의 구속을 맡고 있던 백작 영애들은 제가 아닌 주인님의 팔을 묶고 있었습니다.
괴롭힘의 대상이 저에게서 주인님으로 옮겨간 것을 본 저는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두려움에 그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쩔 수 없이 주인님이 당하시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순간,
타악!
주인님의 작은 몸이 갑자기 하늘로 오르고, 신발로 공작 영애의 얼굴을 차버렸습니다.
그 기이한 광경에, 잠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그네스 님!”
이윽고 주인님의 추종자가 주인님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습니다.
저도 그때, 이 작은 영애가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공작 영애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변방 자작 영애인 저도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한 귀족이었습니다.
왜 그런 높으시고 대단한 사람이 저를 도와주신 걸까 상상하는 사이, 주인님은 추종자와 함께 제 손을 잡고 군중 속에서 도망쳤습니다.
사람이 없는 곳까지 도망친 주인님에게, 저는 의문이 들어서 물었습니다.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님과 같이 대단하신 분이……왜 저 같은 아이를 도와주셨는지…….”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이었으니, 저를 도와주실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차, 착각하지 마세요, 엘렉트라 멜리나! 제가 설마 당신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렇게 시작하여 말을 이어나간 주인님은, 저를 ‘장난감’이라고 매도하며 다른 사람이 가지고 노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순간 실망했습니다.
마음 한구석에선, 이 사람이 등록금과 편지를 전해주신 분이라서 도와주신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잠시만 가만히 계세요.”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주인님은 제 얼굴에 어떤 약을 바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아까 넘어지면서 얼굴에 생긴 상처를 치유하는 상처 치유의 물약이었습니다.
“제 장난감이 망가지는 게 싫을 뿐이거든요! 내일부터 각오하도록 하세요!”
그런 말을 남긴 주인님께서는, 추종자와 함께 제게서 떠나가셨습니다.
이후 매일같이 주인님은 저를 데리고 다니며 저를 괴롭히셨습니다.
정확히는, 괴롭힌다는 핑계를 대며 제 교양 예절을 일일이 고쳐주셨습니다.
식사 예절, 걸음걸이, 옷차림, 그 외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일부러 거친 말로 매도하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말의 내용물은 친절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니, 주인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감사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주인님이 저를 데리고 다니시니, 처음에는 저를 괴롭히던 다른 분들의 괴롭힘도 어느새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아마, 주인님과 척을 지면서까지 저를 못살게 굴 가치는 없다고 생각하셨겠죠.
주인님이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저의 모자란 교양을 채워줌과 동시에,
반대편에서는 주인님의 권력으로 저를 향한 괴롭힘을 막아주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저는, 이미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 학기를 보내고, 여름방학의 2개월 동안 주인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 침울해졌을 무렵, 주인님께서는 제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습니다.
“엘렉트라, 여름방학 동안 제 시종으로 일하지 않겠어요?”
여름방학 중에도 주인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제 모자란 능력이 주인님을 실망하게 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 제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고, 주인님께서는 단호하게 꾸짖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그만두세요. 그 정도 의지도 없는 이름 없는 가문의 자작 영애는, 제가 두 달이나 얼굴을 못 보면 하찮아서 기억을 못 할지도 모르지만요.”
주인님의 단호한 일침을 듣고, 비로소 다시 의지가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주인님을 모시며 앙겔로풀로스 가문에서 일하는 기간은, 굉장히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사모하는 주인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신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제가 가장 기뻤던 것은, 주인님을 위해 제가 한 모든 행동을 주인님께서는 빠짐없이 알아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깨끗하게 빈틈없이 해 놓은 청소, 블렌딩한 허브티, 직접 구운 쿠키……주인님께서는 모든 것을 파악하고 놓치는 것 없이 모든 요소를 칭찬해주셨습니다.
심지어는 어느 날에 어떤 다과와 어떤 차가 맛있었으니 오늘 손님에게 대접하라는 등, 제가 주인님에게 한 모든 행동을 기억하셨습니다.
주인님의 기상, 환복, 식사, 목욕, 잠자리에 들기까지 모든 주인님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님의 테이블을 정리하던 중 주인님과 파노스 왕자가 쓰는 편지를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그 편지를 본 순간, 저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인님이 파노스 왕자에게 쓴 편지의 글씨체는, 제가 입학 전에 받은 편지의 글씨체와 완전히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처음의 입학 등록금을 주신 것도 주인님이었을까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8월을 일주일 남기고, 주인님께서는 저를 방으로 부르셨습니다.
“월급이에요, 받으세요.”
8월의 수당과 함께 일주일의 휴가를 주신 주인님은, 멜리나 가문 영지로 돌아가기 전 오늘 하루는 같이 식사하는 것을 허락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님의 배려에 감동하여 상자를 가지고 방을 나가려는 순간,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습니다.
이상함을 느껴 주인님에게 말씀드리고 상자를 열어보니, 제 지난달 월급의 두 배 이상의 돈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당신의 다음 학기 등록금을 같이 담은 거예요.”
저에게는 주인님이 제 학비를 대신 내주실 가치가 없기에, 당연하게도 거절하였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주인님의 말씀은, 학비를 대신 내주신다는 것보다도 더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그건 아스토리아 기초학교에 있는 동안 당신의 사용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요.”
아스토리아 기초학교는, 기숙사를 제외하고는 시설 내로 시종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를 학교에 있는 동안 시종으로 부리고, 그 대신 제 학비를 내주시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여기까지 들으니, 최초의 학비를 내주신 것이 주인님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주인님께서는 굳이 말씀하시진 않으셨지만요.
“여름방학이 끝난 후 시종을 그만두겠다거나 하는 말을 하실 작정이라면, 어림도 없을 줄 아세요! 한 번 제 시종이 된 이상 당신은 평생 저를 모셔야 할 운명이니까요!”
주인님의, 아그네스 님의 그 말씀에, 저는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주인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평생에 걸쳐 아그네스 님을 모시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인님도 언젠가는, 결혼을 하게 되시겠죠.
그 상대가 약혼자인 니콜라스 왕자인지, 혹은 모종의 이유로 다른 사람이 될지, 지금의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합니다.
주인님이 어느 사람과 결혼하셔도, 저는 평생을 따라갈 것입니다.
언제나 항상 주인님의 곁에 있을 사람은, 바로 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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